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피디아 별점 : ★★★☆

3.7 정도
뮤지컬 원작의 교과서적 해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넉넉한 예산으로 착하게 잘 만든 할리우드 오락 영화. 원작에 침 뱉는 완성도의 뮤지컬 영화들이 꽤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가 어디냐 싶다(그런데 그 넉넉한 예산으로 한글 글꼴도 하나 구매하시지 자막은 그렇다 쳐도 도입부 나레이션의 폰트 상태가)⬅️ 어떤 분이 댓글로 <오즈의 마법사> 영화 도입부 오마주라고 알려주심. 씨네필이 아님을 이렇게 또 들키네ㅎ

두 주연 배우의 연기와 노래 실력은 준수하지만 한 명은 고전적인 캐릭터 해석과 연기를 보여주고 한 명은 현대적인 캐해와 연기를 보여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않고 서로 약간 겉도는 느낌이 든다. 투톱 주연물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

개인적으로 위키드 캐릭터들의 매력은 엇나감과 히스테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서 아리아나 그란데의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글린다 연기가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돌 뮤비를 수백번 보며 춤을 마스터한 찐팬 같은 캐릭터 분석과 연기랄까ㅋㅋ 정석적인 연기는 아니지만 캐릭터와 작품을 아주아주 사랑하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부분들이 있었다. 만약 그녀의 감정이 공허하고 깊이 없게 느껴졌다면 그란데가 글린다 해석을 제대로 한 거라고 생각한다. 글린다 캐릭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얄팍함'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글린다의 가벼움이야말로 엘파바와 그녀를 이어주는 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짧은 장면에서 엘파바는 글린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사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의 책임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엘파바는 평생 이 비밀의 무거움에 짓눌려서 살아왔고, 이런 비극적인 사연이 그녀를 외롭고 어두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초록색 피부 때문에 엘파바가 아싸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반쪽짜리 판단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동생 네사 로즈가 장애를 가졌음에도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라는 걸 생각하면 엘파바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건 껍데기(외면)라기보단 사연(내면)이었다. 물론 따져보면 그 사연조차 초록색 피부가 원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엘파바의 이야기를 들은 글린다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네 잘못이 아니라 어머니가 먹은 약초 때문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도 엘파바에게 해주지 않았던 '팩폭', 그러니까 표면적인 현상만으로 그녀의 비극을 일축하는 이 발언이 엘파바의 마음을 얼마나 가볍게 만들어 줬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글린다에게 마음을 연 엘파바는 더 이상 피부색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학교 생활을 계속한다. 주변 사람들이 초록색 피부만 힐끗거리면서 그녀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었을 때, '너의 피부는 초록색이구나'하고 대놓고 지적했던 한 경박하고 피상적인 인물이 의도치 않게 엘파바의 마음을 깊이 위로해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식의 그런 아이러니가 선(good)의 본질-하나가 아닌 여러 본질- 이라는 게 원작자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인간 심리의 빛과 그림자이자, 희극과 비극이고,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양면이다. 상대가 각자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린다.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히 두 인간이 주고받는 감정의 교류가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속성의 물질이나 자석의 양극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현상처럼 자연스럽고 강렬하며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가 우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석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아나 그란데는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퍼즐의 반쪽 같은 글린다 캐릭터를 잘 표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한편 신시아 에리보의 엘파바 연기는 분명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한데도 위키드보단 오즈의 마법사에 더 어울리는 감정선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엘파바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고독과 그로 인한 날카로운 방어기제 - 이런 요인들이 그녀의 올곧고 순수한 마음과 대립하고 화합하며 만들어지는,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공격성이라는 현대적 심리의 표현을 이 배우의 연기에는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물론 연출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배우의 엘파바는 소수자의 고독과 고뇌, 투지, 그리고 비극을 대변하며 갈등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착하고 노래 잘하는 모범생 디즈니 공주 같았다. 기품 있고 우아한 연기긴 했음. 다른 영화에서 봤다면 감탄했을 것임

감정적으로 줄곧 억눌려 왔던 엘파바가 자신의 감정을 끌어모아 폭발시키는 The Wizard and I나 Defying Gravity 같은 솔로곡들의 경우 분명 노래 실력만 놓고 보면 훌륭한데도 엘파바라는 캐릭터의 내면에서 억압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두 곡의 드라마틱한 감정선도 그다지 뚜렷하게 두각되지 않았다. ⬅️ 근데 이 부분은 내가 뮤지컬이 아니라 원작 소설을 먼저 봤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음 뮤지컬 속 엘파바는 원래 이렇게 착한 캐릭터일지도 모르지 뭐. 하지만 착하기만 한 엘파바가 부르는 No Good Deed 같은 넘버는 별로 기대가 안 된단 말이야..

+
특이사항: 번역이 끔찍하다
밥맛, 까이다, 더티어메이징(??), 내전공은 파퓰러 부전공도 파퓰러, 포피(스테이씨임?), 우리 미래는 언리미티드 그 외에도 당장 기억 안 나는 수많은 의역과 음차번역..특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인 '양귀비 꽃'을 당당하게 음차번역 해버리는 번역가의 패기인지 아님 윗분들의 검열인지에 감탄하고 말았음. 아니 양귀비를 양귀비라 부르면 관객들이 당장 마약에 중독되기라도 하나? 양귀비가 그렇게 무서우면 꽃양귀비라는 좋은 대체어가 있는데ㅋㅋ

++
'good' 이라는 단어의 거의 모든 용례를 들어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진짜 온갖 장면에 다 쓰이고 재미있는 표현이 많은데 우리말로는 잘 옮겨지지 않아서 아쉽

예고편이 나왔을 때 for good이라는 표현을 배급사에서 '선을 위해'라고 잘못 번역해서(아니..어케 그래요 쳇지피티라도 돌려봐요) 관객들한테 두들겨 맞은 일화가 있었는데 보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for good은 숙어로 '영원히'가 맞지만 한편으로는 영단어를 이용한 말장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키드는 '선' 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선을 위해'는 아예 근본 없는 오역이 아니었던 거다?!

+++
에메랄드 시티 연극에 나온 두 마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리지널 배우인 크리스틴 체노워스와 이디나 멘젤이라고 한다! 다른 배우로 착각했는데 댓글로 알려주신 분 감사합니다.

++++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신시아 에리보가 디파잉 그래비티를 부른 무대를 우연히 봤는데 영화에서 들은 것보다 훨씬 좋았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이 배우는 위키드의 주인공 엘파바로 분하여 이 곡을 부르는 것보다 그녀 자신으로 이 곡을 부르는 걸 더 편안하게 여겼던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위키드 : 네이버 검색

'위키드'의 네이버 검색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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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챠피디아 별점 : ★★★★☆



(처음에 쓴 후기)

샬롯 브론테는 유부남을 홀로 사랑했지만
제인 에어는 유부남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내를 미친 여자로 만들어 죄의식 없이 불태워버리고(진짜 개너무함) 남자의 눈을 빼앗는 방식으로, 오직 자신만이 가질 수 있게.

이런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 건가 봐.

+로체스터가 로맨스계의 레전드 남주로 회자되는 거 이해 안 감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사람이 아님 잘생긴 것도 아님 건강하지도 않고 음침하기 짝이 없음
...그렇다고 세인트어쩌고가 좋은 남주냐 하면 그것도 당연히 아니지만

그래도 난 그 인간 싫어...크리피해(당연함 고딕 소설임) 나이차도 너무 많이 나잖아 어렸을 때부터 로체스터는 취향 아니었음 난 원앤온리 제인만 좋아할래❤ 우리 제인 사랑이 뭐라고 나이 많은 남자 수발들고 부양하면서 발닦개로 사냐ㅜ

(몇 달 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다시 쓰러 옴. 제인은 과연 발닦개가 되었을까? 로체스처는 어둡고 위험한 남자다. 그의 야성은 매력적이지만 길들일 수 없다. 그가 멀쩡한 상태로 그녀와 결혼했다면 제인은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로체스터가 그녀에게 질렸다며 훌쩍 떠나버려도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다. 결혼식장으로 들어서던 순간까지 그녀를 속인 남자가 아닌가. 로체스터를 사랑할수록 제인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응축된 불안감은 끝내 결혼식 날 대폭발을 일으켜 흰 드레스를 입은 제인 에어를 식장에서 도망치게 만든다.

그렇게 사기꾼 로체스처를 떠나 출애굽기의 모세처럼 황야를 떠돌던 그녀는 외따른 오두막에서 선교사를 꿈꾸는 기독교남을 만난다. 로체스터와는 반대인 인물이다. 선량하고 안전하지만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가 청혼하자 제인은 지루하지만 앞날이 보장된 안정적인 미래를 선택할지 잠시 고민한다. 전근대 사회의 기독교 윤리와 개인의 행복 추구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알레고리와도 같은 고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제인의 손에 큰 재산이 들어온다. 돈이 생긴 제인이 곧장 한 일은 기독교남을 버리고 로체스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이로써 사랑과 예술을 좇으며 살아온 독립적인 근대 여성 제인에게 신앙은 그다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제인이 없어진 사이 로체스터에게는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대가로 눈과 다리와 재산을 잃었다(지은 죄에 비해 지나친 벌이긴 하다). 세치 혀를 잃은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와 지적인 소통을 주고받으며 그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다. 아주 약해졌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로체스터인 것이다.

그런 로체스터를 거둠으로써 제인은 두 가지 수확을 얻는다. 복수와 전복이다. 복수는 감히 처녀인 그녀를 상대로 중혼을 하려고 든 이 남자에 대한 사적인 보복이다. 전복은 관계의 전복을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 로체스처와 제인의 사회적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둘의 관계는 재력가와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로 완전히 전복된다. 둘이 결혼하면 제인은 로체스처 가의 실질적 가장이 된다. 재산도 제인의 것이고 로체스터도 제인의 것이다.

제인 에어는 로맨스 형식을 띠고 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제적, 정서적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전근대 사회와 싸우는 근대 여성 제인의 투쟁기에 가까우며 이 투쟁기는 성공으로 끝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이 소설이 엄청나게 인기 있는 건 해당 서사가 현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보편적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 왔다.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의 본격적인 사회 진출을 허용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제인 에어는 아예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는 제인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들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그녀 역시 완전히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 시대 여자들이 초라함과 맞바꾸지 않고 자유를 얻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부유한 과부가 되기. 하지만 눈먼 로체스터의 존재 덕분에 이야기의 결말에서 제인 에어는 부유한 과부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에 오른다. 살아는 있으나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남편을 가진 부자 사모님 말이다. 이제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원하는 만큼 책을 읽고 그림도 실컷 그리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살 수 있다. 로체스터 발이야 뭐 하인이 닦아주지 않겠는가. 재산도 많은데.

(로체스터가 별로라서 별점 반 개 깎음)


왓챠피디아 별점 : ★★★★★

테나의 기억은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녀는 갓난아기 때 이름을 잃고 먹힌 자라고 불렸으며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깊고 두터운 어둠으로 꽉 찬 지하 묘지를 떠돌면서 성장했다. 그녀에게 죽음은 유년기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만큼이나 친숙했지만 그만큼 넌덜머리 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해브너 섬에서 흰 옷을 입은 숙녀로서 우아하고 부유한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하고 곤트 섬에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농부의 아내로 살겠다고 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선택이었다. 더 나아가 나는 이것이 그녀가 게드를 살려준 뒤 스스로를 위해 내린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테나의 앞에 놓인 것은 검은 묘지와 흰 드레스였다.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죽음에게 영혼이 먹힌 무녀와 평화의 고리를 가져온 흰 옷의 숙녀. 그녀에게 있어 이 둘은 모두 타인에 의해 대상화된 역할이었고 생명의 온기가 떠난 흑백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생생하게 흘러가는 삶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흑과 백의 선택지를 찢어버리고 연초록 숲과 새파란 강물, 노랗고 붉은 낙엽과 갈색빛 도는 흙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뛰어들어갔다.

색색으로 빛나는 삶 속에서 마침내 원하던 존재가 된 테나는 인생이라고 불리는 과정을 마음껏 경험했다. 시골 남자의 곁에서 거친 노동을 견뎌내며 아이들을 낳고 길러내 떠나보냈다. 수많은 계절이 오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지겹도록 붙어 있던 지하 묘지의 검은 그림자, 죽음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평범한 여인으로 늙어갔다.

그렇게 테나가 스스로 선택한 삶도 어느덧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은 독립했다.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더 이상 묘지를 지키는 먹힌 자가 아니라 농부 부싯돌의 과부 고하로서. 스스로 선택한 첫 번째 삶이 지나가고 찾아온 두 번째 삶은 계절로 치자면 겨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듬해 봄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겨울에서 멈출 테니까, 모든 인간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그런 테나의 곁으로 두 번째 삶을 얻은 두 명의 인물이 모여든다. 첫 번째는 원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마법사 게드다. 한때 용과 대화를 나누는 자였던 그는 수많은 사물의 이름을 알았으며 그림자를 뒤쫓고 저승을 여행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마법의 힘을 쓸 수 없게 된 그는 차라리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게드는 점점 위대한 존재로 추앙받으며 전설이 되어가지만 전설 바깥의 그는 힘없는 노인일 뿐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기에는 너무나 지쳐버린, 그렇다고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한, 겨울나무처럼 마르고 황량한 노인.

또 다른 인물은 화상으로 오그라든 얼굴과 불에 그을린 목소리를 가진 소녀 테누다. 테나가 기억이 시작되던 날부터 죽음에 노출되었다면 테누는 태어난 날부터 폭력에 노출되었다. 폭력은 아이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목소리를 앗아갔다. 외형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저 아이가 앞으로 위험한 자가 될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비단 얼굴만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의 외면과 내면은 불에 태워지기 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아이는 전에 없던 존재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아름답건 추하건, 선하건 악하건 상관없이.

그들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함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 세 사람은 이전에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는 힘을 잃었고 아이는 얼굴을 잃었다. 여자는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역할을 잃어버렸다. 상실과 해체의 과정은 그들을 취약하게 만들어 끝내는 아픈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어스시의 세계에는 마법이 존재하지만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폭력과 착취, 잔인함과 비열함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세 사람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비틀거리면서도 그들은 뒷걸음질 치지 않고 나아간다. 더 이상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을 향해, 오래전에 무녀라고 불렸던 늙은 여자와 마법사라고 불렸던 늙은 남자가 나란히 걸어간다. 불에 타 오그라든 아이의 손을 잡고.

테나가 해브너를 떠나 곤트 섬으로 왔다고 했다. 곤트 섬은 게드의 고향이자 그가 마법사가 되기 전에 염소를 치며 살던 곳이다. 그녀는 지하 묘지에서 게드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를 사랑했다. 어쩌면 그녀가 새로운 삶을 같이하고 싶었던 사람은 부싯돌이 아니라 게드였을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먹고 함께 일하며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꿈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게드에게도 테나에게도 각자 끝내야 할 일이 있었다. 삶이 그들에게 맡긴 고단한 임무를 모두 끝마치고 노을 지는 곤트 섬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의 아프고 약한 부분을 도닥이며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가족이 된 그들에게는 이제 아이도 있다. 게드는 마법의 힘을 잃었지만 마법은 그가 가슴으로 받아들인 아이에게로 전해졌다. 그리고 용은 그 아이를 테하누라고 불렀다.

테하누 | 어슐러 르 귄 - 교보문고

테하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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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왓차피디아 별점: ★★★★☆

장안의 화제인 개미친영화를 드디어 보고 왔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뭔 놈의 영화인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 안 보면 극장에서는 아예 못 볼 것 같아서 헐레벌떡 예매함.

이 영화는 여성 감독이 피눈물로 써 내려간 작품이라는 왓챠피디아 한 줄 평이 있었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도 했을 감독이 지금까지 여성으로 이 산업 속에서 지내오며 느꼈을 분노와 고뇌가 영화 전체에 은은하게 감돌다가 후반부에서는 아예 폭발을 한다. 피눈물이 흘러서 홍수가 남. 무언가를 '피로 썼다'라고 말하기 위해선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깊은 고민과 복잡한 메시지를 담은 문제작이었다.

단순히 <젊고 순진한 여성들을 착취하는 쇼 비즈니스 세계의 나쁜 남자들>을 고발하는 쉬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시선으로 소비되는 여성의 몸과 그 몸을 착취하는 여성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강조하겠다. <여성 자신>이다. 그녀를 착취하는 것은 크게는 남성들이지만 분명 그녀 자신도 그 착취 구조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이 영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영화 내내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잊지 마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대사로 귀결된다.

1. 개구멍

서브스턴스를 찾기 위해 주인공 엘리지베스(리즈)는 낯선 주소로 향한다. 그곳에 있는 낡은 문은 그녀가 카드키를 찍었음에도 반밖에 열리지 않는다. 절반 밖에 안 열린 개구멍 같은 문은 앞으로 그녀가 서브스턴스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굴욕과 수모를 겪을 것임을 예고한다.

영화는 내내 서브스턴스가 금기임을 보여준다. 다단계나 마약 밀매처럼 은밀하게 전달되는 정보, 장기매매 광고 같은 안내문, 누가 봐도 허름한 뒷골목인 것도 모자라 절반밖에 열리지 않는 문, 그녀가 주사기로 몸에 찔러 넣는 수상쩍은 형광 초록색 액체까지. 형광색은 곤충이 애벌레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고의 색이다.

이처럼 서브스턴스라는 금지된 기술은 본질적으로 사용자를 비참하게 만들고, 그 비참함을 감내할 만큼 젊음을 갈망하는 자만이 이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수많은 경고 신호를 모두 무시하고 직진할 만큼 절박한 사람만이 서브스턴스의 사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리즈는 절박하다. 왕년에 잘 나가던 연예인이었던 그녀는 겉으로는 아직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자신이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몰락한 원인을 젊음의 상실로 돌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젊은 육체'의 상실이지만, 리즈는 영화 속에서 오직 몸밖에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 그려지므로 젊은 몸의 상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도 끔찍하게 공허하고 불행하다.

그녀의 거대한 집 거실에는 마치 빅 브라더처럼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거대한 초상 사진이 있다. 빅 브라더는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리즈의 사진은 구체적인 존재다. 각종 예술과 문학에서 찬양하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이자, 자본주의의 눈으로는 가장 뛰어난 상품 가치를 지닌 젊음을 담고 있는 이 사진은 단순히 그녀의 과거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많은 여성들이 개별적으로 꿈꾸고 갈망하는 '완벽한 여성상'을 이 사진은 담고 있다. 그것이 리즈에게는 자신의 과거이고 우리 같은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어떤 아이돌, 어떤 배우, 어떤 스타, 자신이 우상으로 삼은 어떤 여성일 것이다. 사진 속의 시선이 24시간 위압적으로 그녀를 지켜보기에 리즈는 절박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금지된 기술을 꺼내 쓸 만큼.

2. 버려지고 내팽개쳐지고 쥐어짜이는 그녀의 몸

서브스턴스는 육체적인 변화다. 영화 속에서 이 변화는 신비롭거나 모호하게 처리되지 않고 매우 물리적인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다. 더 나은 나인 젊은 '수'가 원래 나인 늙은(사실 별로 늙지도 않았지만) '리즈'의 몸을 뚫고 기어 나오는 장면을 카메라는 충격적일 만큼 생생하게 화면에 담는다. 등껍질이 찢어지면서 기어 나오는 에일리언 같은 생명체, 흥건한 피,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뚫리는 장면,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물리적 고통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렇게 이 영화는 '여성의 육체'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초반부에서는 리즈의 나이 든 육체를 집요하게 화면에 담는다. 늘어진 엉덩이와 가슴, 색소 침착이 시작된 피부,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과 구겨져 주름이 지기 시작한 입매. '수'로 재탄생한 그녀가 새로운 몸을 얻고 느끼는 만족감 역시 카메라는 거리감을 줄인 채 노골적으로 쫓아간다. 출렁거리는 엉덩이, 가슴의 곡선, 길게 뻗은 팔과 다리와 목, 그야말로 살색의 향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리즈와 수의 육체를 집요하게 쫓는 시선이 선정적이라고 여겨 불편해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감독의 이런 카메라 워킹과 연출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의도된 것이며 그 의도는 관객들에게 성적인 흥분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영화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란 어떤 것인지 대해서 광적인 집착으로 탐구하는 영화다. 말하자면 카메라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봐라, 이게 여러분이 우리의 몸을 소비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 빌어먹을 사회가 여성의 몸을 이렇게나 씹고 뜯고 맛보면서 온갖 난리 법석을 떨고 있는데 감독인 내가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우아한 예술이나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카메라의 시선이야말로 나 너 우리에게 쏟아지는 현실인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페미니즘에서 백날천날 너의 몸 나의 몸 우리의 몸몸몸몸 하고 강조하는 이유를 처음으로 제대로 깨달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잘 몰랐던 부분에 대한 깨달음을 저 노골적인 카메라 워킹을 통해서 얻었기에, 나는 이 영화가 겉으로는 페미니즘을 표방하면서도 여성의 성을 눈요깃거리를 위해 이용하는 그런 종류의 흔해빠진 영화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3. 닭고기 내장을 빼는 법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젊은 수는 점점 규칙을 깨고 약속을 어긴다. 그녀에게 골수를 뽑히며 착취당하는 입장이 된 늙은 리즈는 분노를 풀 방법을 찾다가 요리라는 수단을 찾아내는데, 그 시발점은 바로 자신을 내친 TV쇼 대표가 던져준 프랑스 요리책이다. 각종 기기괴괴한 고기 요리가 가득한 책을 펼쳐놓은 리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녀처럼 깔깔 웃으며(자고로 늙고 미친 마녀는 사회가 나이든 여자를 조롱하고 때론 두려워하며 소비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던가) 육류를 손질한다. 그녀 앞에는 스튜디오에서 환히 웃는 젊은 수의 모습이 상영되는 TV가 있다.

카메라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며 스스로 맛있는 요리가 되기로 선택한 젊은 여자와, 그 여자에게 골수까지 뽑아 먹히며 뒷방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늙은 여자가 교차된다. 자본주의는 전자를 환영하며 후자를 배척한다. 그러나 후자가 손질하는 바로 그 고기로 만든 요리는 첫 장면에서 TV쇼 대표가 쩝쩝거리며 먹어치우는 신선한 새우처럼 기꺼이 받아들여져 환영받는 상품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요리를 만드는 것은 리즈고, 요리가 된 것은 수이며, 둘은 한 인물이다.

물론 요리를 먹는 것은 남자들, 특히 기득권 백인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단호하게 못 박아놓는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리즈는 자신이 요리로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자 금지된 기술을 빌리면서까지 스스로 요리사가 되어 '수'라는 새롭고 신선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서브스턴스는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건만 그 기술을 소유한 그녀가 열망한 것은 세계 정복도, 사회 개혁도, 세상을 바꿀 위대한 연구도, 하다 못해 이전 삶의 전복도 아니었다. 고작 분홍빛 살을 가진 탱탱한 새우 요리가 되어 자신을 툇 뱉어버린 남자의 입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는 거였다. 슬프게도 끝까지 그녀의 야망은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의 몸을 사방에서 관음하고 있는 스튜디오 - 말이 좋아 스튜디오이지 사실은 골방인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도 진심으로 상품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남자들이 착취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착취 구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자신을 착취하고, 그럼으로써 나도 모르게 다른 여자들까지 착취하며 남성중심적인 시선과 사고방식이 가득한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4. 미소 짓는 여자, 이빨 없는 미소

천박하고 폭력적인 백인 남성으로 그려지는 TV쇼 대표 앞에서 젊은 수는 계속해서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면서 환한 미소를 짓는다. 늙은 리즈가 영화 속에서 거의 웃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녀에게 웃음은 감정 표현이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서 수의 모든 웃음은 그녀가 몸을 노출하고 화장을 하는 것과 다름없이 자신을 벗기고 꾸며서 타자의 시선에 끼워 맞추는 액세서리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웃음을 잃어버린 그녀는 진실한 감정도 함께 잃어버린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구나" 라는 동창의 말을 떠올리며 리즈가 살며시 지었던 미소, 그 미소를 짓게 만든 감정을 둘로 갈라진 수는 영영 잃고 만 것이다.

미소를 도구로 만든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이전의 자신 - 놀랍게도 아직까지 공포, 분노, 두려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늙고 추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끓어버리는 일이다. 그 일은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것만큼이나 끔찍하고 역겨운 과정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살인 과정은 매우 길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친구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리고 앞에 앉은 한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을 나가버렸을 만큼 잔인한 방식으로 수는 리즈를 죽인다.

그러나 수의 아름다운 미소는 모든 미소가 그렇듯 영원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그렇기는커녕 끝은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영화 후반부에서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수에게서 처음으로 사라진 것은 바로 그녀의 그 자본주의 미소다. 치아가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도 그녀의 미소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고작해야 이빨 하나 빠졌다고 사라지는 아름다움이라니, 이 얼마나 무상한 것이란 말인가. 나약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깨트리고 몸을 으깨는 고통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얻은 것이 이빨 하나 빠지면 무너져 내리는 미소라니. 그녀의 미소는 그녀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모든 아름다움의 결정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울 만큼 헛되고 허망한 신기루다.

5. 하나가 된 엘리자베-수

영화 속에서 내내 분리된 채 서로 치고받고 싸워대던 엘리자베스와 수는 후반부에서 하나가 된다. 이 말은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늙음과 젊음이 혼합되고, 성적 기관과 아닌 기관이 뒤섞이고, 상품과 인간이 뒤엉키며, 마침내 미와 추가 융합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탄생한 카오스적 존재가 바로 엘리자-수다. 탱탱한 가슴과 하얀 치아를 쫓아온 여행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모든 부위가 제자리를 벗어난 괴물이었던 것이다.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쩐지 이 괴물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반대편 끝에 있게 되었음에도 엘리자-수는 아주 느긋하고 심지어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다. 반짝이는 귀걸이를 꺼내 머리인지 배인지 모를 곳에 착용하고, 고데기를 꺼내 몇 가닥 없는 머리를 손질하는 그녀의 손짓에는 한 조각의 조급함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 이미 아름다움을 얻어 자신에게 만족하는 자의 태도다.

그렇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결핍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이미 합일을 이루어 완전한 존재가 되었으므로. 리즈이자 수였던 그 존재는 이제 완벽해졌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육체에 대한 영화이기에 감독은 리즈와 수를 <육체적으로> 합쳐놓았다. 그 모습이 비록 세상의 기준에서는 괴물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아니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분리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엘리자-수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럽마이셀프, 이너피스 하게 되었는데 그런 썩은 표정으로 보기 있깁니까? 어리석은 대중들 같으니. 역시 세상 사람들은 겉모습밖에 볼 줄 모른다. 내면의 평화와 마음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든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류 최상의 미덕인 것을. 거울을 보는 엘리자-수의 눈에는 분명 하나가 되어 온전하게 아름다워진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엘리자-수가 거실에 걸린 사진에서 젊은 리즈의 얼굴을 오려내 가면을 만드는 것은 추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위는 일종의 선언에 가깝다. 내가 원하고 여러분이 원하는 그 이상적인 여성상, 살이 찌지도 이가 빠지지도 얼굴이 구겨지지도 가슴이 늘어지지도 않는 완벽한 여성상에 드디어 도달했다는 선포. 내가 바로 사진 속 리즈라는 선포. 그런 그녀를 화려한 조명과 음악이 감싼다. 이때 흘러나오는 것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바로 그 음악이다. 침팬지가 인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이 이 영화에서는 합일을 이뤄 당당한 존재가 된 엘리자-수의 스크린 데뷔 음악으로 쓰이는 것이다.

당당한 브금과 함께 무대에 오른 그녀는 좌중의 관심 속에서 뭔가를 '탄생'시킨다. 아, 정말이지 사람들은 여성의 육체만큼이나 여성의 생산성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녀는 무대 위에서 탄생 쇼를 보여준다. 여러분이 그토록 사랑하는 가슴이 탄생하는 쇼를. 어머니의 포근한 젖가슴과 소녀의 하얀 젖무덤 어쩌고 저쩌고의 바로 그 가슴을! 그녀는 낳는다. 가슴이 바닥에 철퍼덕 떨어진다. 물론 가슴은 원래 철퍼덕 떨어지는 부위가 아니다. 가슴은 코나 입술이나 팔다리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갈비뼈 위에 얌전하게 두 쪽 다 달려있어야 한다. 가슴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바닥에 있건 몸 위에 있건 환영받아야 하지 않나 싶지만, 사람들은 상상력이 빈약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하여간 스튜디오에 앉은 관객들이 가슴을 낳은 엘리자-수의 존재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소리를 꽥꽥 질러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그렇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쇼가 시작된다.

6. 피칠갑을 한 워터밤 쇼

자본주의는 무시무시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착취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몸을 착취한다. 그리고 쇼 비즈니스 산업은 그런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알았을 것이다. 이 산업에 대한 분노와 비판을 힘껏 담아 만든 영화조차도 많은 남자와 여자들에 의해 상업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말 것임을. '수' 역할을 맡은 젊은 여성은 이 영화에서의 노출로 스타 배우가 될 것임을(사실 마가렛 퀄리는 원래도 스타였고 심지어 나는 <조용한 희망>을 세 번이나 봤는데 누군지 못알아봤음 이 정도면 안면인식장애 아닐까🙄). 애초에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종사하는 그 누구도 쇼 비지니스 산업에서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님을. 자본주의는 비판과 대안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흡수해 버린다는 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할 만큼 무서운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서 완전체가 된 엘리자베-수는 온 세상에 피를 퍼붓는다. 피칠갑이 된 스튜디오. 피로 샤워를 하는 남자들. 피로 샤워를 하는 여자들, 피로 샤워를 하는 댄서들, 피를 뒤집어쓴 장비들, 의자, 카펫, 바닥, 천장. 제아무리 고어 영화라도 어린이는 잘 안 건드리는데 이 영화에서는 심지어 어린이한테까지도 피칠갑을 한다. 너도 조만간 이 산업의 미래가 될 존재이니 옛다 피벼락이나 받아라 이건가(감독님 무사와요ㅠㅠ). 쇼 비즈니스 산업과 그것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 스튜디오 바닥을 뒹구는 먼지 한 톨마저도 창작자가 얼마나 처절하게 증오하며 깊이 분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 공고한 벽에 실금이라도 내고 싶어 쇠망치를 들고 덤벼 봐도, 젤리처럼 꿀렁거리며(그러고 보니 한 철학자는 현대를 '유동하는 공포'의 시대라고 하였더랬다) 망치질의 충격마저 흡수시켜 끝 모르게 몸집을 키우는 자본주의를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우리 어리석은 여자들은(리즈와 수가 ㅈㄴ 멍청하다는 건 영화 속에서 이미 충분히 묘사됐다) 쇼 비즈니스가 구석구석 스며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거죠? 자신을 사랑하라는 공허한 문구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무장을 할 수 없다. 오히려 럽마셀은 <너의 젊고 아름다운 외형을 가꾸고 또 가꿔라. 그게 사랑이다>라는 왜곡된 메시지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이게 뭔 소린가 싶으면 걸그룹 트리플에스의 걸스 캐피탈리즘이라는 곡을 들어보세요.

그래서 감독은 외친다. 에라 모르겠다, 균열조차 낼 수 없는 게 자본주의라면 분노의 힘으로 우리 육체에 존재하는 따뜻한 생명의 물, 피를 흩뿌리며 모두 함께 신나는 워터밤이나 즐깁시다. 착취자들의 얼굴에 피벼락이나 끼얹어 줍시다. 그 한순간의 워터밤, 스튜디오를 쓰나미처럼 쓸고 갈 한바탕 쇼를 위해서 엘리자-수는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내어준다. 예수와 부처와 각종 성인과 보살 등등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진 인간들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하였듯 말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쇼 비즈니스의 화신(embodiment, 化身)이 되었고 그토록 갈망하던 화려한 주목 속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예수부처 기타 등등처럼 득도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끝까지 어리석고 끝까지 욕망 덩어리다.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그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게 그녀의 운명이다. 몸만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는 몸에 대한 영화이고 그녀는 가진 거라곤 육체밖에 없는 인간이니. 화신이라는 건 몸이 된다는 뜻이다. 가진 거라곤 몸밖에 없어서 그녀는 몸을 내줬다. 그녀가 알던 세계의 전부였던 자들, 그러니까 스튜디오에 앉아 있던 관객들을 위해서.

그녀의 희생을 기억하라. 여러분이 그토록 좋아하는 <완전한 육체>를 얻은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내던져 그날의 쇼를 완성시켰는지를 기억하라. 쇼 비즈니스 산업의 태동기부터 '은막의 스타'라는 이름 아래 기꺼이 기름진 요리가 되어 화면 너머 관객들의 눈요기(눈으로 먹는 음식)가 되었던 수많은 '그녀'를 기억하라.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여자. 엘리자베스, 수, 그리고 엘리자-수.

그녀를 기억하라,
그녀들을 기억하라.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명예의 전당 기념비는 쇼 비즈니스의 화신으로 장렬하게 산화한 그녀를 기억하라는 감독의 메시지다.

+별점 반 개 뺀 이유: 중간에 길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넘 길고 괴로운 영화였다 근데 제대로 해석하려면 아무래도 한 번 더 봐야겠다(하지만 그 고통을 또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므로 다신 안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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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왓챠피디아 별점 : ★★★★★

테니스공에 자신만의 의지가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편의 테이스 명경기와도 같은 이 영화는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경쟁, 복잡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여러모로 관전 포인트와 해석할 여지가 많은 영화이지만 몇 가지 인상 깊었던 것들만 적어보려고 한다.

1. 두 남자의 관계

타시를 처음 본 날 패트릭과 아트는 자신들의 호텔 방으로 그녀를 초대해 사춘기 시절 옆 침대에서 함께 자위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날 처음 만난 썸녀에게 들려주기에는 다소 아스트랄한 썰이지만 타시는 둘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이고, 세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이 장면은 아트와 패트릭의 관계가 우정으로 포장된 것보다 훨씬 섹슈얼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린 타시는 두 사람을 일부러 키스하게 만들며 그 장면을 재미있다는 듯 가만히 지켜본다. 이후 패트릭이 타시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트가 보인 반응도 의미심장하다. 아트는 자신의 짝사랑 상대와 섹스를 한 패트릭을 단순히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자신을 빼놓고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서운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니까 '질투'가 아니라 '서운함'인 것이다.

구아다니노 감독의 전작은 남자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고 나는 이 영화도 전작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 작품 역시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지만, 타시라는 여성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작과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 사람의 관계는 셋 중 하나만 빠져도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테니스 경기와 닮은 점이 많다.

테니스 경기가 라켓을 든 두 선수(아트와 패트릭) 그리고 테니스공(타시)이 있어야 진행될 수 있듯이, 두 남자의 감정도 타시라는 여성을 가운데에 두고서만 진행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완벽한 이성애자로 묘사되는 젊은 스포츠맨 두 명이 과연 서로에게 우정 이상의 뭔가를 느끼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두 사람이 자신들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자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줄기차게 모호한 관점을 제시하며 관객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테니스 공처럼 둘 사이를 오가는 타시는 아트와 패트릭에게 우정을 넘은 우정, 경쟁심을 넘은 경쟁심, 열정을 넘은 열정을 유발하는 강력한 촉매다. 타시를 가운데 두고 경쟁하며 화학 반응처럼 감정을 불태우는 두 남자의 관계는 우정보다는 차라리 사랑에 가까워 보인다.

2. 타시의 역할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나는 끝내주는 테니스 경기를 보고 싶을 뿐이야"

극 중 타시는 머릿속에 테니스밖에 없는 테니스의 화신이지만 정작 자신은 리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완벽한 경기력을 향한 타시의 열정은 꺼진 적이 없건만 그녀는 오직 남편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 "네가 경기에서 지면 너를 떠날 거야" 라고 말하며 간접적인 방식으로 아트를 압박할 수 있어도 그가 억지로 테니스를 계속하게 만들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타시는 누군가가 잡고 튕겨서 코트 위로 넘겨주기를 기다리는 테니스공이다. 물론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공이 아니라 라켓을 들고 자신의 의지로 경기를 좌우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그녀를 완벽한 테니스공으로 만들기 위해 감독은 타시의 무릎을 꺾어버리고 만다. 부상을 입고 은퇴한 그녀는 타자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방식으로만 경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두 남자 중에서 테니스에 좀 더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아트를 자신의 투사체로 최종 선택한다. 하지만 타시는 그녀 대신 코트 위를 뛰어줄 사람을 필요로 할 뿐이며 이 사실을 타시도 알고 아트도 알기에 결혼 후에도 둘의 관계는 작은 충격에도 깨질 듯 위태롭고 불안하다.

3. 아트의 감정

하지만 도리어 아트에게는 이렇게 연약하고 한치 앞도 모르는 관계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아트는 타시를 숭배하고 존경하며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원치 않는 선수 생활까지 계속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아내에게 가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흔히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이상적인 여성상에게 가지는 경외심에 가까워 보인다. 'love'가 아니라 'worship'인 것. 경기 전날 아트가 타시에게 잠들 때까지 자신을 안아달라고 말하며 취하는 자세도 유럽의 종교화나 조각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안긴 예수의 자세와 비슷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 어쩌면 지금도 그 친구를 사랑할지도 모르는 여자.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 테니스를 그만두는 순간 자신을 떠날지도 모르는 여자. 아트는 이렇게 타시를 자신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는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존재로 끊임없이 우상화하며 결혼 후에도 타시에 대한 욕망을 잃지 않는다. 그가 그녀를 지속적으로 욕망하는 이유는 그녀가 그에게 결코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상화를 그만두는 순간 그는 아주 쉽게 그녀를 놓아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4. 돌풍의 의미

극 중 광고판에 등장하는 '게임 체인저스'라는 문구는 아트와 타시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타시는 테니스에 의욕을 잃은 남편 아트를 승리하게 만들어 진정한 게임 체인저스가 되고자 결승전 전날 패트릭을 찾아간다. 패트릭은 다음날 경기에서 의도적으로 패배해 주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하지만, 막상 타시가 "내일 네가 져 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지?"라고 묻자 "너는 알 수 없지"라고 대답한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차 바깥에는 엄청난 돌풍이 몰아치고 있다.

바람은 야외 테니스 경기에서 가장 큰 변수다. 그 어떤 대단한 선수 군단을 데려와도 폭풍 속에서 경기를 진행할 수는 없다. 경기 전날 몰아친 돌풍을 통해 감독은 진정한 '게임 체인저스'가 무엇인지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패트릭을 찾아가게 만든 것은 타시의 욕망이었다. 그런 타시와 거래를 하게 만든 것도 패트릭의 욕망이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의 복잡한 마음은 타시와 패트릭처럼 부정행위를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이토록 불완전하고 복잡한 마음이 만들어 내는 반전의 드라마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챌린저스 리그 결승전 전날 몰아친 돌풍을 통해서 예측 불가한 자연, 즉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한치 앞도 모르는 승부야말로 스포츠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5. 마지막 경기

챌린저스 결승전 당일. 경기의 승패를 손에 쥐고 있는 패트릭은 여유를 부리고 옛 친구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트는 그런 그의 태도에서 이상 신호를 감지하며 긴장한다. 관중석에서 둘을 지켜보는 타시 역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팽팽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최고조에 이르게 만드는 건 패트릭의 핸드 사인이다.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나는 걔랑 잤어'를 뜻하는 사인. 이 수신호를 단번에 알아본 아트는 평정심을 잃고 욕설을 내뱉는다. 한술 더 떠서 패트릭은 타시와의 약속을 암시하듯 일부러 실수를 저지르며 아트를 도발하고, 아트는 그의 도발에 휘말려 점점 더 분노한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적 긴장감이 폭발하는 바로 그 순간, 아트는 네트를 넘어가 패트릭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대신 그를 향해 조용한 미소를 보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 둘 다 걔랑 잤으니까, 다시 무승부로 돌아갔네.' 패트릭도 미소를 짓는다. 이 시점에서 둘의 전적은 테니스 식으로 말하자면 '듀스'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시간.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 마치 둘 사이에 타시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처럼. 우정과 경쟁과 승부만이 존재했던 그때 그 시절처럼. 아트와 패트릭의 거리는 예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듯 조금씩 가까워지고 마침내 두 사람은 코트 중앙에서 서로를 끌어안는다. 이제 둘 사이에는 거리도 없고, 타시도 없다. 오직 라켓을 든 두 남자와 땅에 떨어진 테니스공 뿐이다.

6. 타시의 환호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세 사람 중에서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트가 미소를 짓는 순간 패트릭과 아트 사이에는 더 이상 타시가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소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그 순간 마침내 자신의 진짜 자리를 찾아 원하는 것을 얻는다.

타시는 테니스가 '관계'라고 믿는 인물이다. 세 사람의 사랑을 테니스 경기에 빗대어 볼 때, 처음에 타시가 반했던 건 아트 또는 패트릭이라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타시가 원했던 것은 아트와 패트릭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형의 사건(=경기=관계)이었다. 그냥 관계가 아니라 아주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관계를 원했고 그녀의 심장을 힘껏 뛰게 만들 테니스 명경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면서 타시가 매료됐던 사건은 사라져 갔고, 그녀의 불만족도 함께 커져갔다.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 그녀는 공처럼 두 사람 사이를 오가기도 했지만 사실 불만족은 사람인 그녀가 공의 역할을 하게 된 데서 왔기에 그런 식으로는 절대 채워질 수 없었다. 그녀는 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코트 위에 설 수 없다면 차라리 관중석에 앉아서 완벽한 몰입감과 일체감을 선사하는 '끝내주는 경기'를 지켜보고 싶었다. 애초에 사람이란 관중은 될 수 있어도 공은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아트와 패트릭 사이에서 그녀가 사라지고 실제 테니스 공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순간 타시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만족스러워하며 두 남자를 향해 환호를 보낸다.

7. 결론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성을 향유하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성의 향유는 한쪽 성의 착취를 전제로 한다. 또한 폴리아모리는 인간의 판타지를 담은 용어일 뿐 삼각관계에서는 어느 쪽이든 감정적으로 소외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감정적, 육체적으로 섹슈얼하고 건강한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작품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정말로 아름답고 건강하게 잘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이자 스포츠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구아다니노 감독은 남자라는 존재를 진짜 엄청 많이 무지막지하게 사랑하는 것 같기에 이 감독의 다음 작품에는 또 얼마나 멋진 남자들이 잔뜩 나올지 정말이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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