왓챠피디아 리뷰

영화 <서브스턴스> 후기(2024.12.24)

sonoregret 2024. 12. 26. 14:02

⚠️⚠️⚠️스포주의⚠️⚠️⚠️


왓차피디아 별점: ★★★★☆

장안의 화제인 개미친영화를 드디어 보고 왔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뭔 놈의 영화인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 안 보면 극장에서는 아예 못 볼 것 같아서 헐레벌떡 예매함.

이 영화는 여성 감독이 피눈물로 써 내려간 작품이라는 왓챠피디아 한 줄 평이 있었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도 했을 감독이 지금까지 여성으로 이 산업 속에서 지내오며 느꼈을 분노와 고뇌가 영화 전체에 은은하게 감돌다가 후반부에서는 아예 폭발을 한다. 피눈물이 흘러서 홍수가 남. 무언가를 '피로 썼다'라고 말하기 위해선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깊은 고민과 복잡한 메시지를 담은 문제작이었다.

단순히 <젊고 순진한 여성들을 착취하는 쇼 비즈니스 세계의 나쁜 남자들>을 고발하는 쉬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시선으로 소비되는 여성의 몸과 그 몸을 착취하는 여성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강조하겠다. <여성 자신>이다. 그녀를 착취하는 것은 크게는 남성들이지만 분명 그녀 자신도 그 착취 구조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이 영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영화 내내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잊지 마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대사로 귀결된다.

1. 개구멍

서브스턴스를 찾기 위해 주인공 엘리지베스(리즈)는 낯선 주소로 향한다. 그곳에 있는 낡은 문은 그녀가 카드키를 찍었음에도 반밖에 열리지 않는다. 절반 밖에 안 열린 개구멍 같은 문은 앞으로 그녀가 서브스턴스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굴욕과 수모를 겪을 것임을 예고한다.

영화는 내내 서브스턴스가 금기임을 보여준다. 다단계나 마약 밀매처럼 은밀하게 전달되는 정보, 장기매매 광고 같은 안내문, 누가 봐도 허름한 뒷골목인 것도 모자라 절반밖에 열리지 않는 문, 그녀가 주사기로 몸에 찔러 넣는 수상쩍은 형광 초록색 액체까지. 형광색은 곤충이 애벌레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고의 색이다.

이처럼 서브스턴스라는 금지된 기술은 본질적으로 사용자를 비참하게 만들고, 그 비참함을 감내할 만큼 젊음을 갈망하는 자만이 이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수많은 경고 신호를 모두 무시하고 직진할 만큼 절박한 사람만이 서브스턴스의 사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리즈는 절박하다. 왕년에 잘 나가던 연예인이었던 그녀는 겉으로는 아직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자신이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몰락한 원인을 젊음의 상실로 돌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젊은 육체'의 상실이지만, 리즈는 영화 속에서 오직 몸밖에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 그려지므로 젊은 몸의 상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도 끔찍하게 공허하고 불행하다.

그녀의 거대한 집 거실에는 마치 빅 브라더처럼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거대한 초상 사진이 있다. 빅 브라더는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리즈의 사진은 구체적인 존재다. 각종 예술과 문학에서 찬양하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이자, 자본주의의 눈으로는 가장 뛰어난 상품 가치를 지닌 젊음을 담고 있는 이 사진은 단순히 그녀의 과거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많은 여성들이 개별적으로 꿈꾸고 갈망하는 '완벽한 여성상'을 이 사진은 담고 있다. 그것이 리즈에게는 자신의 과거이고 우리 같은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어떤 아이돌, 어떤 배우, 어떤 스타, 자신이 우상으로 삼은 어떤 여성일 것이다. 사진 속의 시선이 24시간 위압적으로 그녀를 지켜보기에 리즈는 절박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금지된 기술을 꺼내 쓸 만큼.

2. 버려지고 내팽개쳐지고 쥐어짜이는 그녀의 몸

서브스턴스는 육체적인 변화다. 영화 속에서 이 변화는 신비롭거나 모호하게 처리되지 않고 매우 물리적인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다. 더 나은 나인 젊은 '수'가 원래 나인 늙은(사실 별로 늙지도 않았지만) '리즈'의 몸을 뚫고 기어 나오는 장면을 카메라는 충격적일 만큼 생생하게 화면에 담는다. 등껍질이 찢어지면서 기어 나오는 에일리언 같은 생명체, 흥건한 피,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뚫리는 장면,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물리적 고통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렇게 이 영화는 '여성의 육체'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초반부에서는 리즈의 나이 든 육체를 집요하게 화면에 담는다. 늘어진 엉덩이와 가슴, 색소 침착이 시작된 피부,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과 구겨져 주름이 지기 시작한 입매. '수'로 재탄생한 그녀가 새로운 몸을 얻고 느끼는 만족감 역시 카메라는 거리감을 줄인 채 노골적으로 쫓아간다. 출렁거리는 엉덩이, 가슴의 곡선, 길게 뻗은 팔과 다리와 목, 그야말로 살색의 향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리즈와 수의 육체를 집요하게 쫓는 시선이 선정적이라고 여겨 불편해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감독의 이런 카메라 워킹과 연출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의도된 것이며 그 의도는 관객들에게 성적인 흥분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영화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란 어떤 것인지 대해서 광적인 집착으로 탐구하는 영화다. 말하자면 카메라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봐라, 이게 여러분이 우리의 몸을 소비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 빌어먹을 사회가 여성의 몸을 이렇게나 씹고 뜯고 맛보면서 온갖 난리 법석을 떨고 있는데 감독인 내가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우아한 예술이나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카메라의 시선이야말로 나 너 우리에게 쏟아지는 현실인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페미니즘에서 백날천날 너의 몸 나의 몸 우리의 몸몸몸몸 하고 강조하는 이유를 처음으로 제대로 깨달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잘 몰랐던 부분에 대한 깨달음을 저 노골적인 카메라 워킹을 통해서 얻었기에, 나는 이 영화가 겉으로는 페미니즘을 표방하면서도 여성의 성을 눈요깃거리를 위해 이용하는 그런 종류의 흔해빠진 영화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3. 닭고기 내장을 빼는 법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젊은 수는 점점 규칙을 깨고 약속을 어긴다. 그녀에게 골수를 뽑히며 착취당하는 입장이 된 늙은 리즈는 분노를 풀 방법을 찾다가 요리라는 수단을 찾아내는데, 그 시발점은 바로 자신을 내친 TV쇼 대표가 던져준 프랑스 요리책이다. 각종 기기괴괴한 고기 요리가 가득한 책을 펼쳐놓은 리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녀처럼 깔깔 웃으며(자고로 늙고 미친 마녀는 사회가 나이든 여자를 조롱하고 때론 두려워하며 소비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던가) 육류를 손질한다. 그녀 앞에는 스튜디오에서 환히 웃는 젊은 수의 모습이 상영되는 TV가 있다.

카메라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며 스스로 맛있는 요리가 되기로 선택한 젊은 여자와, 그 여자에게 골수까지 뽑아 먹히며 뒷방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늙은 여자가 교차된다. 자본주의는 전자를 환영하며 후자를 배척한다. 그러나 후자가 손질하는 바로 그 고기로 만든 요리는 첫 장면에서 TV쇼 대표가 쩝쩝거리며 먹어치우는 신선한 새우처럼 기꺼이 받아들여져 환영받는 상품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요리를 만드는 것은 리즈고, 요리가 된 것은 수이며, 둘은 한 인물이다.

물론 요리를 먹는 것은 남자들, 특히 기득권 백인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단호하게 못 박아놓는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리즈는 자신이 요리로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자 금지된 기술을 빌리면서까지 스스로 요리사가 되어 '수'라는 새롭고 신선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서브스턴스는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건만 그 기술을 소유한 그녀가 열망한 것은 세계 정복도, 사회 개혁도, 세상을 바꿀 위대한 연구도, 하다 못해 이전 삶의 전복도 아니었다. 고작 분홍빛 살을 가진 탱탱한 새우 요리가 되어 자신을 툇 뱉어버린 남자의 입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는 거였다. 슬프게도 끝까지 그녀의 야망은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의 몸을 사방에서 관음하고 있는 스튜디오 - 말이 좋아 스튜디오이지 사실은 골방인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도 진심으로 상품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남자들이 착취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착취 구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자신을 착취하고, 그럼으로써 나도 모르게 다른 여자들까지 착취하며 남성중심적인 시선과 사고방식이 가득한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4. 미소 짓는 여자, 이빨 없는 미소

천박하고 폭력적인 백인 남성으로 그려지는 TV쇼 대표 앞에서 젊은 수는 계속해서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면서 환한 미소를 짓는다. 늙은 리즈가 영화 속에서 거의 웃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녀에게 웃음은 감정 표현이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서 수의 모든 웃음은 그녀가 몸을 노출하고 화장을 하는 것과 다름없이 자신을 벗기고 꾸며서 타자의 시선에 끼워 맞추는 액세서리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웃음을 잃어버린 그녀는 진실한 감정도 함께 잃어버린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구나" 라는 동창의 말을 떠올리며 리즈가 살며시 지었던 미소, 그 미소를 짓게 만든 감정을 둘로 갈라진 수는 영영 잃고 만 것이다.

미소를 도구로 만든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이전의 자신 - 놀랍게도 아직까지 공포, 분노, 두려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늙고 추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끓어버리는 일이다. 그 일은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것만큼이나 끔찍하고 역겨운 과정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살인 과정은 매우 길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친구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리고 앞에 앉은 한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을 나가버렸을 만큼 잔인한 방식으로 수는 리즈를 죽인다.

그러나 수의 아름다운 미소는 모든 미소가 그렇듯 영원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그렇기는커녕 끝은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영화 후반부에서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수에게서 처음으로 사라진 것은 바로 그녀의 그 자본주의 미소다. 치아가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도 그녀의 미소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고작해야 이빨 하나 빠졌다고 사라지는 아름다움이라니, 이 얼마나 무상한 것이란 말인가. 나약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깨트리고 몸을 으깨는 고통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얻은 것이 이빨 하나 빠지면 무너져 내리는 미소라니. 그녀의 미소는 그녀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모든 아름다움의 결정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울 만큼 헛되고 허망한 신기루다.

5. 하나가 된 엘리자베-수

영화 속에서 내내 분리된 채 서로 치고받고 싸워대던 엘리자베스와 수는 후반부에서 하나가 된다. 이 말은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늙음과 젊음이 혼합되고, 성적 기관과 아닌 기관이 뒤섞이고, 상품과 인간이 뒤엉키며, 마침내 미와 추가 융합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탄생한 카오스적 존재가 바로 엘리자-수다. 탱탱한 가슴과 하얀 치아를 쫓아온 여행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모든 부위가 제자리를 벗어난 괴물이었던 것이다.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쩐지 이 괴물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반대편 끝에 있게 되었음에도 엘리자-수는 아주 느긋하고 심지어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다. 반짝이는 귀걸이를 꺼내 머리인지 배인지 모를 곳에 착용하고, 고데기를 꺼내 몇 가닥 없는 머리를 손질하는 그녀의 손짓에는 한 조각의 조급함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 이미 아름다움을 얻어 자신에게 만족하는 자의 태도다.

그렇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결핍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이미 합일을 이루어 완전한 존재가 되었으므로. 리즈이자 수였던 그 존재는 이제 완벽해졌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육체에 대한 영화이기에 감독은 리즈와 수를 <육체적으로> 합쳐놓았다. 그 모습이 비록 세상의 기준에서는 괴물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아니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분리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엘리자-수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럽마이셀프, 이너피스 하게 되었는데 그런 썩은 표정으로 보기 있깁니까? 어리석은 대중들 같으니. 역시 세상 사람들은 겉모습밖에 볼 줄 모른다. 내면의 평화와 마음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든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류 최상의 미덕인 것을. 거울을 보는 엘리자-수의 눈에는 분명 하나가 되어 온전하게 아름다워진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엘리자-수가 거실에 걸린 사진에서 젊은 리즈의 얼굴을 오려내 가면을 만드는 것은 추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위는 일종의 선언에 가깝다. 내가 원하고 여러분이 원하는 그 이상적인 여성상, 살이 찌지도 이가 빠지지도 얼굴이 구겨지지도 가슴이 늘어지지도 않는 완벽한 여성상에 드디어 도달했다는 선포. 내가 바로 사진 속 리즈라는 선포. 그런 그녀를 화려한 조명과 음악이 감싼다. 이때 흘러나오는 것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바로 그 음악이다. 침팬지가 인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이 이 영화에서는 합일을 이뤄 당당한 존재가 된 엘리자-수의 스크린 데뷔 음악으로 쓰이는 것이다.

당당한 브금과 함께 무대에 오른 그녀는 좌중의 관심 속에서 뭔가를 '탄생'시킨다. 아, 정말이지 사람들은 여성의 육체만큼이나 여성의 생산성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녀는 무대 위에서 탄생 쇼를 보여준다. 여러분이 그토록 사랑하는 가슴이 탄생하는 쇼를. 어머니의 포근한 젖가슴과 소녀의 하얀 젖무덤 어쩌고 저쩌고의 바로 그 가슴을! 그녀는 낳는다. 가슴이 바닥에 철퍼덕 떨어진다. 물론 가슴은 원래 철퍼덕 떨어지는 부위가 아니다. 가슴은 코나 입술이나 팔다리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갈비뼈 위에 얌전하게 두 쪽 다 달려있어야 한다. 가슴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바닥에 있건 몸 위에 있건 환영받아야 하지 않나 싶지만, 사람들은 상상력이 빈약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하여간 스튜디오에 앉은 관객들이 가슴을 낳은 엘리자-수의 존재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소리를 꽥꽥 질러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그렇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쇼가 시작된다.

6. 피칠갑을 한 워터밤 쇼

자본주의는 무시무시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착취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몸을 착취한다. 그리고 쇼 비즈니스 산업은 그런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알았을 것이다. 이 산업에 대한 분노와 비판을 힘껏 담아 만든 영화조차도 많은 남자와 여자들에 의해 상업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말 것임을. '수' 역할을 맡은 젊은 여성은 이 영화에서의 노출로 스타 배우가 될 것임을(사실 마가렛 퀄리는 원래도 스타였고 심지어 나는 <조용한 희망>을 세 번이나 봤는데 누군지 못알아봤음 이 정도면 안면인식장애 아닐까🙄). 애초에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종사하는 그 누구도 쇼 비지니스 산업에서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님을. 자본주의는 비판과 대안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흡수해 버린다는 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할 만큼 무서운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서 완전체가 된 엘리자베-수는 온 세상에 피를 퍼붓는다. 피칠갑이 된 스튜디오. 피로 샤워를 하는 남자들. 피로 샤워를 하는 여자들, 피로 샤워를 하는 댄서들, 피를 뒤집어쓴 장비들, 의자, 카펫, 바닥, 천장. 제아무리 고어 영화라도 어린이는 잘 안 건드리는데 이 영화에서는 심지어 어린이한테까지도 피칠갑을 한다. 너도 조만간 이 산업의 미래가 될 존재이니 옛다 피벼락이나 받아라 이건가(감독님 무사와요ㅠㅠ). 쇼 비즈니스 산업과 그것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 스튜디오 바닥을 뒹구는 먼지 한 톨마저도 창작자가 얼마나 처절하게 증오하며 깊이 분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 공고한 벽에 실금이라도 내고 싶어 쇠망치를 들고 덤벼 봐도, 젤리처럼 꿀렁거리며(그러고 보니 한 철학자는 현대를 '유동하는 공포'의 시대라고 하였더랬다) 망치질의 충격마저 흡수시켜 끝 모르게 몸집을 키우는 자본주의를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우리 어리석은 여자들은(리즈와 수가 ㅈㄴ 멍청하다는 건 영화 속에서 이미 충분히 묘사됐다) 쇼 비즈니스가 구석구석 스며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거죠? 자신을 사랑하라는 공허한 문구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무장을 할 수 없다. 오히려 럽마셀은 <너의 젊고 아름다운 외형을 가꾸고 또 가꿔라. 그게 사랑이다>라는 왜곡된 메시지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이게 뭔 소린가 싶으면 걸그룹 트리플에스의 걸스 캐피탈리즘이라는 곡을 들어보세요.

그래서 감독은 외친다. 에라 모르겠다, 균열조차 낼 수 없는 게 자본주의라면 분노의 힘으로 우리 육체에 존재하는 따뜻한 생명의 물, 피를 흩뿌리며 모두 함께 신나는 워터밤이나 즐깁시다. 착취자들의 얼굴에 피벼락이나 끼얹어 줍시다. 그 한순간의 워터밤, 스튜디오를 쓰나미처럼 쓸고 갈 한바탕 쇼를 위해서 엘리자-수는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내어준다. 예수와 부처와 각종 성인과 보살 등등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진 인간들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하였듯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쇼 비즈니스의 화신(embodiment, 化身)이 되었고 그토록 갈망하던 화려한 주목 속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예수부처 기타 등등처럼 득도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끝까지 어리석고 끝까지 욕망 덩어리다.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그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게 그녀의 운명이다. 몸만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는 몸에 대한 영화이고 그녀는 가진 거라곤 육체밖에 없는 인간이니. 화신이라는 건 몸이 된다는 뜻이다. 가진 거라곤 몸밖에 없어서 그녀는 몸을 내줬다. 그녀가 알던 세계의 전부였던 자들, 그러니까 스튜디오에 앉아 있던 관객들을 위해서.

그녀의 희생을 기억하라. 여러분이 그토록 좋아하는 <완전한 육체>를 얻은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내던져 그날의 쇼를 완성시켰는지를 기억하라. 쇼 비즈니스 산업의 태동기부터 '은막의 스타'라는 이름 아래 기꺼이 기름진 요리가 되어 화면 너머 관객들의 눈요기(눈으로 먹는 음식)가 되었던 수많은 '그녀'를 기억하라.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여자. 엘리자베스, 수, 그리고 엘리자-수.

그녀를 기억하라,
그녀들을 기억하라.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명예의 전당 기념비는 쇼 비즈니스의 화신으로 장렬하게 산화한 그녀를 기억하라는 감독의 메시지다.

+별점 반 개 뺀 이유: 중간에 길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넘 길고 괴로운 영화였다 근데 제대로 해석하려면 아무래도 한 번 더 봐야겠다(하지만 그 고통을 또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므로 다신 안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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