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영화의 주요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판 1 : 수다쟁이 빌런 디멘투스로 인해 흐릿해져 버린 퓨리오사의 서사

<퓨리오사> 촬영 기념품으로 무엇을 가져갔냐는 질문을 받은 안야 테일러 조이
안야 테일러 조이: 저는 퓨리오사의 기계 팔을 집에 가져갔어요. 하지만 사실 정말로 원하는 기념품은 따로 있었죠. 밀러 감독님은 제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영화에 넣을 씬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저를 위해서 그 장면(퓨리오사가 디멘투스의 혀를 자르는 장면)을 찍어주셨고, 소품팀은 기념품을 집에 가져갈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게 뭐냐면, 바로 크리스의 혀예요.
인터뷰어: (경악)
안야 테일러 조이: 맞아요. 저는 크리스 헴스워스의 가짜 혀를 상자에 담아서 집에 가져갔어요.(웃음) 밀러 감독님은 저한테 "안야!" 라고 말씀하시더니,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인터뷰어: 그거 알아요? 이 일 하면서 촬영 기념품으로 집에 뭘 가져갔냐는 질문을 여러 번 해봤는데, 당신 대답이 제일 충격적이에요.
안야 테일러 조이: 정말 미안해요.
인터뷰어: 대체 뭐에 대해서 사과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할 말을 잃었어요.
안야 테일러 조이: 그때는 그게 멋있어 보였어요!
조지 밀러 감독은 평소 좋은 영화란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드러내 왔다. 제작자의 취향을 반영하듯 매드맥스 월드의 주요 인물들은 말수가 적다. 샤를리즈 테론의 퓨리오사도, 안야 테일러 조이의 퓨리오사도 과묵하다. 멜 깁슨의 맥스도, 톰 하디의 맥스도 과묵하다. 심지어 후반부 시리즈의 주요 악역인 임모탄 조마저도 어느 정도 과묵함이라는 조지 밀러 감독의 미덕을 지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높은 톤으로 현학적인 대사를 끊임없이 내뱉는 디멘투스는 영화 내에서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고려하지 않아도 밀러 감독의 관점에서는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디멘투스의 어투는 현대식 호주 영어가 아니라 70~80년대 호주에서 사용하던 사투리, 특히 경마 해설자가 사용하던 말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헴스워스는 디멘투스의 어조를 만들어낼 때 자신의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오래된 호주식 말투를 많이 참고했다. 헴스워스의 할아버지 사투리 열전)

다리 사이에 곰인형을 소중하게 매달고 다니는 거구의 악당 디멘투스는 매력적인 빌런이다.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호주 출신 할리우드 스타가 그를 연기했다는 점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만든 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할 중요한 요소였다. <퓨리오사> 포스터에서도 디멘투스와 그녀의 관계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디멘투스라는 악당 캐릭터 자체의 매력을 잠깐 옆으로 치워놓고 원론적인 질문을 한 번 던져 보자. 과연 그는 <퓨리오사>에 반드시 등장했어야 하는 인물일까?
<분노의 도로>가 개봉된 직후 샤를리즈 테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도 임모탄 조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로 한 거죠.” 테론의 말처럼 초기 설정에 따르면 퓨리오사는 원래 임모탄 조의 아내들 중 하나였지만 불임 때문에 밀려난 뒤로 궂은일을 하며 살다가 사령관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팔 역시 시타델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절단되었다는 설정이었다.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의 엔딩이 정확하게 <분노의 도로>와 이어진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며, 자신이 영화를 만들 때 두 영화가 마치 한 편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한다. 그런데 감독의 의도대로 퓨리오사와 분노의 도로를 이어서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체 임모탄 조가 퓨리오사에게 뭘 잘못한 거지?’
물론 임모탄 조가 빌런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노의 도로>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는 자들에게서 탈주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다. 인간을 상품화해 사용하는 권력자 집단의 중심에는 임모탄 조가 있다.
임모탄 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없더라도 퓨리오사에게는 아내들을 데리고 시타델을 탈출할 만한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일단 아내들 자신이 임모탄 조의 소유물로 사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굳이 죽일 만큼 깊은 원한과 증오심을 가질 이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녀를 녹색의 땅에서 납치한 것도, 그녀의 어머니를 추격 3일 만에 죽게 만든 것도, 스승이자 동료였던 잭을 죽게 만든 것도, 심지어 그녀의 팔을 잘리게 만든 것도 모두 임모탄 조가 아닌 디멘투스의 짓이니까 말이다.
<분노의 도로>에서 시종일관 과묵한 퓨리오사가 영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임모탄 조를 죽이기 직전에 던지는 임팩트 넘치는 대사, “나를 기억하나?”는 디멘투스의 등장으로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원수는 임모탄 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임모탄 조는 원수에게서 그녀를 구해줬으며, 40일 전투를 통해 디멘투스 일당을 모두 소탕하며 이이제이 형식으로나마 복수에 도움을 주었던 존재다.

임모탄 조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퓨리오사의 탈주는 자신이 가장 인정하고 믿고 있던 존재가 자신의 보물인 아내들을 훔쳐서 달아난 꼴이다. 물론 말이 좋아 아내나 보물이지 사실상 성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인 데다, 결정적으로 그의 '보물'들은 보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퓨리오사의 대사가 가진 날카로운 울림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임모탄 조와 그녀 사이에 얽힌 보다 복잡하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인 사연이 필요했다.
화려한 액션 연출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밀러 감독이 이런 중요한 서사적 맥락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건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특히 "리멤버 미?" 가 퓨리오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중요한 대사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녀의 과거를 조망하기 위해 나온 프리퀄 영화에서는 퓨리오사가 이 대사를 내뱉기까지의 사연을 훨씬 무겁고 신중하게 다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판 2 : 묵시록의 검은 천사...뭐라고?

그 외에도 이 영화의 허술한 부분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극 중에서 임모탄 조의 아들이자 소아성애자임이 암시되는 릭투스의 검은 손을 피해 도망쳐 나온 어린 퓨리오사를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적들의 코앞에서 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어딘가 말이 되지 않게 느껴진다. <퓨리오사>를 보는 사람들이 이런 설정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영화가 왜 이렇게 허술하냐고 지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의 수많은 허술함은 이 영화가 ‘SAGA’ 즉 서사시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조지 밀러 감독은 <오뒷세이아>나 <일리아드> 같은 고대 영웅 서사가 그렇듯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을 다룬 이야기에서도 여러 가지 의문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신비로운 상태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퓨리오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주변 인물들은 그녀가 여자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디멘투스에게서 데리고 온 어린 소녀라는 걸 알았을까 등등.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가 디멘투스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조차 감독은 화면을 통해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애매하게 처리한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를 즉결 처형했을까? 아니면 디멘투스가 잭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사슬에 매어놓고 죽을 때까지 황무지를 끌고 다녔을까? 또는 디멘투스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형틀에 매달아서 원없이 고문했을까? 전부 다 아니라면, 역사가의 마지막 나레이션처럼 시타델 바위산 위 어느 깊은 곳에는 퓨리오사가 살아 있는 디멘투스를 양분 삼아 심어놓은 복숭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은 끝까지 진실을 알 수 없다. '전설'이란 바로 그런 거니까 말이다.
물론 역사가가 이렇게 말하기는 한다.
"나는 퓨리오사 자신에게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조차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진다. '자신만이 영웅 퓨리오사의 진실을 알고 있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역사가의 나레이션은 마치 리라를 연주하며 영웅 설화를 읊는 후대의 구전 문학가가 자신은 영웅 본인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으며, 따라서 이 전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자신뿐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듯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퓨리오사>의 이야기 진행 방식은 그다지 친절하지도 디테일하지도 않다. 많은 생략과 모호한 여지를 남기는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을 어색하게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연출에는 고대 그리스 대서사시 못지않는 ‘퓨리오사의 황무지 대서사시’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듬뿍 담겨 있다. 의도된 연출은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적어도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정말 거슬렸던 것은 허술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영화의 몇몇 대사였다. 전쟁에서 패해 도주하는 디멘투스를 직접 잡으러 가는 퓨리오사를 보며 임모탄 조의 막내아들인 스카브로스가 "저건 대체 뭐지?"라고 질문하자 역사가가 이렇게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검은 천사, 묵시록의 다섯 번째 기사."
도대체 이 대사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애써 찾아보지도 않았지만, 만약 이 말의 의미를 반드시 찾아봐야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의미 전달에 실패한 대사다. 게다가 영화의 맥락상으로도 이 대사는 그것을 말하는 인물부터 말하는 투까지 모두가 이상하다.
이야기 진행상 퓨리오사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관객인 우리보다도 더 드문드문 상황을 지켜보았을 뿐인 늙은 역사가가 어떻게 그 순간 그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그놈의 다크 엔젤이라는 게 그녀의 본질이 맞긴 하다면) 그런 멋들어진 대사를 사실 중이병 대사를 날릴 수 있었을까? 그는 무당도 마법사도 초능력자도 아닌, 그저 사라진 세계의 지식을 뇌의 회백질과 피부 껍데기 위에 간직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언어에 힘을 실어 주는 무력한 인물에 불과한데 말이다.
두 번째이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주범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결정적인 대사는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네가 과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이 대사의 위화감은 황무지 세계가 사실 전부 조지 밀러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몰라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매드 맥스>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에게 밀러 감독이 설파하는 ‘이야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이야말로 이 시리즈가 그 자체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라는 증거다.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며, 자신도 실재하는 존재라고 굳게 믿는 채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적어도 조지 밀러는 디멘투스가 문제의 대사를 내뱉기 전까지는 그렇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위의 대사를 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라는 장편 영화의 한 장면이고 더 나아가 오십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매드 맥스>라는 시리즈물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원치 않게 의식하게 된다. 말 그대로 이야기 속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 속 인물들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마무리. 아무튼, 그럼에도 '조지 밀러'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분노의 도로>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 칸 영화제 기자 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주인공인 톰 하디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자: 톰 하디, 제게는 다섯 명의 여자 형제와 아내와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계시죠. 세상에 엄마 없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저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outgun by estrogen)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매드 맥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영화에 왜 이렇게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나요? 저는 이 영화가 남자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톰 하디: 아뇨. (청중 웃음) 조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좌중을 웅성거리게 만든 이 질문은 무례했을뿐더러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작업 과정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간담회 자리에는 퓨리오사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뿐만이 아니라 <분노의 도로>의 편집자이자 후에 <퓨리오사>를 작업하게 되는 인물이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조지 밀러의 아내이자 <분노의 도로>로 아카데미 편집상을 받은 마거렛 식셀이다. 조지 밀러 감독이 한 번도 액션 영화를 편집해 보지 않은 식셀에게 '<분노의 도로>는 다른 액션 영화와 다르다'라고 말하며 편집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영화 편집 작업에 대한 그녀의 애정 어린 인터뷰를 추가로 보고 싶다면 다음 링크 참조)
"세상에는 여성이 액션 영화를 편집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스타워즈를 보고 자란 여자아이들로 인해,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바뀌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기조는 변할 거고, 사실은 이미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가렛 식셀, 오스카상 수상 인터뷰에서
<퓨리오사>가 개봉했을 때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여성주의 계열의 비판이 눈에 띄었다. 여성이 주인공인 건 좋지만 이 영화에서 퓨리오사는 남성에게 지나치게 종속적인 모습이다. 퓨리오사는 대체 왜 머리를 자르지 않는 걸까. 왜 그녀는 '보다 중성적'이고 '덜 여성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걸까.
정작 조지 밀러 자신은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가 페미니즘 영화냐는 질문에 대해 특별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한결같다. 위에서 소개한 <분노의 도로> 칸 영화제 기자 간담회에서 사회자가 '<분노의 도로>를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 있나'하고 질문하자 조지 밀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부터 페미니즘 사상을 담은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매드 맥스> 시리즈와 비교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을 더욱 확장시키고 싶었는데, 여기서 추격당하는 건 단순히 어떤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아내가 그렇게 나타났죠. 그들에게는 함께 싸워줄 전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한 남자로부터 아내들을 탈출시키는 인물이 다른 남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퓨리오사라는 인물을 만들었죠. 모든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발전해 나갔던 겁니다.
한편 맥스라는 인물은 떠돌이 들개 같은 인물입니다. 덫에 걸린 채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야생동물 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퓨리오사와 맥스를 붙여 놓으면 처음에는 서로를 죽이려고 들 겁니다. 그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존중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분노의 도로>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의 뼈대를 올려놓으면 이런 이야기가 전부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거죠."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여성 서사로 느껴지고, 누군가에게는 모자란 여성 서사로 느껴질 수도 있는 <퓨리오사>는 분명 부족한 점이 많은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영화가 끝내준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어째서 끝내주는지 길게 썼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작품의 가장 끝내주는 점은 이런 이야기에 절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데 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도 그것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허공에 대고 외치는 의미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본질은 카체이싱 액션 영화. 1945년생 조지 밀러 감독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자동차 액션 장르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지치지도 않고 한 가지 이야기를 끈질기게 늘어놓는다. 차가운 기계의 세계에서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과 우정과 연민과 연대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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