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영화의 주요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판 1 : 수다쟁이 빌런 디멘투스로 인해 흐릿해져 버린 퓨리오사의 서사

입 터는 게 얼마나 짜증났으면 혀를 잘라쓰까

 
<퓨리오사> 촬영 기념품으로 무엇을 가져갔냐는 질문을 받은 안야 테일러 조이

안야 테일러 조이: 저는 퓨리오사의 기계 팔을 집에 가져갔어요. 하지만 사실 정말로 원하는 기념품은 따로 있었죠. 밀러 감독님은 제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영화에 넣을 씬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저를 위해서 그 장면(퓨리오사가 디멘투스의 혀를 자르는 장면)을 찍어주셨고, 소품팀은 기념품을 집에 가져갈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게 뭐냐면, 바로 크리스의 혀예요.

인터뷰어: (경악)

안야 테일러 조이: 맞아요. 저는 크리스 헴스워스의 가짜 혀를 상자에 담아서 집에 가져갔어요.(웃음) 밀러 감독님은 저한테 "안야!" 라고 말씀하시더니,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인터뷰어: 그거 알아요? 이 일 하면서 촬영 기념품으로 집에 뭘 가져갔냐는 질문을 여러 번 해봤는데, 당신 대답이 제일 충격적이에요.

안야 테일러 조이: 정말 미안해요. 

인터뷰어: 대체 뭐에 대해서 사과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할 말을 잃었어요.

안야 테일러 조이: 그때는 그게 멋있어 보였어요!

 
조지 밀러 감독은 평소 좋은 영화란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드러내 왔다. 제작자의 취향을 반영하듯 매드맥스 월드의 주요 인물들은 말수가 적다. 샤를리즈 테론의 퓨리오사도, 안야 테일러 조이의 퓨리오사도 과묵하다. 멜 깁슨의 맥스도, 톰 하디의 맥스도 과묵하다. 심지어 후반부 시리즈의 주요 악역인 임모탄 조마저도 어느 정도 과묵함이라는 조지 밀러 감독의 미덕을 지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높은 톤으로 현학적인 대사를 끊임없이 내뱉는 디멘투스는 영화 내에서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고려하지 않아도 밀러 감독의 관점에서는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디멘투스의 어투는 현대식 호주 영어가 아니라 70~80년대 호주에서 사용하던 사투리, 특히 경마 해설자가 사용하던 말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헴스워스는 디멘투스의 어조를 만들어낼 때 자신의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오래된 호주식 말투를 많이 참고했다. 헴스워스의 할아버지 사투리 열전)
 

다들 헴식이만 좋아하고 우리 잭은 아무도 안 챙겨줘

 
다리 사이에 곰인형을 소중하게 매달고 다니는 거구의 악당 디멘투스는 매력적인 빌런이다.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호주 출신 할리우드 스타가 그를 연기했다는 점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만든 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할 중요한 요소였다. <퓨리오사> 포스터에서도 디멘투스와 그녀의 관계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디멘투스라는 악당 캐릭터 자체의 매력을 잠깐 옆으로 치워놓고 원론적인 질문을 한 번 던져 보자. 과연 그는 <퓨리오사>에 반드시 등장했어야 하는 인물일까?


<분노의 도로>가 개봉된 직후 샤를리즈 테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도 임모탄 조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로 한 거죠.” 테론의 말처럼 초기 설정에 따르면 퓨리오사는 원래 임모탄 조의 아내들 중 하나였지만 불임 때문에 밀려난 뒤로 궂은일을 하며 살다가 사령관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팔 역시 시타델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절단되었다는 설정이었다.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의 엔딩이 정확하게 <분노의 도로>와 이어진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며, 자신이 영화를 만들 때 두 영화가 마치 한 편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한다. 그런데 감독의 의도대로 퓨리오사와 분노의 도로를 이어서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체 임모탄 조가 퓨리오사에게 뭘 잘못한 거지?’ 

 
물론 임모탄 조가 빌런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노의 도로>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는 자들에게서 탈주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다. 인간을 상품화해 사용하는 권력자 집단의 중심에는 임모탄 조가 있다.


임모탄 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없더라도 퓨리오사에게는 아내들을 데리고 시타델을 탈출할 만한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일단 아내들 자신이 임모탄 조의 소유물로 사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굳이 죽일 만큼 깊은 원한과 증오심을 가질 이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녀를 녹색의 땅에서 납치한 것도, 그녀의 어머니를 추격 3일 만에 죽게 만든 것도, 스승이자 동료였던 잭을 죽게 만든 것도, 심지어 그녀의 팔을 잘리게 만든 것도 모두 임모탄 조가 아닌 디멘투스의 짓이니까 말이다.

 
<분노의 도로>에서 시종일관 과묵한 퓨리오사가 영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임모탄 조를 죽이기 직전에 던지는 임팩트 넘치는 대사, “나를 기억하나?”는 디멘투스의 등장으로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원수는 임모탄 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임모탄 조는 원수에게서 그녀를 구해줬으며, 40일 전투를 통해 디멘투스 일당을 모두 소탕하며 이이제이 형식으로나마 복수에 도움을 주었던 존재다.
 

모딴이는 억울행

임모탄 조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퓨리오사의 탈주는 자신이 가장 인정하고 믿고 있던 존재가 자신의 보물인 아내들을 훔쳐서 달아난 꼴이다. 물론 말이 좋아 아내나 보물이지 사실상 성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인 데다, 결정적으로 그의 '보물'들은 보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퓨리오사의 대사가 가진 날카로운 울림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임모탄 조와 그녀 사이에 얽힌 보다 복잡하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인 사연이 필요했다.

 
화려한 액션 연출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밀러 감독이 이런 중요한 서사적 맥락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건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특히 "리멤버 미?" 가 퓨리오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중요한 대사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녀의 과거를 조망하기 위해 나온 프리퀄 영화에서는 퓨리오사가 이 대사를 내뱉기까지의 사연을 훨씬 무겁고 신중하게 다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판 2 :  묵시록의 검은 천사...뭐라고?

 
그 외에도 이 영화의 허술한 부분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극 중에서 임모탄 조의 아들이자 소아성애자임이 암시되는 릭투스의 검은 손을 피해 도망쳐 나온 어린 퓨리오사를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적들의 코앞에서 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어딘가 말이 되지 않게 느껴진다. <퓨리오사>를 보는 사람들이 이런 설정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영화가 왜 이렇게 허술하냐고 지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의 수많은 허술함은 이 영화가 ‘SAGA’ 즉 서사시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조지 밀러 감독은 <오뒷세이아>나 <일리아드> 같은 고대 영웅 서사가 그렇듯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을 다룬 이야기에서도 여러 가지 의문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신비로운 상태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퓨리오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주변 인물들은 그녀가 여자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디멘투스에게서 데리고 온 어린 소녀라는 걸 알았을까 등등.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가 디멘투스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조차 감독은 화면을 통해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애매하게 처리한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를 즉결 처형했을까? 아니면 디멘투스가 잭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사슬에 매어놓고 죽을 때까지 황무지를 끌고 다녔을까? 또는 디멘투스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형틀에 매달아서 원없이 고문했을까? 전부 다 아니라면, 역사가의 마지막 나레이션처럼 시타델 바위산 위 어느 깊은 곳에는 퓨리오사가 살아 있는 디멘투스를 양분 삼아 심어놓은 복숭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은 끝까지 진실을 알 수 없다. '전설'이란 바로 그런 거니까 말이다.

 
물론 역사가가 이렇게 말하기는 한다.

 
"나는 퓨리오사 자신에게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조차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진다. '자신만이 영웅 퓨리오사의 진실을 알고 있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역사가의 나레이션은 마치 리라를 연주하며 영웅 설화를 읊는 후대의 구전 문학가가 자신은 영웅 본인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으며, 따라서 이 전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자신뿐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듯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퓨리오사>의 이야기 진행 방식은 그다지 친절하지도 디테일하지도 않다. 많은 생략과 모호한 여지를 남기는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을 어색하게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연출에는 고대 그리스 대서사시 못지않는 ‘퓨리오사의 황무지 대서사시’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듬뿍 담겨 있다. 의도된 연출은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적어도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정말 거슬렸던 것은 허술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영화의 몇몇 대사였다. 전쟁에서 패해 도주하는 디멘투스를 직접 잡으러 가는 퓨리오사를 보며 임모탄 조의 막내아들인 스카브로스가 "저건 대체 뭐지?"라고 질문하자 역사가가 이렇게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검은 천사, 묵시록의 다섯 번째 기사."

 
도대체 이 대사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애써 찾아보지도 않았지만, 만약 이 말의 의미를 반드시 찾아봐야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의미 전달에 실패한 대사다. 게다가 영화의 맥락상으로도 이 대사는 그것을 말하는 인물부터 말하는 투까지 모두가 이상하다.

 
이야기 진행상 퓨리오사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관객인 우리보다도 더 드문드문 상황을 지켜보았을 뿐인 늙은 역사가가 어떻게 그 순간 그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그놈의 다크 엔젤이라는 게 그녀의 본질이 맞긴 하다면) 그런 멋들어진 대사를 사실 중이병 대사를 날릴 수 있었을까? 그는 무당도 마법사도 초능력자도 아닌, 그저 사라진 세계의 지식을 뇌의 회백질과 피부 껍데기 위에 간직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언어에 힘을 실어 주는 무력한 인물에 불과한데 말이다.

 
두 번째이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주범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결정적인 대사는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네가 과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이 대사의 위화감은 황무지 세계가 사실 전부 조지 밀러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몰라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매드 맥스>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에게 밀러 감독이 설파하는 ‘이야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이야말로 이 시리즈가 그 자체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라는 증거다.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며, 자신도 실재하는 존재라고 굳게 믿는 채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적어도 조지 밀러는 디멘투스가 문제의 대사를 내뱉기 전까지는 그렇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위의 대사를 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라는 장편 영화의 한 장면이고 더 나아가 오십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매드 맥스>라는 시리즈물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원치 않게 의식하게 된다. 말 그대로 이야기 속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 속 인물들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마무리. 아무튼, 그럼에도 '조지 밀러'

톰 하디가 닉값(hardy)하며 인간 단호박이 되는 장면은 9:50부터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분노의 도로>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 칸 영화제 기자 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주인공인 톰 하디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자: 톰 하디, 제게는 다섯 명의 여자 형제와 아내와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계시죠. 세상에 엄마 없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저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outgun by estrogen)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매드 맥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영화에 왜 이렇게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나요? 저는 이 영화가 남자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톰 하디: 아뇨. (청중 웃음) 조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식셀 여사님 '3000년의 기다림' 주인공 닮으심(서사 하나 뚝딱)

 
좌중을 웅성거리게 만든 이 질문은 무례했을뿐더러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작업 과정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간담회 자리에는 퓨리오사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뿐만이 아니라 <분노의 도로>의 편집자이자 후에 <퓨리오사>를 작업하게 되는 인물이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조지 밀러의 아내이자 <분노의 도로>로 아카데미 편집상을 받은 마거렛 식셀이다.
조지 밀러 감독이 한 번도 액션 영화를 편집해 보지 않은 식셀에게 '<분노의 도로>는 다른 액션 영화와 다르다'라고 말하며 편집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영화 편집 작업에 대한 그녀의 애정 어린 인터뷰를 추가로 보고 싶다면 다음 링크 참조)

 
"세상에는 여성이 액션 영화를 편집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스타워즈를 보고 자란 여자아이들로 인해,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바뀌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기조는 변할 거고, 사실은 이미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가렛 식셀, 오스카상 수상 인터뷰에서

 
<퓨리오사>가 개봉했을 때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여성주의 계열의 비판이 눈에 띄었다. 여성이 주인공인 건 좋지만 이 영화에서 퓨리오사는 남성에게 지나치게 종속적인 모습이다. 퓨리오사는 대체 왜 머리를 자르지 않는 걸까. 왜 그녀는 '보다 중성적'이고 '덜 여성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걸까.

 
정작 조지 밀러 자신은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가 페미니즘 영화냐는 질문에 대해 특별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한결같다. 위에서 소개한 <분노의 도로> 칸 영화제  기자 간담회에서 사회자가 '<분노의 도로>를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 있나'하고 질문하자 조지 밀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부터 페미니즘 사상을 담은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매드 맥스> 시리즈와 비교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을 더욱 확장시키고 싶었는데, 여기서 추격당하는 건 단순히 어떤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아내가 그렇게 나타났죠. 그들에게는 함께 싸워줄 전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한 남자로부터 아내들을 탈출시키는 인물이 다른 남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퓨리오사라는 인물을 만들었죠.  모든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발전해 나갔던 겁니다.

 
한편 맥스라는 인물은 떠돌이 들개 같은 인물입니다. 덫에 걸린 채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야생동물 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퓨리오사와 맥스를 붙여 놓으면 처음에는 서로를 죽이려고 들 겁니다. 그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존중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분노의 도로>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의 뼈대를 올려놓으면 이런 이야기가 전부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거죠."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여성 서사로 느껴지고, 누군가에게는 모자란 여성 서사로 느껴질 수도 있는 <퓨리오사>는 분명 부족한 점이 많은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영화가 끝내준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어째서 끝내주는지 길게 썼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작품의 가장 끝내주는 점은 이런 이야기에 절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데 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도 그것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허공에 대고 외치는 의미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본질은 카체이싱 액션 영화. 1945년생 조지 밀러 감독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자동차 액션 장르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지치지도 않고 한 가지 이야기를 끈질기게 늘어놓는다. 차가운 기계의 세계에서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과 우정과 연민과 연대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죽음의 씨앗과 생명의 씨앗

 

매드맥스의 세계에는 두 종류의 씨앗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심는 씨앗인 '총알'이다. 총알이라는 두 번째 씨앗의 존재가 극 중에서 드러나는 건 <분노의 도로>에서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 중 하나인 '치도'가 아내들의 리더였던 '스플렌디드'의 말을 인용하면서다.
 

"스플랜디드는 총알이 죽음의 씨앗이라고 했어. 씨앗 하나를 심을 때마다 누군가를 죽이는 거지."

 
조지 밀러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매드 맥스의 세계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두려운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모든 것이 붕괴한 세계"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매드맥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겉으로는 사막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막(Desert)'이 아닌 '황무지(Wasetland)'라고 불리는 공간이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래 사막이 아니라 한때 문명이 존재했다 사라져 황폐해진 땅 말이다.

 
이 황무지에서 총알이 씨앗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들은 영화 곳곳에 존재한다. 먼저 '무기 농장(Bullet farm)'이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이 농장의 생산품은 채소와 곡물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총알이다. 무기 농장에서 생산된 총알을 전투 트럭에 싣는 방식 역시 오늘날 대형 농장에서 밀이나 옥수수 같은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렇게 생산된 수천 수만 개의 '죽음의 씨앗'들은 스플렌디드의 말처럼 살아있는 존재의 피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생명을 빼앗는다. 흙 속에 심은 씨앗이 생명 하나를 탄생시키듯이 말이다. 모든 과정이 반대일 뿐이다.

 
한편 <퓨리오사>에서 퓨리오사는 어린 시절 고향 땅에서 가져온 단 하나의 유산인 복숭아 씨앗을 머리카락과 입속에 감춰놓고 자신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그 씨앗을 보여준다.


<분노의 도로>에서 살아남은 부발리니 일족의 여인 역시 오염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향 땅에서 채종한 마지막 씨앗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언젠가 이 씨앗을 다시 땅에 심을 순간을 꿈꾼다. 즉
매드 맥스의 세계에서 인간은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생명의 씨앗을 심는 사람과 죽음의 씨앗을 심는 사람으로.


2. '매드 월드'의 또 다른 의미


 
총알이 씨앗의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매드 맥스의 황무지 곳곳에서는 생명이 비생명의 자리를 대신하고 삶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죽음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이 모두 사라져 살아있는 인간의 피부를 책 대용으로 도구화해 사용한다. 어린 소년들은 워보이라 불리며 총보다 더 손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전쟁터 소모품 취급을 받는다. <분노의 도로>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맥스는 철저하게 도구화되어 전쟁 무기인 워보이를 위한 '피 주머니' 취급을 당하는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이 세계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추구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는 임모탄 조가 만들어낸 카고 컬트적 종교다. 황무지 이전 세계에서도 종교는 제도와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만 적어도 신 그 자체만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무지에서는 숭배와 동경의 대상인 신의 자리마저 V8이라는 자동차 엔진으로 대체된 상태다.


차가운 금속의 모습을 한 새로운 신을 섬기는 자들의 목표도 영생이나 부유한 삶 따위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다. 이 종교의 숭배자들은 하루빨리 죽어서 '발할라'라는 전사들의 왕국으로 가고 싶어 한다.

 
이런 세계에서 생명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생명은 이미 방사능과 각종 화학 물질에 오염되어 워보이처럼 '반쪽자리 삶(half-life, 방사능의 반감기라는 말을 이용한 말장난)'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임모탄 조의 세 아들이다. 머리는 뛰어나나 몸이 자라지 않은 첫째 아들, 체격은 건장하나 폐와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 잔혹성을 조절하지 못하는 광인인 셋째 아들.


세 아들 중 두 아들에게는 남성의 성기를 조롱하는 비속어가 이름으로 붙여져 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대지를 뜻하고 남성이 씨앗을 뜻한다면 임모탄 조의 '오염된' 아들들은 생명을 생산하는 능력을 상실해 태생부터 죽어버린 씨앗인 셈이다.


이처럼 매드맥스의 '미친' 세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죽음이 생명의 자리를 대신한 세계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에서 다양한 상징을 통해 수차례 암시되었던 이 뒤집어진 세계의 본질은 <퓨리오사>의 후반부에서 마침내 빌런인 디멘투스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디멘투스는 말한다. 퓨리오사와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며, 캄캄한 슬픔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리고 이 말은 <매드 맥스 2>의 초반부에 흘러나오는 맥스에 대한 내레이션인 "엔진의 으르렁거림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되었다. 잿더미만 남아서 황폐해진 인간이, 과거의 악령들에게 쫓기며 황무지를 떠도는 인간이 되었다."는 대사와 연결된다.


3. 중력에 굴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맥스와 디멘투스, 퓨리오사는 모두 같은 시작점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이 살아온 익숙한 세계를 강제로 상실함과 동시에 소중히 여겼던 존재들을 영영 잃어버렸다. 그들은 상실된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환과 후회에 쫓기며 길을 잃은 아이와도 같은 모습으로 황무지를 방황한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두 가지 길이 있다. 히어로의 길과 빌런의 길. 매드 맥스 월드에서 이 말은 '생명의 씨앗을 심는 자가 될 것인가, 죽음의 씨앗을 심는 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죽은 자
모두에게서 도망 다니고 있다.

약탈자들에게 쫓기고,
내가 구하지 못한 자들의
망령에 시달린다.


-맥스 로카탄스키, <분노의 도로>-


 
<분노의 도로>의 시작점에서 맥스는 자신을 쫓아오는 과거의 망령에게 끊임없이 시달린다. 삶의 의미를 잃고 과거의 잔상에 시달리며 황무지를 떠도는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디멘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다만 맥스는 구체적인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한편, 디멘투스가 잃어버린 가족들을 회상하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디멘투스라는 이름도 '기억상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맥스는 얼마든지 디멘투스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급의 괴력과 생존력을 가진 그가 약탈과 살인을 업으로 삼거나 자신의 일당을 모아 지배자로 군림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실행에 옮기는 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맥스가 어째서 디멘투스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글의 말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퓨리오사 역시 얼마든지 복수심에 비뚤어져 빌런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녀를 죽음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는 <퓨리오사> 영화 곳곳에 나타난다. 영화 속에서 퓨리오사는 두 차례에 걸쳐 시타델의 지하 세계와 연결된 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곳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을 번뜩이는 노파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노파는 말한다. "가지 마, 너는 이곳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어." 노파의 말처럼 구덩이 속에는 마침내 평안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널브러진 채 썩어 가는 자신의 살로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키운다. 그 구더기는 시타델 사람들의 영양 공급원이 된다. 그러니까 이곳은 죽음의 부산물로 산 자를 먹이는 황무지의 농장인 것이다.


시타델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구더기 농장을 지키는 노파는 마치 지옥의 문지기와도 같은 모습으로 퓨리오사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라고. 여기서 노파의 손짓은 단순히 구더기의 먹이가 되라는 유혹이 아니라 퓨리오사가 산 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모든 괴로움과 복수심과 원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디멘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캄캄한 슬픔에 굴복해 무감각한 존재가 되라는 유혹이기도 하다.


이 장면이 특히 의미심장한 이유는 퓨리오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력을 거슬러 시타델이라는 고층 도시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공간적 배경인 시타델을 중력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과거 권력자들이 높은 성체를 지어 그 안에 거주했던 건 그 자체로 권력이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오늘날에도 고층 건물에 산다는 건 부와 권력을 의미한다. 물론 달동네처럼 두 발로 힘들게 걸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힘으로 손쉽게 올라가는 고층이어야 하겠지만. 그러니까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퓨리오사의 시도는 이 세계의 권력을 탈환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내에서 중력을 거스르려는 퓨리오사의 시도는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어린 퓨리오사는 자신을 지하 세계로 끌어내려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려는 중력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지상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녀는 탈출을 꿈꾸지만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갈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퓨리오사의 목표는 중력과 동행하며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수평적 탈출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세 번째 단계에서 마침내 중력에 저항해 시타델이라는 고층 도시를 탈환하는 수직적 이동을 시도한다.


물론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 치하의 시타델에서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가졌기에 이미 고층 세계에 자신의 자리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궁극적인 꿈은 지상 사람들에게 고층의 권력자들이 소유한 재화를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퓨리오사는 '독재자'인 임모탄 조보다는 '대중 선동가'인 디멘투스에 가까운 지도자다. 따라서 디멘투스가 퓨리오사를 후계자로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화 <퓨리오사>에서 디멘투스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화려한 언변으로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니지만 결국은 지도자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인 사회 질서와 치안 유지에 실패하는 인물이다. 이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시타델을 민중에게 되돌려 준 퓨리오사가 어떤 식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물자를 분배하며 질서를 유지해 나갈지 궁금해질 것이다. 일단 그녀는 아주아주 과묵하므로 디멘투스와는 확실히 다르겠지만..


4. 도달 불가능점에 도달하려는 어린 영웅의 실패담 - 퓨리오사의 이야기

 
퓨리오사, 그녀는 머리카락에 씨앗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녀는 태생부터 죽음의 씨앗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지키는 존재였다. 퓨리오사의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그녀에게 '녹색의 땅을 찾아서 그곳에다 이 씨앗을 심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오랫동안 퓨리오사의 머릿속에서 녹색의 땅은 오로지 고향 땅만을 의미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고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기에, 퓨리오사는 더더욱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지 밀러 감독은 그 어떤 절박한 시도라도 결국은 실패하게 될 거라는 것을 못 박아 둔 채로 퓨리오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감독은 그녀의 고향인 '녹색의 땅'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퓨리오사는 모르지만 <퓨리오사>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쳅터 제목을 통해서 그 이름이 무엇인지 이미 전해들었다. 그건 바로 '도달 불가능점'이다.

 
도달 불가능점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퓨리오사는 도달 불가능점인 자신의 '이상'과 황무지의 모습을 한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퓨리오사> 영화 내내 그녀는 타협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있는 디멘투스를 양분으로 삼아 시타델의 바위틈에 복숭아 씨앗을 심어 기르는 장면은 마침내 그녀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점을 발견해 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분노의 도로>에서 그녀가 고향 땅이라는 이상 속 유토피아를 포기하고 시타델이라는 현실 속 '녹색의 땅'으로 돌아와 그곳의 리더가 되리라는 결말을 미리 예고하기도 한다.

 
퓨리오사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침내 긴 머리를 자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퓨리오사를 연기한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는 긴 머리카락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퓨리오사의 희망을 상징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처럼 식물의 줄기를 닮은 그녀의 긴 머리가 이상 속 세계인 '녹색의 땅'을 의미하는 상징이라면 그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리는 것은 퓨리오사가 마침내 이상 속 세계를 포기하고 황무지라는 현실에 뿌리내린 인물이 되기로 결심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는 희망을 포기한 것일까?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내뱉었던 것처럼, 황무지에 희망 따위는 없는 것일까? 디멘투스는 모든 존재의 모든 희망을 어떻게든 부정하는 인물이다. 퓨리오사가 '나를 기억하느냐'라고 물으며 두건을 벗고 그를 응징하는 순간조차 디멘투스는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한 동력은 희망이 아니라 증오였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결국 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존재라고 퓨리오사를 조롱한다.


퓨리오사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모래에 뒤덮인 얼굴 위로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만, 그녀가 결국 증오에 미친 복수의 화신이 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만의 희망을 가슴속에서 꺼트리지 않고 유지해 나갔는지 여부를 <퓨리오사> 영화만으로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디멘투스를 처치한 그녀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황무지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수년이 지난 뒤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가 맥스와 나누는 짧은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아내들을 가리키며) 저 여자들은?"
"그들은 희망을 찾는 거야."
"너는 무엇을 찾고 있지?"
"Redemption."

 
'Redemption'이라는 단어에는 '되찾음'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퓨리오사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한참 전 <분노의 도로>가 개봉했을 때 한국어 자막을 만든 번역가는 이 단어를 '구원'이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때는 이 해석이 나름대로 타당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퓨리오사>가 개봉되면서 사실 이 단어의 진짜 의미는 '구원'보다 '되찾음'에 가까운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외에도 이 번역가는 영화 마지막 장면의 'The First History Man'을 '최초의 인류'라고 해석했는데, 적어도 재개봉된 <분노의 도로>에서는 '최초의 역사가'라는 올바른 의미로 자막을 고쳐서 내보냈어야 했다. 덕후는 이런 게 굉장히 신경쓰인다구여◔_◔)

 
그러니까 나에게서 빼앗아간 것들을 되돌려 놓으라고 디멘투스를 향해 고통스럽게 절규하던 안야 테일러 조이의 어린 퓨리오사는 샤를리즈 테론의 성숙한 퓨리오사가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를 바라며 분노의 도로를 여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무언가'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자, 사랑했던 존재들이자, 넓은 의미에서는 그녀가 대표하는 성별인 여성들이 잃어버린 생명이 넘치던 황무지 이전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분명 이 시점까지도 퓨리오사는 여전히 '도달 불가능점'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자신이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장소를 사실은 이미 지나쳐 왔음을 알아차린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진실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한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 왔던 이상 속 유토피아는 이미 오래전에 모래에 파묻혀 황무지, 즉 현실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토피아의 진짜 뜻은 사실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은 결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퓨리오사는 '무언가'를 되찾을 수 없다. 그녀의 마음 속 가장 어두운 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 진실은 강인한 그녀를 주저앉아 울부짖게 만들 만큼 거칠고 잔인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인간이 어른이 되기 위해 일생에서 한 번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5. 망가진 세계를 가로지르는 분노의 도로, 그 주인은 누구인가

 

그래서, 누가 세상을 망쳤지?

- 스플렌디드 앙하라드, <분노의 도로>-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주요 빌런인 임모탄 조는 엄밀하게 봤을 때 세상을 망가트린 주범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야기는 알레고리(allegory)다"라는 신념을 가진 조지 밀러 감독이 창조해 낸 캐릭터답게 그는 세상을 망친 자들의 여러 특징을 한데 모아놓은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일단 그는 군인 대령 출신으로, 이전 세계의 질서가 모두 무너진 새로운 세계에서도 약한 자들을 모아 그들의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기를 원하는 존재다. 이는 이전 사회에서 경찰이었던 맥스가 자신이 지킬 것이 전부 사라져 버린 황무지 세계에 절망한 나머지 '미친 맥스'가 되어 방랑하기를 자처하거나, 군인이었던 근위대장 잭의 부모가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도 대의를 갈망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군인과 경찰이라는 직업군에게 사회를 '지배'하고 '보호'한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면 맥스와 잭은 보호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의미하고 임모탄 조는 지배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부하들 가운데 하나인 '식인종(People Eater)'는 황무지 이전 세계에서 은행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플 이터라는 이름도 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다기보다는 그가 음식을 집어삼키듯 사람들을 빨아들여서 노동력을 뽑아내는 사회 지배층의 일원이었음을 암시한다(물론 황무지에서는 사람도 얼마든지 먹을거리가 된다. 일례로 생체기술사는 어린 퓨리오사의 피를 뽑아서 디멘투스에게 소시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임모탄 조의 또 다른 부하인 '무기 농부'는 죽음의 씨앗을 생산하는 농장의 지배자로, 입속에 이빨 대신 총알을 박아 넣을 만큼 무기와 전쟁에 매료된 전쟁광이자 죽음의 화신이다.

 
임모탄 조가 자신의 혈통에 기이하리만큼 집착하는 것도 임모탄-아들바보=0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가부장제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퓨리오사>와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와 맥스 일행이 취하는 태도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퓨리오사는 <퓨리오사> 영화 말미에 "우리 모두가 결국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라도, 언젠가는 이 세계가 오염되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면서 임모탄 조의 아내들을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작중 불임으로 묘사되는 그녀가 자손 번식이라는 여성의 생물학적인 기능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극 중에서 '문화적 여성'으로서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는 건 그녀가 가진 이러한 의지 때문이다.

 
퓨리오사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생명의 재생산은 단순히 DNA 유전자 복제를 통해서 나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넘긴다는 일차원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손을 남긴다는 것은 내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나의 씨앗을 어딘가에 심어줄 사람을 남긴다는 뜻이다.
 

퓨리오사의 어머니가 어린 퓨리오사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근위대장 잭이 녹색 연막총을 쏘아 올린 뒤 무기 농장으로 차를 몰고 돌진했던 것처럼, 노쇠한 부발리니 여전사가 여행길에서 만난 젊은 여인들에게 씨앗이 담긴 가방을 넘겨주고 그녀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 씨앗을 심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나를 그대로 복제한 존재인지 - 임모탄 조가 집착하는 '건강한 아들'인지 또는 디멘투스가 찾아 헤매는 '리틀 D'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반드시 후손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임모탄 조와 디멘투스라는 두 빌런의 욕망은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소망보다는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영생을 이루겠다는 집착에 가깝다. 그러나 '죽음이 생명의 자리를 대신한' 이 미친 세계에서 지배 계층인 그들의 욕망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디멘투스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죽어 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암시하듯 작중에서 지배계층 남자들의 이름은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껍데기와 야욕을 묘사하고 있을 분이다. '사람들을 착취하는' 피플 이터, '전쟁에 미친' 무기 농부, 그리고 '불사의 존재가 되려는' 임모탄 조. 그나마 의미가 있는 이름을 찾자면 '전부 잊어버린' 디멘투스 정도가 있겠다.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들이 '스플렌디드 앙하라드(많은 사랑을 지닌 비범한 사람)', '토스트 더 노잉(아는 것이 많은 토스트)', '케이퍼블(유능한 사람)', '대그(재미있는 사람)','치도 더 프레자일(연약한 치도)'처럼 그녀들의 개인적인 성격과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다.

 
오히려 퓨리오사 일행에게 도움과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 죽은 세계의 껍데기만 남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그 어떤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들보다도 평범한 단음절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맥스, 잭, 그리고 눅스다(참고로 워보이 출신인 눅스는 셋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에 공식적인 의미가 있는 캐릭터다. 그의 이름은 '깨지지 않게 단단한 견과류'라는 뜻이다).
 

그리고 물론, 퓨리오사를 빼놓을 수 없다. '분노하는 자'. 감독은 그녀의 이름을 통해서 이미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선언했다. 분노의 도로(fury road)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은 임모탄 조도 디멘투스도 아닌 바로 퓨리오사라고. 망가진 세상에서 유년기를 빼앗기고, 어머니를 빼앗기고, 사랑을 빼앗기고, 팔을 빼앗긴 그녀가 분노할 때 바로 이 미친 세상은 변화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며 과거에 머물고 이상 속 세계를 꿈꾸던 퓨리오사가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 속 도시인 시타델을 '되찾기'로 결심한 순간, 그녀는 각성하며 '분노의 도로'의 진정한 주인이자 이 세계의 영웅으로 우뚝 선다.

 
 

6.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가 얻은 것

 
그렇다면 맥스는 어떨까? 처음부터 맥스는 분노의 도로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퓨리오사가 '분노의 도로'라는 국지적인 장소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맥스는 황무지 전체를 아우르는 인물이다. 퓨리오사의 여행은 시타델에서 종착지를 찾았지만 맥스의 여행은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이 험한 여정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넓은 의미에서 <분노의 도로>는 독재자에게 점령당한 시타델을 탈환하려는 영웅 퓨리오사의 모험담이지만, 이 큰 서사 안에는 떠돌이 맥스의 힐링캠프(!)라는 작은 서사가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 초반에 맥스는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모두 쫓기는' 상태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그는 이 미친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온전하고 선량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안 미친' 인물이지만,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점점 더 미친 사람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맥스는 <분노의 도로> 영화 중반부에서 퓨리오사에게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하지 못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맥스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에게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눈앞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맥스는 퓨리오사의 반복된 물음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시선을 피한다.

 
그랬던 맥스가 동행자들에게 마음을 여는 첫 장면은 달리는 차 위에서 임모탄 조의 아내인 스플렌디드가 용감한 모습으로 죽음을 피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 그는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녀와 눈빛을 교환한다. 맥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지는 것도 바로 이 장면에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발이 미끄러진 스플랜디드는 황무지의 모래바람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맥스에게는 또다시 악몽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그와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퓨리오사가 함께 소금 사막을 넘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며 예전처럼 황무지를 홀로 떠도는 '미친 맥스'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하지만 홀로 남은 그의 앞에 또다시 예전에 지키지 못했던 어린 소녀의 환영이 나타나고, 환영을 통해 자신이 눈앞의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맥스는 퓨리오사가 시타델을 '되찾아서' 진정한 의미의 'Redemption'을 이뤄내는 것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퓨리오사에게 자신의 '최고 품질 Rh-O형' 피를 수혈해 주는 순간은, <분노의 도로> 첫 장면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고 의료용품 취급을 받으며 억지로 피를 빼앗기던 맥스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되찾았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더 이상 맥스는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잃어버렸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자신이 현실에서 누군가를 지키고 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스는 기꺼이 퓨리오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내 이름은 맥스, 그게 바로 내 이름이야."
 

<매드 맥스> 시리즈에서 주인공 맥스가 들고 다니는 총인 더블 베럴 소드 오프 샷건은 원래 미국에서 술집 주인들이 샷건의 긴 총신을 반으로 잘라 카운터 뒤에 숨겨놓기 위해 만든 총으로, 공격이 아니라 자기 방어를 위해 고안된 무기다. 황무지 이전 세계에서 사회와 가정을 수호하는 존재였던 전직 경찰 맥스는 가정 방어용 샷건(Home Defense Shotgun)이라고 불리던 총을 들고 더 이상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허허벌판을 목적 없이 헤맨다.

 
맥스는 자신이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없다고 여기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한다. 그에게 이 세계는 만인이 만인에게 투쟁하는 세계,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지배당해 강자가 약자를 죽고 죽이는 세계다. 한때 그는 이 세계의 질서에 저항해보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으며 그때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버렸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현재의 '매드 맥스' 그러니까 황무지 세계의 질서에 기꺼이 순응하지도, 있는 힘껏 저항하지도 않는 떠돌이 맥스라는 인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맥스라는 인물의 본질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가 모든 혈액형에게 수혈할 수 있는 'Rh-O형' 피를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혈액형은 원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라는 맥스의 본질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가 실패를 겪든 말든 바뀌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잃고 떠돌던 맥스에게 자신의 이런 특성은 강제로 지고 가야 하는 무거운 십자가나 마찬가지였지만, <분노의 도로>를 겪은 맥스에게는 그렇지 않다.
퓨리오사를 도와 시타델을 되찾은 이 험난한 여정은 맥스에게 황무지에서 이뤄낸 값진 성공의 경험으로 남았다. 이 모험을 통해서 맥스는 자신이 원래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기억해 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황무지를 여행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힘과 지혜를 나누어주는 이름 없는 영웅으로 살아갈 것이다. 방황하는 떠돌이가 아닌 진정한 '로드 워리어' 즉 '도로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퓨리오사 3차 관람을 앞두고 잭 캐릭터에 푹 빠져서 배우 인터뷰란 인터뷰는 다 찾아보는 중인데, 그 중에서도 이 짧은 인터뷰가 아주 인상 깊었다. 새벽 4시에 동생한테 (냅다) 번역해서 카톡으로 보내준 김에 블로그에도 올린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인물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가 깊은 배우라는 걸 느낄 수 있는 답변이다. 촬영 중에 배우 교체 이슈가 있었다고 하는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닌 톰 버크가 잭 역할로 뽑혔는지 알 것 같았음. 스포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스포 주의!

 

 
Q. 근위대장 잭은 어떤 캐릭터인가?

A. 근위대장 잭은 전 생애를 시타델과 시타델 주변에서 보내는 인물이다. 그는 무기 농장과 가스 타운과 시타델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궤도를 빙빙 돌면서 끝이 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맥스의 잔상을 어느 정도 느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물리적으로 떠돌이였던 맥스와 달리) 잭은 어떤 제도화된 시스템 내부에 있는 외부인 - 아웃사이더 인 인사이드 - 이다. 그는 바깥 세상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아웃사이더이지만, 내부에 있는 외부인인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느낀 잭의 모습이었다.

 

 
Q. 근위대장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A. 근위대장이라는 직위는 공식적으로는 임모탄 조의 경호원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은 수행하는 임무에 따라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다. 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투 트럭을 모는 것이다. 그 일은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시타델의 직업들 중에서도 위험성이 특히 큰 일이이기도 하다.

 

잭이 퓨리오사를 만나기 위해서 분노의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장면은 시리즈의 오리지널 배우인 멜 깁슨의 시그니처를 오마주한 것이다.

 
Q. 퓨리오사를 처음 만났을 때 잭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A. 퓨리오사를 처음 만난 순간 잭은 그녀라는 개별적인 사람 안에 존재하는 어떤 섬광을 느꼈다.  퓨리오사는 단순히 번뜩이고 사라지는 섬광이 아니라 실체화된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는데, 처음에 잭은 그녀의 이런 생각을 뜬구름 같은 환영으로 여겼다. 그들이 서로 거래를 하고 그가 그녀를 도와 탈출을 위한 짐을 싸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서 환영을 쫓을 수 있는 자유를 얻는 행위이기도 했다.

 

 
Q. 잭과 퓨리오사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하는가?

A. 둘의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잭은 퓨리오사가 향하는 장소에 대해서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 장소를 찾는 걸 돕고 싶었다. 그리고 잭이라는 인물에 대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 영화 촬영을 시작할 때 이야기 나눴던 부분이기도 한데,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가 그녀와 함께 그 장소에 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궁국적으로는 한 인간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과도 같다는 점이다.

 

 
Q. 퓨리오사와 잭의 목표는 무엇인가?

A. 그들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다른 세상을 찾으려고 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두 사람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아주 흥미롭고 정직한 태도다.

 

 
Q. 퓨리오사가 어떤 캐릭터라고 생각하는지?

A. 그녀의 강인함 안에는 아주 연약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연약함 안에는 엄청난 강인함이 존재한다. 그건 아주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여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다.

영상 제목: 퓨리오사와 근위대장 잭 사이에는 연애 감정이 있었을까


*위 영상의 실제 출처는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칸 영화제 언론 시사회 현장이다.

기자: 퓨리오사와 잭이 추격당하는 차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어땠는지 안야와 톰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대사가 전혀 없지만 관객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액션도 많이 나오죠. 그래서 저는 두 분이 그 장면을 처음 스크린에서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왜냐면 정말로 대단한 장면이고, 액션 뒤에는 엄청난 감정이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
일단 저는 우리 두 사람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Go Tom, Go!" 하고 외쳤죠! (웃음)

저희 두 사람은 조지 밀러 감독과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나눴어요.  둘 사이에는 당연히 연애 감정도 있었겠지만, 누군가가 지닌 이상에 대해서 깊은 믿음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런 사랑의 형태가 사람들 사이에서 잘 회자되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잭은 퓨리오사의 꿈을 사랑했어요. 고향 땅으로 자신을 데려갈 거라는 그녀의 약속과 사랑에 빠졌던 거였어요. 그녀의 외형이 어떤 모습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사랑을 지켜보는 건 아주 근사한 경험일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톰처럼 재능 있고 멋있는 사람이 연기할 때는 더더욱 그렇죠. 잭과 퓨리오사가 함께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대사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고 저는 느꼈어요.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아주 멋진 경험이었어요. 당신도 그랬나요, 톰?

 
톰 버크: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그건 바로 잭이 퓨리오사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와 한 팀이 되었다는 거예요. 잭은 그녀를 자기 동료인 블랙썸(Green Thumb의 반댓말로 원래는 식물을 잘 죽이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매드 맥스 세계관에서는 기계 수리공을 뜻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퓨리오사가 나타났어요.
 
안야 테일러 조이: 독 안에 든 쥐처럼 궁지에 몰린 채로요.
 
톰 버크: 맞아요. 독 안에 든 쥐처럼.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는 건 멋진 일이었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장면들이 최대한 부드럽게 여정의 일부가 되어 녹아들기를 바랐습니다. 단순히 영화적인 연출로 보이는 게 아니라요.
 
안야 테일러 조이: 제가 극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도 바로 이거예요. "It's Been a Hard Day."(퓨리오사에게 건네는 잭의 첫 대사) 실제로 그랬잖아요, 그 날은. 정말 힘든 날이었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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