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영화의 주요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판 1 : 수다쟁이 빌런 디멘투스로 인해 흐릿해져 버린 퓨리오사의 서사

입 터는 게 얼마나 짜증났으면 혀를 잘라쓰까

 
<퓨리오사> 촬영 기념품으로 무엇을 가져갔냐는 질문을 받은 안야 테일러 조이

안야 테일러 조이: 저는 퓨리오사의 기계 팔을 집에 가져갔어요. 하지만 사실 정말로 원하는 기념품은 따로 있었죠. 밀러 감독님은 제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영화에 넣을 씬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저를 위해서 그 장면(퓨리오사가 디멘투스의 혀를 자르는 장면)을 찍어주셨고, 소품팀은 기념품을 집에 가져갈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게 뭐냐면, 바로 크리스의 혀예요.

인터뷰어: (경악)

안야 테일러 조이: 맞아요. 저는 크리스 헴스워스의 가짜 혀를 상자에 담아서 집에 가져갔어요.(웃음) 밀러 감독님은 저한테 "안야!" 라고 말씀하시더니,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인터뷰어: 그거 알아요? 이 일 하면서 촬영 기념품으로 집에 뭘 가져갔냐는 질문을 여러 번 해봤는데, 당신 대답이 제일 충격적이에요.

안야 테일러 조이: 정말 미안해요. 

인터뷰어: 대체 뭐에 대해서 사과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할 말을 잃었어요.

안야 테일러 조이: 그때는 그게 멋있어 보였어요!

 
조지 밀러 감독은 평소 좋은 영화란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드러내 왔다. 제작자의 취향을 반영하듯 매드맥스 월드의 주요 인물들은 말수가 적다. 샤를리즈 테론의 퓨리오사도, 안야 테일러 조이의 퓨리오사도 과묵하다. 멜 깁슨의 맥스도, 톰 하디의 맥스도 과묵하다. 심지어 후반부 시리즈의 주요 악역인 임모탄 조마저도 어느 정도 과묵함이라는 조지 밀러 감독의 미덕을 지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높은 톤으로 현학적인 대사를 끊임없이 내뱉는 디멘투스는 영화 내에서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고려하지 않아도 밀러 감독의 관점에서는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디멘투스의 어투는 현대식 호주 영어가 아니라 70~80년대 호주에서 사용하던 사투리, 특히 경마 해설자가 사용하던 말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헴스워스는 디멘투스의 어조를 만들어낼 때 자신의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오래된 호주식 말투를 많이 참고했다. 헴스워스의 할아버지 사투리 열전)
 

다들 헴식이만 좋아하고 우리 잭은 아무도 안 챙겨줘

 
다리 사이에 곰인형을 소중하게 매달고 다니는 거구의 악당 디멘투스는 매력적인 빌런이다.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호주 출신 할리우드 스타가 그를 연기했다는 점도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만든 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할 중요한 요소였다. <퓨리오사> 포스터에서도 디멘투스와 그녀의 관계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디멘투스라는 악당 캐릭터 자체의 매력을 잠깐 옆으로 치워놓고 원론적인 질문을 한 번 던져 보자. 과연 그는 <퓨리오사>에 반드시 등장했어야 하는 인물일까?


<분노의 도로>가 개봉된 직후 샤를리즈 테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도 임모탄 조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로 한 거죠.” 테론의 말처럼 초기 설정에 따르면 퓨리오사는 원래 임모탄 조의 아내들 중 하나였지만 불임 때문에 밀려난 뒤로 궂은일을 하며 살다가 사령관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팔 역시 시타델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절단되었다는 설정이었다.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의 엔딩이 정확하게 <분노의 도로>와 이어진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며, 자신이 영화를 만들 때 두 영화가 마치 한 편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한다. 그런데 감독의 의도대로 퓨리오사와 분노의 도로를 이어서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체 임모탄 조가 퓨리오사에게 뭘 잘못한 거지?’ 

 
물론 임모탄 조가 빌런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노의 도로>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는 자들에게서 탈주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다. 인간을 상품화해 사용하는 권력자 집단의 중심에는 임모탄 조가 있다.


임모탄 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없더라도 퓨리오사에게는 아내들을 데리고 시타델을 탈출할 만한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일단 아내들 자신이 임모탄 조의 소유물로 사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굳이 죽일 만큼 깊은 원한과 증오심을 가질 이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녀를 녹색의 땅에서 납치한 것도, 그녀의 어머니를 추격 3일 만에 죽게 만든 것도, 스승이자 동료였던 잭을 죽게 만든 것도, 심지어 그녀의 팔을 잘리게 만든 것도 모두 임모탄 조가 아닌 디멘투스의 짓이니까 말이다.

 
<분노의 도로>에서 시종일관 과묵한 퓨리오사가 영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임모탄 조를 죽이기 직전에 던지는 임팩트 넘치는 대사, “나를 기억하나?”는 디멘투스의 등장으로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원수는 임모탄 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임모탄 조는 원수에게서 그녀를 구해줬으며, 40일 전투를 통해 디멘투스 일당을 모두 소탕하며 이이제이 형식으로나마 복수에 도움을 주었던 존재다.
 

모딴이는 억울행

임모탄 조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퓨리오사의 탈주는 자신이 가장 인정하고 믿고 있던 존재가 자신의 보물인 아내들을 훔쳐서 달아난 꼴이다. 물론 말이 좋아 아내나 보물이지 사실상 성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인 데다, 결정적으로 그의 '보물'들은 보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퓨리오사의 대사가 가진 날카로운 울림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임모탄 조와 그녀 사이에 얽힌 보다 복잡하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인 사연이 필요했다.

 
화려한 액션 연출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밀러 감독이 이런 중요한 서사적 맥락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건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특히 "리멤버 미?" 가 퓨리오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중요한 대사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녀의 과거를 조망하기 위해 나온 프리퀄 영화에서는 퓨리오사가 이 대사를 내뱉기까지의 사연을 훨씬 무겁고 신중하게 다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판 2 :  묵시록의 검은 천사...뭐라고?

 
그 외에도 이 영화의 허술한 부분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극 중에서 임모탄 조의 아들이자 소아성애자임이 암시되는 릭투스의 검은 손을 피해 도망쳐 나온 어린 퓨리오사를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적들의 코앞에서 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어딘가 말이 되지 않게 느껴진다. <퓨리오사>를 보는 사람들이 이런 설정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영화가 왜 이렇게 허술하냐고 지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의 수많은 허술함은 이 영화가 ‘SAGA’ 즉 서사시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조지 밀러 감독은 <오뒷세이아>나 <일리아드> 같은 고대 영웅 서사가 그렇듯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을 다룬 이야기에서도 여러 가지 의문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신비로운 상태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퓨리오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주변 인물들은 그녀가 여자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디멘투스에게서 데리고 온 어린 소녀라는 걸 알았을까 등등.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가 디멘투스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조차 감독은 화면을 통해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애매하게 처리한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를 즉결 처형했을까? 아니면 디멘투스가 잭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사슬에 매어놓고 죽을 때까지 황무지를 끌고 다녔을까? 또는 디멘투스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형틀에 매달아서 원없이 고문했을까? 전부 다 아니라면, 역사가의 마지막 나레이션처럼 시타델 바위산 위 어느 깊은 곳에는 퓨리오사가 살아 있는 디멘투스를 양분 삼아 심어놓은 복숭아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은 끝까지 진실을 알 수 없다. '전설'이란 바로 그런 거니까 말이다.

 
물론 역사가가 이렇게 말하기는 한다.

 
"나는 퓨리오사 자신에게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조차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진다. '자신만이 영웅 퓨리오사의 진실을 알고 있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역사가의 나레이션은 마치 리라를 연주하며 영웅 설화를 읊는 후대의 구전 문학가가 자신은 영웅 본인에게서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으며, 따라서 이 전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자신뿐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듯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퓨리오사>의 이야기 진행 방식은 그다지 친절하지도 디테일하지도 않다. 많은 생략과 모호한 여지를 남기는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을 어색하게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연출에는 고대 그리스 대서사시 못지않는 ‘퓨리오사의 황무지 대서사시’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듬뿍 담겨 있다. 의도된 연출은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적어도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정말 거슬렸던 것은 허술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영화의 몇몇 대사였다. 전쟁에서 패해 도주하는 디멘투스를 직접 잡으러 가는 퓨리오사를 보며 임모탄 조의 막내아들인 스카브로스가 "저건 대체 뭐지?"라고 질문하자 역사가가 이렇게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검은 천사, 묵시록의 다섯 번째 기사."

 
도대체 이 대사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애써 찾아보지도 않았지만, 만약 이 말의 의미를 반드시 찾아봐야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의미 전달에 실패한 대사다. 게다가 영화의 맥락상으로도 이 대사는 그것을 말하는 인물부터 말하는 투까지 모두가 이상하다.

 
이야기 진행상 퓨리오사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관객인 우리보다도 더 드문드문 상황을 지켜보았을 뿐인 늙은 역사가가 어떻게 그 순간 그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그놈의 다크 엔젤이라는 게 그녀의 본질이 맞긴 하다면) 그런 멋들어진 대사를 사실 중이병 대사를 날릴 수 있었을까? 그는 무당도 마법사도 초능력자도 아닌, 그저 사라진 세계의 지식을 뇌의 회백질과 피부 껍데기 위에 간직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언어에 힘을 실어 주는 무력한 인물에 불과한데 말이다.

 
두 번째이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주범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결정적인 대사는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네가 과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이 대사의 위화감은 황무지 세계가 사실 전부 조지 밀러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몰라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매드 맥스>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에게 밀러 감독이 설파하는 ‘이야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이야말로 이 시리즈가 그 자체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라는 증거다.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며, 자신도 실재하는 존재라고 굳게 믿는 채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적어도 조지 밀러는 디멘투스가 문제의 대사를 내뱉기 전까지는 그렇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위의 대사를 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라는 장편 영화의 한 장면이고 더 나아가 오십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매드 맥스>라는 시리즈물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원치 않게 의식하게 된다. 말 그대로 이야기 속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 속 인물들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마무리. 아무튼, 그럼에도 '조지 밀러'

톰 하디가 닉값(hardy)하며 인간 단호박이 되는 장면은 9:50부터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분노의 도로>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 칸 영화제 기자 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주인공인 톰 하디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자: 톰 하디, 제게는 다섯 명의 여자 형제와 아내와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계시죠. 세상에 엄마 없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저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outgun by estrogen)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매드 맥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영화에 왜 이렇게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나요? 저는 이 영화가 남자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톰 하디: 아뇨. (청중 웃음) 조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식셀 여사님 '3000년의 기다림' 주인공 닮으심(서사 하나 뚝딱)

 
좌중을 웅성거리게 만든 이 질문은 무례했을뿐더러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작업 과정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간담회 자리에는 퓨리오사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뿐만이 아니라 <분노의 도로>의 편집자이자 후에 <퓨리오사>를 작업하게 되는 인물이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조지 밀러의 아내이자 <분노의 도로>로 아카데미 편집상을 받은 마거렛 식셀이다.
조지 밀러 감독이 한 번도 액션 영화를 편집해 보지 않은 식셀에게 '<분노의 도로>는 다른 액션 영화와 다르다'라고 말하며 편집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영화 편집 작업에 대한 그녀의 애정 어린 인터뷰를 추가로 보고 싶다면 다음 링크 참조)

 
"세상에는 여성이 액션 영화를 편집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스타워즈를 보고 자란 여자아이들로 인해,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바뀌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기조는 변할 거고, 사실은 이미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가렛 식셀, 오스카상 수상 인터뷰에서

 
<퓨리오사>가 개봉했을 때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여성주의 계열의 비판이 눈에 띄었다. 여성이 주인공인 건 좋지만 이 영화에서 퓨리오사는 남성에게 지나치게 종속적인 모습이다. 퓨리오사는 대체 왜 머리를 자르지 않는 걸까. 왜 그녀는 '보다 중성적'이고 '덜 여성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걸까.

 
정작 조지 밀러 자신은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가 페미니즘 영화냐는 질문에 대해 특별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한결같다. 위에서 소개한 <분노의 도로> 칸 영화제  기자 간담회에서 사회자가 '<분노의 도로>를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 있나'하고 질문하자 조지 밀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부터 페미니즘 사상을 담은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매드 맥스> 시리즈와 비교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을 더욱 확장시키고 싶었는데, 여기서 추격당하는 건 단순히 어떤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아내가 그렇게 나타났죠. 그들에게는 함께 싸워줄 전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한 남자로부터 아내들을 탈출시키는 인물이 다른 남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퓨리오사라는 인물을 만들었죠.  모든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발전해 나갔던 겁니다.

 
한편 맥스라는 인물은 떠돌이 들개 같은 인물입니다. 덫에 걸린 채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야생동물 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퓨리오사와 맥스를 붙여 놓으면 처음에는 서로를 죽이려고 들 겁니다. 그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존중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분노의 도로>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의 뼈대를 올려놓으면 이런 이야기가 전부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거죠."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여성 서사로 느껴지고, 누군가에게는 모자란 여성 서사로 느껴질 수도 있는 <퓨리오사>는 분명 부족한 점이 많은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영화가 끝내준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어째서 끝내주는지 길게 썼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작품의 가장 끝내주는 점은 이런 이야기에 절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데 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도 그것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허공에 대고 외치는 의미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본질은 카체이싱 액션 영화. 1945년생 조지 밀러 감독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자동차 액션 장르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지치지도 않고 한 가지 이야기를 끈질기게 늘어놓는다. 차가운 기계의 세계에서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과 우정과 연민과 연대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죽음의 씨앗과 생명의 씨앗

 

매드맥스의 세계에는 두 종류의 씨앗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심는 씨앗인 '총알'이다. 총알이라는 두 번째 씨앗의 존재가 극 중에서 드러나는 건 <분노의 도로>에서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 중 하나인 '치도'가 아내들의 리더였던 '스플렌디드'의 말을 인용하면서다.
 

"스플랜디드는 총알이 죽음의 씨앗이라고 했어. 씨앗 하나를 심을 때마다 누군가를 죽이는 거지."

 
조지 밀러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매드 맥스의 세계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두려운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모든 것이 붕괴한 세계"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매드맥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겉으로는 사막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막(Desert)'이 아닌 '황무지(Wasetland)'라고 불리는 공간이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래 사막이 아니라 한때 문명이 존재했다 사라져 황폐해진 땅 말이다.

 
이 황무지에서 총알이 씨앗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들은 영화 곳곳에 존재한다. 먼저 '무기 농장(Bullet farm)'이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이 농장의 생산품은 채소와 곡물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총알이다. 무기 농장에서 생산된 총알을 전투 트럭에 싣는 방식 역시 오늘날 대형 농장에서 밀이나 옥수수 같은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렇게 생산된 수천 수만 개의 '죽음의 씨앗'들은 스플렌디드의 말처럼 살아있는 존재의 피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생명을 빼앗는다. 흙 속에 심은 씨앗이 생명 하나를 탄생시키듯이 말이다. 모든 과정이 반대일 뿐이다.

 
한편 <퓨리오사>에서 퓨리오사는 어린 시절 고향 땅에서 가져온 단 하나의 유산인 복숭아 씨앗을 머리카락과 입속에 감춰놓고 자신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그 씨앗을 보여준다.


<분노의 도로>에서 살아남은 부발리니 일족의 여인 역시 오염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향 땅에서 채종한 마지막 씨앗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언젠가 이 씨앗을 다시 땅에 심을 순간을 꿈꾼다. 즉
매드 맥스의 세계에서 인간은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생명의 씨앗을 심는 사람과 죽음의 씨앗을 심는 사람으로.


2. '매드 월드'의 또 다른 의미


 
총알이 씨앗의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매드 맥스의 황무지 곳곳에서는 생명이 비생명의 자리를 대신하고 삶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죽음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이 모두 사라져 살아있는 인간의 피부를 책 대용으로 도구화해 사용한다. 어린 소년들은 워보이라 불리며 총보다 더 손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전쟁터 소모품 취급을 받는다. <분노의 도로>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맥스는 철저하게 도구화되어 전쟁 무기인 워보이를 위한 '피 주머니' 취급을 당하는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이 세계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추구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는 임모탄 조가 만들어낸 카고 컬트적 종교다. 황무지 이전 세계에서도 종교는 제도와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만 적어도 신 그 자체만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무지에서는 숭배와 동경의 대상인 신의 자리마저 V8이라는 자동차 엔진으로 대체된 상태다.


차가운 금속의 모습을 한 새로운 신을 섬기는 자들의 목표도 영생이나 부유한 삶 따위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다. 이 종교의 숭배자들은 하루빨리 죽어서 '발할라'라는 전사들의 왕국으로 가고 싶어 한다.

 
이런 세계에서 생명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생명은 이미 방사능과 각종 화학 물질에 오염되어 워보이처럼 '반쪽자리 삶(half-life, 방사능의 반감기라는 말을 이용한 말장난)'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임모탄 조의 세 아들이다. 머리는 뛰어나나 몸이 자라지 않은 첫째 아들, 체격은 건장하나 폐와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 잔혹성을 조절하지 못하는 광인인 셋째 아들.


세 아들 중 두 아들에게는 남성의 성기를 조롱하는 비속어가 이름으로 붙여져 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대지를 뜻하고 남성이 씨앗을 뜻한다면 임모탄 조의 '오염된' 아들들은 생명을 생산하는 능력을 상실해 태생부터 죽어버린 씨앗인 셈이다.


이처럼 매드맥스의 '미친' 세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죽음이 생명의 자리를 대신한 세계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에서 다양한 상징을 통해 수차례 암시되었던 이 뒤집어진 세계의 본질은 <퓨리오사>의 후반부에서 마침내 빌런인 디멘투스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디멘투스는 말한다. 퓨리오사와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며, 캄캄한 슬픔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리고 이 말은 <매드 맥스 2>의 초반부에 흘러나오는 맥스에 대한 내레이션인 "엔진의 으르렁거림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되었다. 잿더미만 남아서 황폐해진 인간이, 과거의 악령들에게 쫓기며 황무지를 떠도는 인간이 되었다."는 대사와 연결된다.


3. 중력에 굴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맥스와 디멘투스, 퓨리오사는 모두 같은 시작점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이 살아온 익숙한 세계를 강제로 상실함과 동시에 소중히 여겼던 존재들을 영영 잃어버렸다. 그들은 상실된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환과 후회에 쫓기며 길을 잃은 아이와도 같은 모습으로 황무지를 방황한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두 가지 길이 있다. 히어로의 길과 빌런의 길. 매드 맥스 월드에서 이 말은 '생명의 씨앗을 심는 자가 될 것인가, 죽음의 씨앗을 심는 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죽은 자
모두에게서 도망 다니고 있다.

약탈자들에게 쫓기고,
내가 구하지 못한 자들의
망령에 시달린다.


-맥스 로카탄스키, <분노의 도로>-


 
<분노의 도로>의 시작점에서 맥스는 자신을 쫓아오는 과거의 망령에게 끊임없이 시달린다. 삶의 의미를 잃고 과거의 잔상에 시달리며 황무지를 떠도는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디멘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다만 맥스는 구체적인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한편, 디멘투스가 잃어버린 가족들을 회상하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디멘투스라는 이름도 '기억상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맥스는 얼마든지 디멘투스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급의 괴력과 생존력을 가진 그가 약탈과 살인을 업으로 삼거나 자신의 일당을 모아 지배자로 군림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실행에 옮기는 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맥스가 어째서 디멘투스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글의 말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퓨리오사 역시 얼마든지 복수심에 비뚤어져 빌런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녀를 죽음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는 <퓨리오사> 영화 곳곳에 나타난다. 영화 속에서 퓨리오사는 두 차례에 걸쳐 시타델의 지하 세계와 연결된 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곳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을 번뜩이는 노파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노파는 말한다. "가지 마, 너는 이곳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어." 노파의 말처럼 구덩이 속에는 마침내 평안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널브러진 채 썩어 가는 자신의 살로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키운다. 그 구더기는 시타델 사람들의 영양 공급원이 된다. 그러니까 이곳은 죽음의 부산물로 산 자를 먹이는 황무지의 농장인 것이다.


시타델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구더기 농장을 지키는 노파는 마치 지옥의 문지기와도 같은 모습으로 퓨리오사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라고. 여기서 노파의 손짓은 단순히 구더기의 먹이가 되라는 유혹이 아니라 퓨리오사가 산 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모든 괴로움과 복수심과 원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디멘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캄캄한 슬픔에 굴복해 무감각한 존재가 되라는 유혹이기도 하다.


이 장면이 특히 의미심장한 이유는 퓨리오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력을 거슬러 시타델이라는 고층 도시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공간적 배경인 시타델을 중력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과거 권력자들이 높은 성체를 지어 그 안에 거주했던 건 그 자체로 권력이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오늘날에도 고층 건물에 산다는 건 부와 권력을 의미한다. 물론 달동네처럼 두 발로 힘들게 걸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힘으로 손쉽게 올라가는 고층이어야 하겠지만. 그러니까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퓨리오사의 시도는 이 세계의 권력을 탈환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내에서 중력을 거스르려는 퓨리오사의 시도는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어린 퓨리오사는 자신을 지하 세계로 끌어내려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려는 중력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지상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녀는 탈출을 꿈꾸지만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갈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퓨리오사의 목표는 중력과 동행하며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수평적 탈출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세 번째 단계에서 마침내 중력에 저항해 시타델이라는 고층 도시를 탈환하는 수직적 이동을 시도한다.


물론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 치하의 시타델에서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가졌기에 이미 고층 세계에 자신의 자리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궁극적인 꿈은 지상 사람들에게 고층의 권력자들이 소유한 재화를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퓨리오사는 '독재자'인 임모탄 조보다는 '대중 선동가'인 디멘투스에 가까운 지도자다. 따라서 디멘투스가 퓨리오사를 후계자로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화 <퓨리오사>에서 디멘투스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화려한 언변으로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니지만 결국은 지도자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인 사회 질서와 치안 유지에 실패하는 인물이다. 이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시타델을 민중에게 되돌려 준 퓨리오사가 어떤 식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물자를 분배하며 질서를 유지해 나갈지 궁금해질 것이다. 일단 그녀는 아주아주 과묵하므로 디멘투스와는 확실히 다르겠지만..


4. 도달 불가능점에 도달하려는 어린 영웅의 실패담 - 퓨리오사의 이야기

 
퓨리오사, 그녀는 머리카락에 씨앗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녀는 태생부터 죽음의 씨앗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지키는 존재였다. 퓨리오사의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그녀에게 '녹색의 땅을 찾아서 그곳에다 이 씨앗을 심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오랫동안 퓨리오사의 머릿속에서 녹색의 땅은 오로지 고향 땅만을 의미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고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기에, 퓨리오사는 더더욱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지 밀러 감독은 그 어떤 절박한 시도라도 결국은 실패하게 될 거라는 것을 못 박아 둔 채로 퓨리오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감독은 그녀의 고향인 '녹색의 땅'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퓨리오사는 모르지만 <퓨리오사>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쳅터 제목을 통해서 그 이름이 무엇인지 이미 전해들었다. 그건 바로 '도달 불가능점'이다.

 
도달 불가능점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퓨리오사는 도달 불가능점인 자신의 '이상'과 황무지의 모습을 한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퓨리오사> 영화 내내 그녀는 타협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있는 디멘투스를 양분으로 삼아 시타델의 바위틈에 복숭아 씨앗을 심어 기르는 장면은 마침내 그녀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점을 발견해 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분노의 도로>에서 그녀가 고향 땅이라는 이상 속 유토피아를 포기하고 시타델이라는 현실 속 '녹색의 땅'으로 돌아와 그곳의 리더가 되리라는 결말을 미리 예고하기도 한다.

 
퓨리오사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침내 긴 머리를 자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퓨리오사를 연기한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는 긴 머리카락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퓨리오사의 희망을 상징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처럼 식물의 줄기를 닮은 그녀의 긴 머리가 이상 속 세계인 '녹색의 땅'을 의미하는 상징이라면 그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리는 것은 퓨리오사가 마침내 이상 속 세계를 포기하고 황무지라는 현실에 뿌리내린 인물이 되기로 결심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는 희망을 포기한 것일까?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내뱉었던 것처럼, 황무지에 희망 따위는 없는 것일까? 디멘투스는 모든 존재의 모든 희망을 어떻게든 부정하는 인물이다. 퓨리오사가 '나를 기억하느냐'라고 물으며 두건을 벗고 그를 응징하는 순간조차 디멘투스는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한 동력은 희망이 아니라 증오였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결국 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존재라고 퓨리오사를 조롱한다.


퓨리오사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모래에 뒤덮인 얼굴 위로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만, 그녀가 결국 증오에 미친 복수의 화신이 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만의 희망을 가슴속에서 꺼트리지 않고 유지해 나갔는지 여부를 <퓨리오사> 영화만으로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디멘투스를 처치한 그녀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황무지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수년이 지난 뒤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가 맥스와 나누는 짧은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아내들을 가리키며) 저 여자들은?"
"그들은 희망을 찾는 거야."
"너는 무엇을 찾고 있지?"
"Redemption."

 
'Redemption'이라는 단어에는 '되찾음'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퓨리오사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한참 전 <분노의 도로>가 개봉했을 때 한국어 자막을 만든 번역가는 이 단어를 '구원'이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때는 이 해석이 나름대로 타당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퓨리오사>가 개봉되면서 사실 이 단어의 진짜 의미는 '구원'보다 '되찾음'에 가까운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외에도 이 번역가는 영화 마지막 장면의 'The First History Man'을 '최초의 인류'라고 해석했는데, 적어도 재개봉된 <분노의 도로>에서는 '최초의 역사가'라는 올바른 의미로 자막을 고쳐서 내보냈어야 했다. 덕후는 이런 게 굉장히 신경쓰인다구여◔_◔)

 
그러니까 나에게서 빼앗아간 것들을 되돌려 놓으라고 디멘투스를 향해 고통스럽게 절규하던 안야 테일러 조이의 어린 퓨리오사는 샤를리즈 테론의 성숙한 퓨리오사가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를 바라며 분노의 도로를 여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무언가'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자, 사랑했던 존재들이자, 넓은 의미에서는 그녀가 대표하는 성별인 여성들이 잃어버린 생명이 넘치던 황무지 이전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분명 이 시점까지도 퓨리오사는 여전히 '도달 불가능점'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자신이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장소를 사실은 이미 지나쳐 왔음을 알아차린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진실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한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 왔던 이상 속 유토피아는 이미 오래전에 모래에 파묻혀 황무지, 즉 현실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토피아의 진짜 뜻은 사실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은 결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퓨리오사는 '무언가'를 되찾을 수 없다. 그녀의 마음 속 가장 어두운 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 진실은 강인한 그녀를 주저앉아 울부짖게 만들 만큼 거칠고 잔인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인간이 어른이 되기 위해 일생에서 한 번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5. 망가진 세계를 가로지르는 분노의 도로, 그 주인은 누구인가

 

그래서, 누가 세상을 망쳤지?

- 스플렌디드 앙하라드, <분노의 도로>-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의 주요 빌런인 임모탄 조는 엄밀하게 봤을 때 세상을 망가트린 주범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야기는 알레고리(allegory)다"라는 신념을 가진 조지 밀러 감독이 창조해 낸 캐릭터답게 그는 세상을 망친 자들의 여러 특징을 한데 모아놓은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일단 그는 군인 대령 출신으로, 이전 세계의 질서가 모두 무너진 새로운 세계에서도 약한 자들을 모아 그들의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기를 원하는 존재다. 이는 이전 사회에서 경찰이었던 맥스가 자신이 지킬 것이 전부 사라져 버린 황무지 세계에 절망한 나머지 '미친 맥스'가 되어 방랑하기를 자처하거나, 군인이었던 근위대장 잭의 부모가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도 대의를 갈망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군인과 경찰이라는 직업군에게 사회를 '지배'하고 '보호'한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면 맥스와 잭은 보호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의미하고 임모탄 조는 지배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부하들 가운데 하나인 '식인종(People Eater)'는 황무지 이전 세계에서 은행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플 이터라는 이름도 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다기보다는 그가 음식을 집어삼키듯 사람들을 빨아들여서 노동력을 뽑아내는 사회 지배층의 일원이었음을 암시한다(물론 황무지에서는 사람도 얼마든지 먹을거리가 된다. 일례로 생체기술사는 어린 퓨리오사의 피를 뽑아서 디멘투스에게 소시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임모탄 조의 또 다른 부하인 '무기 농부'는 죽음의 씨앗을 생산하는 농장의 지배자로, 입속에 이빨 대신 총알을 박아 넣을 만큼 무기와 전쟁에 매료된 전쟁광이자 죽음의 화신이다.

 
임모탄 조가 자신의 혈통에 기이하리만큼 집착하는 것도 임모탄-아들바보=0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가부장제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퓨리오사>와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와 맥스 일행이 취하는 태도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퓨리오사는 <퓨리오사> 영화 말미에 "우리 모두가 결국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라도, 언젠가는 이 세계가 오염되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면서 임모탄 조의 아내들을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작중 불임으로 묘사되는 그녀가 자손 번식이라는 여성의 생물학적인 기능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극 중에서 '문화적 여성'으로서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는 건 그녀가 가진 이러한 의지 때문이다.

 
퓨리오사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생명의 재생산은 단순히 DNA 유전자 복제를 통해서 나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넘긴다는 일차원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손을 남긴다는 것은 내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나의 씨앗을 어딘가에 심어줄 사람을 남긴다는 뜻이다.
 

퓨리오사의 어머니가 어린 퓨리오사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근위대장 잭이 녹색 연막총을 쏘아 올린 뒤 무기 농장으로 차를 몰고 돌진했던 것처럼, 노쇠한 부발리니 여전사가 여행길에서 만난 젊은 여인들에게 씨앗이 담긴 가방을 넘겨주고 그녀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 씨앗을 심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나를 그대로 복제한 존재인지 - 임모탄 조가 집착하는 '건강한 아들'인지 또는 디멘투스가 찾아 헤매는 '리틀 D'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반드시 후손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임모탄 조와 디멘투스라는 두 빌런의 욕망은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소망보다는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영생을 이루겠다는 집착에 가깝다. 그러나 '죽음이 생명의 자리를 대신한' 이 미친 세계에서 지배 계층인 그들의 욕망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디멘투스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죽어 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암시하듯 작중에서 지배계층 남자들의 이름은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껍데기와 야욕을 묘사하고 있을 분이다. '사람들을 착취하는' 피플 이터, '전쟁에 미친' 무기 농부, 그리고 '불사의 존재가 되려는' 임모탄 조. 그나마 의미가 있는 이름을 찾자면 '전부 잊어버린' 디멘투스 정도가 있겠다.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들이 '스플렌디드 앙하라드(많은 사랑을 지닌 비범한 사람)', '토스트 더 노잉(아는 것이 많은 토스트)', '케이퍼블(유능한 사람)', '대그(재미있는 사람)','치도 더 프레자일(연약한 치도)'처럼 그녀들의 개인적인 성격과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다.

 
오히려 퓨리오사 일행에게 도움과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 죽은 세계의 껍데기만 남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그 어떤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들보다도 평범한 단음절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맥스, 잭, 그리고 눅스다(참고로 워보이 출신인 눅스는 셋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에 공식적인 의미가 있는 캐릭터다. 그의 이름은 '깨지지 않게 단단한 견과류'라는 뜻이다).
 

그리고 물론, 퓨리오사를 빼놓을 수 없다. '분노하는 자'. 감독은 그녀의 이름을 통해서 이미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선언했다. 분노의 도로(fury road)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은 임모탄 조도 디멘투스도 아닌 바로 퓨리오사라고. 망가진 세상에서 유년기를 빼앗기고, 어머니를 빼앗기고, 사랑을 빼앗기고, 팔을 빼앗긴 그녀가 분노할 때 바로 이 미친 세상은 변화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며 과거에 머물고 이상 속 세계를 꿈꾸던 퓨리오사가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 속 도시인 시타델을 '되찾기'로 결심한 순간, 그녀는 각성하며 '분노의 도로'의 진정한 주인이자 이 세계의 영웅으로 우뚝 선다.

 
 

6.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가 얻은 것

 
그렇다면 맥스는 어떨까? 처음부터 맥스는 분노의 도로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퓨리오사가 '분노의 도로'라는 국지적인 장소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맥스는 황무지 전체를 아우르는 인물이다. 퓨리오사의 여행은 시타델에서 종착지를 찾았지만 맥스의 여행은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이 험한 여정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넓은 의미에서 <분노의 도로>는 독재자에게 점령당한 시타델을 탈환하려는 영웅 퓨리오사의 모험담이지만, 이 큰 서사 안에는 떠돌이 맥스의 힐링캠프(!)라는 작은 서사가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 초반에 맥스는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모두 쫓기는' 상태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그는 이 미친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온전하고 선량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안 미친' 인물이지만,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점점 더 미친 사람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맥스는 <분노의 도로> 영화 중반부에서 퓨리오사에게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하지 못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맥스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에게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눈앞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맥스는 퓨리오사의 반복된 물음에도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시선을 피한다.

 
그랬던 맥스가 동행자들에게 마음을 여는 첫 장면은 달리는 차 위에서 임모탄 조의 아내인 스플렌디드가 용감한 모습으로 죽음을 피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 그는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녀와 눈빛을 교환한다. 맥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지는 것도 바로 이 장면에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발이 미끄러진 스플랜디드는 황무지의 모래바람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맥스에게는 또다시 악몽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그와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퓨리오사가 함께 소금 사막을 넘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며 예전처럼 황무지를 홀로 떠도는 '미친 맥스'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하지만 홀로 남은 그의 앞에 또다시 예전에 지키지 못했던 어린 소녀의 환영이 나타나고, 환영을 통해 자신이 눈앞의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맥스는 퓨리오사가 시타델을 '되찾아서' 진정한 의미의 'Redemption'을 이뤄내는 것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퓨리오사에게 자신의 '최고 품질 Rh-O형' 피를 수혈해 주는 순간은, <분노의 도로> 첫 장면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고 의료용품 취급을 받으며 억지로 피를 빼앗기던 맥스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되찾았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더 이상 맥스는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잃어버렸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자신이 현실에서 누군가를 지키고 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스는 기꺼이 퓨리오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내 이름은 맥스, 그게 바로 내 이름이야."
 

<매드 맥스> 시리즈에서 주인공 맥스가 들고 다니는 총인 더블 베럴 소드 오프 샷건은 원래 미국에서 술집 주인들이 샷건의 긴 총신을 반으로 잘라 카운터 뒤에 숨겨놓기 위해 만든 총으로, 공격이 아니라 자기 방어를 위해 고안된 무기다. 황무지 이전 세계에서 사회와 가정을 수호하는 존재였던 전직 경찰 맥스는 가정 방어용 샷건(Home Defense Shotgun)이라고 불리던 총을 들고 더 이상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허허벌판을 목적 없이 헤맨다.

 
맥스는 자신이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없다고 여기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한다. 그에게 이 세계는 만인이 만인에게 투쟁하는 세계,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지배당해 강자가 약자를 죽고 죽이는 세계다. 한때 그는 이 세계의 질서에 저항해보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으며 그때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버렸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현재의 '매드 맥스' 그러니까 황무지 세계의 질서에 기꺼이 순응하지도, 있는 힘껏 저항하지도 않는 떠돌이 맥스라는 인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맥스라는 인물의 본질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가 모든 혈액형에게 수혈할 수 있는 'Rh-O형' 피를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혈액형은 원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라는 맥스의 본질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가 실패를 겪든 말든 바뀌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잃고 떠돌던 맥스에게 자신의 이런 특성은 강제로 지고 가야 하는 무거운 십자가나 마찬가지였지만, <분노의 도로>를 겪은 맥스에게는 그렇지 않다.
퓨리오사를 도와 시타델을 되찾은 이 험난한 여정은 맥스에게 황무지에서 이뤄낸 값진 성공의 경험으로 남았다. 이 모험을 통해서 맥스는 자신이 원래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기억해 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황무지를 여행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힘과 지혜를 나누어주는 이름 없는 영웅으로 살아갈 것이다. 방황하는 떠돌이가 아닌 진정한 '로드 워리어' 즉 '도로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퓨리오사 3차 관람을 앞두고 잭 캐릭터에 푹 빠져서 배우 인터뷰란 인터뷰는 다 찾아보는 중인데, 그 중에서도 이 짧은 인터뷰가 아주 인상 깊었다. 새벽 4시에 동생한테 (냅다) 번역해서 카톡으로 보내준 김에 블로그에도 올린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인물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가 깊은 배우라는 걸 느낄 수 있는 답변이다. 촬영 중에 배우 교체 이슈가 있었다고 하는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닌 톰 버크가 잭 역할로 뽑혔는지 알 것 같았음. 스포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스포 주의!

 

 
Q. 근위대장 잭은 어떤 캐릭터인가?

A. 근위대장 잭은 전 생애를 시타델과 시타델 주변에서 보내는 인물이다. 그는 무기 농장과 가스 타운과 시타델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궤도를 빙빙 돌면서 끝이 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맥스의 잔상을 어느 정도 느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물리적으로 떠돌이였던 맥스와 달리) 잭은 어떤 제도화된 시스템 내부에 있는 외부인 - 아웃사이더 인 인사이드 - 이다. 그는 바깥 세상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아웃사이더이지만, 내부에 있는 외부인인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느낀 잭의 모습이었다.

 

 
Q. 근위대장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A. 근위대장이라는 직위는 공식적으로는 임모탄 조의 경호원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은 수행하는 임무에 따라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다. 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투 트럭을 모는 것이다. 그 일은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시타델의 직업들 중에서도 위험성이 특히 큰 일이이기도 하다.

 

잭이 퓨리오사를 만나기 위해서 분노의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장면은 시리즈의 오리지널 배우인 멜 깁슨의 시그니처를 오마주한 것이다.

 
Q. 퓨리오사를 처음 만났을 때 잭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A. 퓨리오사를 처음 만난 순간 잭은 그녀라는 개별적인 사람 안에 존재하는 어떤 섬광을 느꼈다.  퓨리오사는 단순히 번뜩이고 사라지는 섬광이 아니라 실체화된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는데, 처음에 잭은 그녀의 이런 생각을 뜬구름 같은 환영으로 여겼다. 그들이 서로 거래를 하고 그가 그녀를 도와 탈출을 위한 짐을 싸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서 환영을 쫓을 수 있는 자유를 얻는 행위이기도 했다.

 

 
Q. 잭과 퓨리오사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하는가?

A. 둘의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잭은 퓨리오사가 향하는 장소에 대해서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 장소를 찾는 걸 돕고 싶었다. 그리고 잭이라는 인물에 대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 영화 촬영을 시작할 때 이야기 나눴던 부분이기도 한데,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가 그녀와 함께 그 장소에 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궁국적으로는 한 인간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과도 같다는 점이다.

 

 
Q. 퓨리오사와 잭의 목표는 무엇인가?

A. 그들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다른 세상을 찾으려고 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두 사람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아주 흥미롭고 정직한 태도다.

 

 
Q. 퓨리오사가 어떤 캐릭터라고 생각하는지?

A. 그녀의 강인함 안에는 아주 연약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연약함 안에는 엄청난 강인함이 존재한다. 그건 아주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여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다.

영상 제목: 퓨리오사와 근위대장 잭 사이에는 연애 감정이 있었을까


*위 영상의 실제 출처는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 칸 영화제 언론 시사회 현장이다.

기자: 퓨리오사와 잭이 추격당하는 차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어땠는지 안야와 톰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대사가 전혀 없지만 관객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액션도 많이 나오죠. 그래서 저는 두 분이 그 장면을 처음 스크린에서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왜냐면 정말로 대단한 장면이고, 액션 뒤에는 엄청난 감정이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
일단 저는 우리 두 사람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Go Tom, Go!" 하고 외쳤죠! (웃음)

저희 두 사람은 조지 밀러 감독과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나눴어요.  둘 사이에는 당연히 연애 감정도 있었겠지만, 누군가가 지닌 이상에 대해서 깊은 믿음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런 사랑의 형태가 사람들 사이에서 잘 회자되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잭은 퓨리오사의 꿈을 사랑했어요. 고향 땅으로 자신을 데려갈 거라는 그녀의 약속과 사랑에 빠졌던 거였어요. 그녀의 외형이 어떤 모습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사랑을 지켜보는 건 아주 근사한 경험일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톰처럼 재능 있고 멋있는 사람이 연기할 때는 더더욱 그렇죠. 잭과 퓨리오사가 함께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대사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고 저는 느꼈어요.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아주 멋진 경험이었어요. 당신도 그랬나요, 톰?

 
톰 버크: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그건 바로 잭이 퓨리오사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와 한 팀이 되었다는 거예요. 잭은 그녀를 자기 동료인 블랙썸(Green Thumb의 반댓말로 원래는 식물을 잘 죽이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매드 맥스 세계관에서는 기계 수리공을 뜻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퓨리오사가 나타났어요.
 
안야 테일러 조이: 독 안에 든 쥐처럼 궁지에 몰린 채로요.
 
톰 버크: 맞아요. 독 안에 든 쥐처럼.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는 건 멋진 일이었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장면들이 최대한 부드럽게 여정의 일부가 되어 녹아들기를 바랐습니다. 단순히 영화적인 연출로 보이는 게 아니라요.
 
안야 테일러 조이: 제가 극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도 바로 이거예요. "It's Been a Hard Day."(퓨리오사에게 건네는 잭의 첫 대사) 실제로 그랬잖아요, 그 날은. 정말 힘든 날이었어요. (웃음)

*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들 정말 안정적인 선택이라 했어
돈 잘 벌고 명예로운 직업이니까 말야
그렇게 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거야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지

근데 이제 내가 공짜 조언을 해줄게
네가 뭘 먹고살지 결정할 때

변호사는 되지 말아요
하지 마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야

변호사는 되지 말아요
가차 없이
네 속은 썩어 문드러지게 될 걸

한국에서 인터넷 좀 해봤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수많은 장르에서 패러디를 만들어 낸 ‘변호사 되지 마세요’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프레첼 가게를 운영 중인 전직 변호사로, 그는 노래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인지 열과 성을 다해 토로한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뒷이야기가 존재한다. 이 곡을 부른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변호사 일을 하겠다며 프레첼 가게를 접고 자신을 고용해 줄 로펌을 찾아서 떠나버린다(!). 역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자영업이 제일 힘들다니까 그리고 매물이 된 프레첼 가게를 인수한 사람이 바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이자 경계성 인격장애 치료를 받는 중인 레베카다.

 

레베카: 세상에, 이렇게 큰 프레첼은 여기서 처음 봤어!

 
갑자기 웬 프레첼인가 싶지만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라고 여겼던 음식이 프레첼이었고, 레베카 자신도 프레첼을 좋아해서 가게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변호사를 그만둔 레베카가 새로 시작한 프레첼 가게인 ‘레베첼’에 생계유지 수단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그녀가 직원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이 장소가 얼마나 의미 있는 장소인지 저도 아니까요. 사장님의 꿈을 지키는 사람으로 선택받다니 기분이 좋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 가게요. 사장님이 꿈꾸던 일 아니었나요?”

“대체 왜 ‘레베첼’이 제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기 벽에 걸린 셔츠에 그렇게 쓰여있잖아요. ‘레베첼, 제 꿈을 한 입 베어무세요.’”

“그렇게 써놔야 사람들이 이 가게가 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프레첼을 한 개라도 더 살 테니까요. 안 그래요?”

 

 
그러자 직원은 레베카에게 묻는다.

 
“이 가게가 꿈꾸던 일이 아니라면, 사장님의 꿈은 뭔가요?”

 
직원에게 질문을 받은 레베카는 고민에 빠진다. 사실 그녀가 변호사를 그만두고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제작진은 그녀의 꿈이 무엇인지에 대해 드라마 초반부터 꾸준하게 암시해 왔다.


시즌 1 15화에서 조쉬가 자신이 아니라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인 발렌시아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베카는 자신의 인생에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에 좌절한 채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비행기 안에서 잠이 든 그녀는 꿈속에서 웨스트 코비나의 임상 심리사인 아코피온 박사를 만난다.

 
꿈속에서 아코피온 박사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말리 영감이 스크루지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그녀를 데리고 과거와 현재를 여행한다. 아버지가 그녀와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그 끔찍했던 날, 그녀가 대학에서 뮤지컬 동아리를 하면서 행복해하던 시절. 그러다 동아리에서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아 뮤지컬에서도 멀어졌던 시간들.

 

레베카: 그래요. 제가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런 게 어떻게 진정한 사랑이겠어요?
꿈의 유령: 사랑이 반드시 사람을 향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은 열정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레베카의 삶을 지탱해 왔던 것도
바로 그런 열정이었어요. 안 그래요?
레베카: 맞아요, 사는 게 힘들었을 때
뮤지컬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곤 했어요.
제 인생을 뮤지컬 속 노래들이라고 상상하면서 지냈죠.
꿈의 유령: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찾아와요.
알잖아요 레베카, 아마도 당신의 인생에는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 사랑을 당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걸 수도 있어요.
한쪽에서 열심히 뮤지컬 연습하는 학식 레베카(노래 개못함)

아코피온 박사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멍하니 듣던 레베카는 그녀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짜가 아니죠?”
“당연하죠, 우리는 꿈의 유령이니까요.”

 

씐나는 <꿈의 유령> 테마곡

 
꿈 속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가 자신의 무의식을 현실의 인물에게 투영한 결과물이다. 그녀가 자기 안의 해결책을 함께 탐색할 동료로 다정한 상담사의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현실에서는 박사님 말 잘 듣지도 않으면서 '꿈의 유령' 에피소드는 레베카가 이미 문제의 해결책을 마음 어딘가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무의식 안에 있을 뿐이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꿈의 유령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최종화에서 다시 레베카의 앞에 나타난다. 이제 경계성 인격장애를 거의 치료하고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게 된 레베카의 연애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예전에 그녀가 자존심을 버려가며 매달렸던 그녀의 옛 남자친구들은 이제 그녀를 동화 속 공주처럼 우러러보며 자신들을 선택해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새로워진 레베카를 만나보세용~

 
그녀를 붙잡으려는 조쉬, 그렉, 나다니엘 세 남자에게 레베카는 며칠만 시간을 준다면 누굴 선택할지 정해서 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로 한 날.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한 레베카는 고민이 있을 때 늘 그랬듯이 화장실 변기 위로 피신한다.

 
변기에 앉아 잠깐 잠이 든 그녀는 아코피온 박사의 모습을 한 꿈의 유령을 다시 만난다. 꿈의 유령은 예전처럼 레베카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 그러나 이번에 꿈의 유령이 보여주는 건 레베카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세 남자와 함께하게 될 세 개의 미래.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레베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의 자신의 얼굴에서 뉴욕에서와 꼭 닮은 우울한 표정을 본다. 이제 드디어 세 남자 중 한 사람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 준비가 되었는데, 도대체 저 우울한 표정은 뭐지? 놀라고 화가 난 레베카는 꿈속의 자신에게 무작정 걸어가 묻는다.

 
“말해봐.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거야? 왜 그렉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지 않은 거냐고?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인형처럼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꿈속의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현실의 레베카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렉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나다니엘과 조쉬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그럼 대체 왜 나는 그 남자들 중 한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건데?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너는 그들을 사랑했어. 문제는 이거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

 
다음 순간 채소 주스가 든 병을 들고 화장실에서 들고 깨어난 레베카는 방금 꾼 꿈을 부정한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멍청한 꿈의 유령 같으니라고.”

 
곧이어 친구 폴라를 만난 레베카는 그녀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지금까지 열심히 애쓰면서 많은 일을 해왔는데, 어떻게 평소보다 더 혼란스러울 수 있는 거냐고요. 심지어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인 데다가, 시간은 벌써 11시잖아요.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지금 11시네요?” 오타쿠 특 의미부여에 환장함

 

레베카: 열한 시예요, 폴라!
폴라: 그래요. 오전 열한 시네요. 아직 이른 시간이죠.
레베카: 그게 아니라, 11시는 엄청나게 의미 있는 시간이에요.
만약 우리가 지금 뮤지컬을 하는 중이라면,
이 시각에 저는 뮤지컬의 주요 넘버 중 하나인 열한 시 테마곡을 부르고 있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좋아요.
열한 시 넘버란 극의 흐름을 전환시키는 노래를 말해요.
앞으로 나오게 될 새로운 주제를 예고하는 곡이죠.
보통 밤 11시 정도에 부르는데
왜냐면 뮤지컬은 보통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하곤 했거든요.
요즘은 여러 이유로 더 일찍 시작하지만요.
폴라: 그렇군요..(오늘도 덕후 친구의 맨스플레인에 고통받는 그녀)
레베카: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렇게 질문한 그녀는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 방금 던진 ‘이제 뭘 해야 하는 걸까?’라는 물음에 대해 자신만의 고민을 시작한다. 레베카가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폴라는 그녀를 굳이 깨우려 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이정도면 폴라가 레쪽이 키우는 거다 ‘얘가 또 이러네’라는 폴라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레베카가 종종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레베카가 상상의 세계에 있을 때 흘러나오는 ‘11시’라는 곡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테마곡을 총망라해 섞어 놓은 노래로, 레베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뮤지컬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인 '의상'과 '음악'을 통해 제시한다.

 

열한 시가 됐으면
"행복하게 존나 잘 살았습니다"
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니야?
검사지도 쓰고,
약도 먹었잖아
내가 뭘 더 해야 해?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어째서 난 나 자신을 모르는 거지?

 
잠시 후 상상 속 공간에서 노래를 마치고 11시 방향으로 손을 치켜든 채 깨어난 레베카는 꿈의 유령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다가오는 선택의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레베카가 세 남자 중 한 명을 선택하기로 약속한 그날 저녁. 웨스트 코비나의 친구와 이웃들을 모두 초대한 그녀는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는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레베카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았던가? 이 낯선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꿈이 ‘뮤지컬
’이라는 사실을 이미 몇 달 전에 알아차리고 노래와 작곡 수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현실 레베카의 노래 솜씨를 구경하려면 1:00부터

 
(정식 노래 수업을 받기 전 현실의 레베카는 음치에 가깝게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드라마 내에서 그녀가 불렀던 근사한 노래들은 모두 상상의 산물이었다. 딱 하나, 레베카가 신부 서약을 하려는 조쉬 앞에서 부르는 이 곡을 제외하면 말이다)

 

 
처음에 그녀는 이미 만들어진 뮤지컬에 참여해서 퍼포머로 활동하고자 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생각하기에 기존 뮤지컬 노래의 가사와 스토리는 대부분 오래되고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를 수 없었다.

 

오타쿠 특 쉽게 감동함

 
결국 레베카는 직접 곡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그녀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오늘 저녁은 몇 달에 걸쳐 음악을 배운 레베카가 마침내 무대에 올라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날이다. 그렇다. 사실 오늘은 세 남자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전에 상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11시 넘버'를 듣게 된
레베카는 오후에 그렉과 조쉬와 나다니엘을 각각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셋 중 누구도 선택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한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조쉬는 레베카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레베카가 아닌 다른 여자라는 걸 깨달아 그녀에게 달려간다(이 장면에서 우리는 조쉬가 정말 바라던 것이 일찍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참고로 원래 여친이었던 발렌시아는 이미 한참 전에 조쉬 차버리고 사업가로 변신해서 갓생 사는 중이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이 드라마의 진짜 남주 롤은 레베카의 꿈을 한결같이 응원해주는 폴라입니다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은 레베카가 친구들을 위해 불러주는 이 작품의 마지막 넘버. 시청자인 우리는 그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 곡은 웨스트 코비나에서 살아가는 레베카 번치와 그녀의 친구들만이 들을 수 있는 노래로 드라마 속에 남겨졌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그녀가 무엇을 불렀는지 이미 알고 있다. <크엑걸>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노래들을 통해 레베카가 들려주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줄곧 들어왔으니 말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막 부르려는 레베카의 모습을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은 시청자들이 레베카 번치라는 드라마 속 캐릭터와 작별하는 순간임과 동시에, 이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열여섯 살의 청소년 레베카가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조쉬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바로 레베카가 방금 마치고 돌아온 뮤지컬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어린 레베카는 티 없이 행복해 보인다. 뉴욕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살아가는 어른 레베카가 시종일관 우울한 푸른빛 속에 빠져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레베카의 등 뒤로 보이는 무대에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을 연상시키는 야자수와 해변 배경이 있다.

 

나는 사랑에 빠졌네,
나는 사랑에 빠졌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레베카가 조쉬라는 남자와 가망 없는 사랑에 빠져서 모든 걸 버리고 웨스트 코비나로 떠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화를 보고 시즌 1의 첫 장면을 떠올린 시청자라면 문득 궁금해질 수도 있다. 레베카는 정말로 조쉬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뉴욕에서 우연히 조쉬를 마주친 레베카가 그를 보며 자신이 잊고 있던 열여섯 살의 여름을 떠올렸던 건 아닐까.
 

 
어른이 된 레베카는 뉴욕에 살며 근사한 직업을 가진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우울하고 불행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언제나 어머니의 꿈이었던 변호사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레베카 앞에 조쉬가 나타났을 때, 그는 레베카가 무의식 중에서 간절히 원하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 서로를 지지하는 이웃 커뮤니티, 다정한 친구들..


무엇보다 그는 그녀가 잊고 있었던 열여섯 살의 여름과 그때 그 무대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연상시켰다. 조쉬는 레베카가 무의식적으로 ‘행복’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있던 ‘캘리포니아’ 그 자체였다.

 

레베카는 조쉬라는 해맑고 천진한 대가리 꽃밭 시골 남자를 통해서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에 돌입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첫 번째 글에서 레베카는 개 중에서도 광견병에 걸린 개라고 썼다. 지금까지 그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에 가까운 본능과 직감으로 여기저기 코를 들이밀며 냄새를 밭고 다녔다.
 

아 이 짤은 어찌 이리 적절하냐

 
그녀가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다녔던 것은 행복의 향기였다. 하지만 레베카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향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것을 쫓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향기가 언제 어디에서 났었는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의 향기가 났던 건 조쉬라는 남자였다는 오해를 해버렸다. 그의 여자친구가 되고 아내가 되면 그 향기를 영원히 맡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레베카가 조쉬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녀는 분명 조쉬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또한 그녀는 그렉도 사랑했고, 나다니엘도 사랑했다.
 

꿈의 유령: 남자 얘기 작작 좀 해!


레베카는 항상 이성과의 사랑이야말로 온전한 형태의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남자를 찾아 헤매며 연애에 정신없이 몰두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성을 들였던 관계들은 그녀에게 허무함만을 남겼고, 결국은 어떤 남자도 자신이 찾아 헤매던 행복을 줄 수 없음에 레베카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여름방학 캠프에서 느꼈던 행복감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느꼈던 행복감. 그녀의 엄마가 억지로 밀어 넣은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에서 느끼는 행복감 말이다.

 
만약 레베카가 제대로 된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한 상태로 성인이 되었다면 그녀의 삶은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레베카는 어쩌면 변호사라는 명예롭고 부유한 직업에 만족한 채로 뉴욕의 짙푸른 우울감을 어느 날에는 즐기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베카라는 인물을 통해 <크엑걸>을 만든 제작진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한 번 맛본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열여섯 살에 이미 그런 행복을 맛봤던 레베카는 그때의 감각을 되찾아 그녀 자신으로 사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해야만 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대륙 저편으로 이주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친 전 여자친구 취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연봉을 반토막 내거나 가족에게 배은망덕하다고 손가락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여섯 여름날에 처음 맡았던
행복의 향기를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많은 고전 작품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는 오해와 착각에서부터 시작된다. 때로 오해와 착각은 기나긴 모험의 시발점이 되어 주인공을 생각지도 못했던 여행길로 이끌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에서 레베카의 이야기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이 뮤지컬이었는지 아니면 조쉬 첸이었는지 헷갈렸던 열여섯 여름날의 착각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레베카의 이야기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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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간은 다를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담이 될 거야, 나는 알아
이번 환자도 다른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이제는 그녀도 성장하고 싶을 거라는 걸

수많은 방화를 저지르고 찾아온 여자아이들이
수차례 나를 번아웃에 빠트렸었지
그럼에도 희망과 인내심을 잃지 않았어
하늘이 보우하사, 건강보험을 받지 않는 덕분에
시간당 250달러를 벌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번 상담은 유용한 시간이 될 거야
환자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만 하다면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겠지
치유의 숄도 잊지 말고 챙겨야겠다
벽에 걸린 멋진 학위 액자에 키스를 보내면서
행운을 기원해야지, 이번에는 다를 거니까
그녀가 달라지도록 도울 수 있을 거니까

맙소사, 이번엔 정말로 달라야만 해
안 그러면 상담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말 테니까!

-심리 상담가 아코피온 박사의 노래

 

나약한 미국인들, 그들은 정신과와 심리상담소를 자기 짐 침실처럼 드나든다. 의지의 한국인이라면 분명 노오력과 정신승리로 이겨낼 수 있는 사소한 사건들 조차 상담사에게 찾아가 상세하게 털어놓으며, 부모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를 고해바치기 위해서 시간당 수십 수백 달러를 지불한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도 마찬가지다. 시즌 1에서 조쉬가 여자친구와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베카는 극심한 불안감과 우울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뉴욕에 살던 시절부터 정신과를 일상적으로 이용해 왔기에 어렵지 않게 지역의 심리 상담소를 찾는다.
 

하지만 레베카는 전문 임상심리사와의 1대1 상담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이기에 그녀는 미리 준비해 간 쪽지를 내밀며 상담사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여기 적힌 약들을 전부 주세요." 그 쪽지에는 그녀가 뉴욕에 있을 때 복용했던 각종 정신과 약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레베카는 뉴욕에서처럼 쉽게 약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웨스트 코비나의 임상 심리사인 아코피온 박사는 그녀가 가져온 약 리스트를 보고 경악하면서 레베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베카, 당신이 뉴욕에서 만났던 의사들은 돌팔이에요. 그들은 당신에게 반창고를 줬을 뿐 치료를 해준 게 아니었어요. "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에게 약을 주는 대신 자신의 방법론을 차근차근 따라올 것을 제안한다. 먼저 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직면한 다음 적절한 약 처방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미 여러 차례 심리 상담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코피온 박사의 제안을 불편하게 여긴다.

 

우리 함께 당신의 어린 시절로 깊이 파고들어 봅시다 :)
어, 이러실 줄 알고 걱정했던 건데
사실 저는 이미 상담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고
어린 시절의 얘기들도 그때 다 털어놨었어요.
이제 그런 건 정말로 그만 하고 싶어요.
사실 저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을 위해서기도 해요.
선생님한테까지 짐을 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두 사람의 강렬한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나지만 아코피온 박사는 다음날 아침 레베카를 다시 보게 된다. 전날보다 훨씬 강렬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약에 흠뻑 취한 채 고양이 문에 끼여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이때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정기적으로 여기 와서 저와 상담을 받겠다고 약속하면 당신을 침입죄로 고소하지 않을게요."  미국에서 주거 침입은 심각한 범죄이므로 레베카는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아코피온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쉬한테 톡하면서)"쌤 근데 저 이미 기분이 나아졌어요" EZR

 
하지만 레베카는 상담을 열심히 받지 않는다. 이미 전에 다 해본 시시한 상담 따위를 뭐 하러 진지하게 받겠는가? 그녀에게는 이미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녀만의 전문 상담사이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정신과 의사이자,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대리 부모이자,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완벽하기 그지없는 꿈의 연예인이자, 그녀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빈틈없이 채워주는 친구이자, 입만 열면 명언을 쏟아내는 인생 스승인 조쉬 첸이 있는데 말이다.
 
 

*레베카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베이비,
이젠 어린 시절 트라우마들을 보내 줘도 돼
절대 그리워질 일은 없을 걸
네 안에 담아 왔던 그 스트레스들이 말이야
네 모든 정신적 문제들
우린 함께 풀어나갈 수 있어
왜냐면 우린 단순히
조쉬가 4명인 보이밴드가 아니라
동시에 정신건강 전문 자격을 지닌
전문가들이기도 하니까

이 가사가 암시하듯 레베카에게 조쉬는 단순한 짝사랑 상대가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조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며 그녀가 꿈꾸는 행복한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인물이다. 레베카는 조쉬와 사귀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만성적인 우울감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불도저처럼 직진한다.
 

그 결과 그녀는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 그토록 바라던 조쉬의 고백을 받고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조쉬의 친구인 그렉도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그녀는 자신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우쭐해한다.
 
 

삼각관계에 빠진 레베카가 얄밉게 부르는 노래, "The Math of Love Triangles"는 고전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사운드트랙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코피온 박사다.
 

당신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진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저는...!
지금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지요.
하지만 당신의 갈등은 사실 그 남자들과 관계가 없어요.
레베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란 걸 받아들여야 해요.

 
한참 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신나게 자존감을 채우고 있던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에게 반기를 들며 "당신은 틀렸다"고 외친다. 그녀는 자신을 이곳 웨스트 코비나로 이끌었던 하늘의 계시가 이번에도 자신의 앞에 나타나 선택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상담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제가 웨스트 코비나로 온 건 우주가 저한테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라고요!!

 
상담보다는 하늘의 계시를 기다리겠다며 뛰쳐나가 버리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보며 아코피온 박사는 과연 저 사람의 돈을 계속 받으며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돈을 모아서 카약을 사겠다는 목표가 있던 아코피온 박사는 결국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젊은 변호사의 등골을 계속 뽑아먹겠다는 결심을 유지한다.
 

이후에도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와 약속한 대로 정기적으로 상담소를 드나든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녀는 마치 '나의 기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다. 레베카의 기분은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 한 명, 즉 조쉬와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조쉬와 분위기가 좋거나 둘 사이에 긍정적인 사건이 생기면 레베카의 기분도 날아갈 듯 좋아진다.
 
 

조쉬와 좋을 때의 레베카

 
기분이 좋을 때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와의 상담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귀찮은 잡일 정도로 취급한다. 이렇게 기분이 좋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어째서 상담 따위를 받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코피온 박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만족감에 취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수차례 조언하지만 레베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쉬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레베카의 기분도 한없이 우울해진다. 이럴 때 그녀는 아코피온 박사에게 자기혐오, 우울감, 조쉬에 대한 미움과 실망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쏟아놓기 위해 상담소를 찾는다. 이때 그녀에게 상담은 완전히 감정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조쉬와 안 좋을 때의 레베카

 
아코피온 박사는 이렇게 다루기 어려운 내담자를 어르고 달래 가며 레베카가 그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레베카의 방어기제는 상담을 통해서 깨지기에는 이미 너무나 견고해진 상태다. 그녀는 이미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많이 만나봤었고, 심지어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이미 정신건강 영역과 관련해서 너무 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는 레베카의 귀에 심리 상담사인 아코피온 박사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들어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강력한 레베카의 방어기제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아코피온 박사는 그녀가 달라질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레베카와 계속 상담을 진행한다. 레베카가 이번 상담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하며 변화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담아 부르는 노래가 바로 글 앞부분에서 소개한 <이번 상담은 다를 거야>다.
 

"조쉬가 성직자가 된다고요?!"(물론 그전까지 둘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진짜 엄청난..상상 이상의 일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코피온 박사가 위의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레베카의 첫 집착 상대인 조쉬 첸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레베카의 엄청난 애정 공세에 휘말려든 조쉬는 시즌 2에서 그녀와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결혼식 직전 레베카의 과거가 담긴 파일을 전해받은 조쉬는 그것을 열어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고, 결국 선택을 회피하기 위해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두고 달아난다. 이 사건으로 조쉬에 대한 레베카의 속절없는 판타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제 그녀가 조쉬에게 품고 있는 것은 오직 불타는 증오뿐이다.
 

조쉬 사건 이후 레베카의 이상 행동은 점점 심해져 이제는 친구들까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다. 당연히 그녀의 평판은 수직으로 내리꽃히고, 레베카는 도망치듯 뉴욕에 있는 본가로 떠나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몰래 항우울제를 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다시 웨스트 코비나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안에서 본가에서 가져온 약통에 있던 항우울제를 전부 삼켜 병원으로 실려간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그녀는 자신을 담당한 정신과 의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레베카, 제 소견에 따르면 당신은 지금까지 오진을 받아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사랑의 삼각형도 그렇고 이거 번역하신 분 실력이 대단하시다

 

새로운 정신질환 진단을 기다리면서 레베카가 부르는 노래는 뮤지컬 위키드에서 주인공인 엘파바가 부르는 넘버인 <마법사와 나>와 닮아 있다.
 

평생을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려 온 레베카는 마침내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된 증상으로 인정해 줄 '새로운 진단명'을 향해 막연하고 근거 없는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초록 피부의 마녀 엘파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사의 초대를 받은 뒤 위대한 마법사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거라고 희망차게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초록색 피부를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가 바꿔줄 거라고 엘파바가 기대하는 것처럼, 레베카 역시 새로운 진단명이 자신의 고통을 씻은 듯이 치료해 줄 거라고 기대한다.

 
희망에 차 눈을 빛내는 레베카에게 의사는 낯선 진단명을 내놓는다. 각종 정신의학 병명에 통달한 그녀조차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진단명을.


"제 소견에 따르면, 당신에게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여러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뭔가요?"

"일반적으로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요. 세상의 여러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피부를 가지지 못한 거라고 할 수 있죠."
 

진단명 인터넷에 검색해서 괜한 불안감 느끼지 말라고 선생님이 경고했지만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가서 검색해주고요(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처음에 레베카는 이 진단을 믿지 않는다. 기껏해야 비교적 잘 알려진 질환인 조울증이나 편집증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병명이었던 탓이다. 그녀는 이 새로운 의사도 전에 그녀를 진단했던 의사들처럼 돌팔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밤중에 무작정 아코피온 박사를 찾아간다.


이전 내담자를 내쫓고 무작정 쳐들어온
레베카를 앞에 앉혀 놓고 아코피온 박사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분류 및 진단 절차인 'DSM-5'에서 사용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아홉 가지 진단 기준을 하나하나 읽어 준다. 극한직업 상담사

 

1:59 부터

 
"급격한 기분 변화, 심각한 유기 공포, 불안정한 대인 관계, 급변하는 자아상, 피해망상 또는 해리성 삽화, 과도하고 빈번한 분노, 만성적인 공허감, 충동적인 행동, 자살 시도 또는 위협."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회상씬과 함께 레베카는 경계성 인격장애 증상이 자신과 전부 일치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인정하며 마침내 자신의 질환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가장 치료하기 힘든 인격장애'로 악명이 높은 경계성 인격장애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진단 이후 그녀가 벌이는 많은 소동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조쉬 이후에 사귀는 남자를 대하는 레베카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야야야 잠깐만
우리 이러는 거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당연하지, 이게 우리 마지막 섹스잖아(레베카는 환자니까 그렇다 쳐도 나다니엘 니는 참..)

 
결혼식장에서 달아난 조쉬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레베카는 진지한 관계를 회피하며 나다니엘과 육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한다. 그녀는 남들보다 지나치게 강력한 소유욕과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집착,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자기 자신이 불편한 나머지 모든 상황을 회피하며 도덕적인 책임마저 방조한다. 막다른 곳까지 다다르고 만 레베카의 회피와 방어기제를 우리는 이 대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나다니엘의 여자친구인) 모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니까 상처받을 일도 없죠. 그녀와 저는 서로 만난 적도 없다고요.
 
게다가 저는 지금까지 해본 것 중에서 가장 건강한 연애를 하는 중이에요. 이 남자에게 집착하지 않고 있어요. 왜냐면 어차피 그를 절대 가지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사람에게 거는 기대치가 난생처음으로 현실적인 차원으로 내려온 거예요. 어제는 나다니엘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몇 시간 동안이나 답장을 해주지 않더라고요. 한데 그동안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무려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니까요. 그런데도 기분이 괜찮았어요. 다 잘 되고 있는 거예요. 다 괜찮은 거라고요. 아시겠죠?"
 

레베카의 헛소리를 듣는 아코피온 박사의 표정

 
그렇게 또다시 자해에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레베카에게 아코피온 박사는 당신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며, 부디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또 다시 진심을 다해 충고한다. 그러나 레베카가 이 말을 어디까지 새겨 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마음 깊이 변화를 겪으며 진심으로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즌 4에서부터다. 스토커 트렌과의 긴 악연을 마침내 끝내고 정당방위 판결을 받아 교도소에서 석방된 그녀는 이제 정말 달라지기를 원한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집과 상담소를 오가며 성실하게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상담사와의 면대면 상담이나 집단상담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레베카는 이전 시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예전의 자신으로 관성적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공허하다는 이유로 술을 퍼마시고는 눈에 띄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원나잇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에 고통받는 레베카의 노래, "I'm Not Sad You're Sad"(곡이 정말 숭하다)

 
그러자 시즌 1에서 레베카에게 약을 주기를 거절했던 아코피온 박사가 역으로 그녀에게 항우울제를 먹어보라고 제안한다. 이번에 망설이는 것은 레베카다. 사실 레베카에게 약물은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그녀는 뉴욕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며 각종 정신과 약을 달고 살았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그녀의 근본적인 불행감을 해결해 주지 않았고, 사실 레베카는 약을 먹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한 첫날에 한 일도 조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먹던 정신과 약들을 싱크대에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약은 절대 이렇게 버리면 안 됩니다!! 남은 약은 포장을 뜯지 말고 가까운 행정복지센터나 약국에 가져다 줍시다!!

 
또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어머니가 사실은  딸기 스무디에 몰래 항우울제를 섞어서 마시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경험도 있다. 이 일로 약물 과다복용을 한 레베카는 거의 죽을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능하면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노오력과 의지만으로 나아지고 싶어 한다.
 
 

곡 제목: "어쩌면 우리 엄마는 그렇게까지 가증스런 쌍X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 레베카에게 아코피온 박사는 <항우울제는 정말 별거 아니에요!>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영화 <라라랜드>를 오마주한 이 곡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트랙 가운데 하나이며,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물론 한국에서는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낸 <변호사 되지 마세요>라는 곡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 드라마는 하나도 안 유명한데 이 곡 혼자만 유명하다는 게 슬플 뿐이지..)
 
 

항우울제 먹어본 적도 없는데도 크게 감독받아버림

 

걷고 말하는 걸 배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우리가 특별하다고 말하죠.
그 말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당신은 우울하니까, 그건 특별하지 않아요.
(...)
말하자면 이런 거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클럽에 잘 왔어요.
당신은 오디션 없는 연극에서
배역을 따낸 거예요.
그래, 모두가 특별하단 게 보통은 맞지만
약 문제에 관해서만은
당신은 존나 평범하기 짝이 없어요!

 

이 곡에서 특히 멋진 대목은 레베카가 약통 모양의 커다란 신발 상자를 선물 받는 장면이다. 상자 안에서 탭댄스 구두를 꺼낸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로 활짝 웃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짠! 마법처럼 구두가 레베커의 발에 신겨지고, 그녀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박자를 맞추며 멋진 춤을 춘다.
 

우울감을 피하기 위해서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해 왔던 약물이 자신을 근본적으로 나아지게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레베카와 시청자가 함께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우울감과 싸우며 살아가는 칭구들 모두 힘냅시다


이렇게 시즌 1에서 약 처방을 거절했던 아코피온 박사가 오히려 약물 사용을 권장할 만큼 레베카는 달라져 있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장치는 바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이다.

 
시즌 1에서 시즌 3까지 총 44개 에피소드의 주어는 모두 레베카가 사귀는 남자들이다. 조쉬가 37번, 나다니엘이 5번, 트렌이 1번 제목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딱 한 번 등장하는 다른 남자의 이름은 레베카의 친구인 폴라의 첫사랑이다).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조쉬가 우연히도 여기 살고 있네!> 시즌 1 1화
<조쉬의 여자친구는 정말 멋져!> 시즌 1 2화
<조쉬의 친구와 나는 데이트를 할 거야!> 시즌 1 4화
<조쉬의 기분이 왜 나쁜 걸까?> 시즌 1 17화
<조쉬가 데이트하는 저 멋진 여자는 누구지?> 시즌 2 4화
<조쉬의 수프 요정은 과연 누구일까?> 시즌 2 8화
<조쉬는 내가 꿈꾸던 남자가 맞을 거야, 그렇지?> 시즌 2 11화



조쉬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직후인 시즌 3 초반부에서는 조쉬에 대한 레베카의 격렬한 분노가 느껴지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배신감을 느껴도 여전히 조쉬는 제목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쉬의 전여친은 복수를 원해> 시즌 3 1화
<조쉬는 거짓말쟁이야> 시즌 3 3화
<조쉬의 전여친은 미쳤어> 시즌 3 4화
<조쉬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시즌 3 5화

 
<조쉬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시즌 3 6화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레베카의 마음은 조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제목에 등장하는 것은 나다니엘이라는 새 남자다.

 
<나다니엘은 내 도움이 필요해!> 시즌 3 8화
<나다니엘이 메시지를 받았어!> 시즌 3 9화
<오 나다니엘, 가보자고!> 시즌 3 10화
<나다니엘과 나는 그냥 친구야!> 시즌 3 11화

 
시즌 3은 <나다니엘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마침내 시즌 4에서 레베카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자 제목에서 남자들의 이름이 사라진다. 이제 제목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레베카 자신, 그러니까 '나'다.

 
<나는 여기 있고 싶어> 시즌 4 1화
<나는 부끄러워> 시즌 4 2화
<나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시즌 4 5화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야> 시즌 4 8화
<나는 휴식이 필요해> 시즌 4 12화
<나는 오늘밤 데이트를 해> 시즌 4 16화
<나는 사랑에 빠졌어> 시즌 4 최종화

 

 

에피소드의 주어가 레베카로 바뀌면서 드라마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이전까지 레베카의 광기가 만들어 낸 기묘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은은하게 휩싸여 있었던 이 드라마는 이제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 미드로 바뀌었다.

 
안타깝게도싸패냐? 레베카는 이전처럼 돌발 행동을 하면서 보는 사람에게 황당함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던 광견병 걸린 개 같은 여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고통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기쁨과 책임감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고 느끼면 '나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고 성장하는 진정한 시트콤 여주인공이 되었다. 비록 극적인 재미는 약간 떨어졌을지라도 시즌 4까지 보고 있자면 레베카에게 정이 많이 들어서 그녀의 변화를 마음으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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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이야.
내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지.
내게는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없어.
나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게
몰입하고 있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대.
그러니 그녀에게 미쳤다고 해도 괜찮아,
왜냐면 그녀가 미쳤다는 건 바로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니까!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2 주제곡-



전남친 조쉬를 따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도시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한 레베카. 그녀는 유능한 변호사이기에 지역 로펌에서 무난하게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날이 웨스트 코비나에 적응해 간다.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예고 없이 오가며 널뛰는 그녀의 감정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일중독자의 면모는 웨스크 코비나의 따뜻한 날씨와 여유롭고 다정한 이웃들 사이에서 점차 둥글게 다듬어져 가는 듯 보인다.

 

웨스트 코비나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야외 카페에 옹기종기 앉아서 버블티를 마신다(대체 췌장이 얼마나 큰 거야)
휴일로 정해놓은 수요일에는 저런 모자 쓰고 칵테일 마시면서 일한다(퇴근하면 안 됨 일은 해야 함)

그러나 그녀로 하여금 뉴욕에서의 삶을 때려치우고 이곳까지 오게 만든 광기는 따뜻한 날씨와 다정한 사람들만으로는 쉽사리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드라마의 제목은 <힐링타운 웨스트 코비나>로 지어졌지 <크엑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레베카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고, 그녀의 선 넘는 행동들은 자신의 의지로 일으키는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정신적인 문제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증상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한 시청자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레베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네가 어떤 일을 하건 지지할 거니까!”라며 주인공의 행동에 절대적인 응원을 보내서는 안 되는 드라마다.

 
왜냐면 극 중에서 레베카는 이런 짓들을 하기 때문이다.
 

 
1. 조쉬 여자친구에게 접근하고 조쉬한테 관심 없는 여사친인 척 잘해줘서 친해진 다음 같이 클럽 가서 키스하고(조쉬한테 x 조쉬 여친한테 o) 사실 자기가 예전에 조쉬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폭로해 버리기.
 

 
2. 조쉬의 절친 그렉과 타코 페스티벌에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던 도중 말도 없이 그렉을 길거리에 버려놓고 그날 처음 만난 다른 남자를 집에 끌여들어셔 원나잇하기.
 

 
3. 브로치 모양 초소형 몰래카메라를 차고 조쉬네 본가에 가서 일어나는 일들을 친구 폴라한테 라이브로 중계하기. 조쉬네 본가 화장실에 숨어서 조쉬가 여자친구랑 섹스하는 소리 들으면서 그것도 폴라한테 중계하기.
 

 
4. 조쉬가 여자친구랑 동거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자 사무실에서 연필꽂이 컵으로 보드카 퍼마시다가 중요한 업무 미팅 망칠 뻔하기.
 

환각 속의 존재한테 말하는 중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임상심리사의 정신과 약 처방이 가능하다(그리고 레베카는 DD컵이다)

 
5. 우울해서 약 받으려고 아무 상담소나 찾아갔는데 임상심리사가 약 처방을 거절하자 진료소 화장실 바닥에서 발견한 뭔지도 모르는 약을 먹고 밤새도록 조증 삽화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마약까지 하고 (자기가 주고 온) 처방전을 훔치려고 새벽에 임상심리사 사택 겸 진료소 담을 넘어 고양이 문으로 침입 시도하기. 고양이 문에 가슴이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들키기.
 

들어간 김에 조쉬 셔츠 냄새도 킁킁 맡아주고요

 
 6. 조쉬네 집에 침입해서 핸드폰 비밀번호를 풀고 잘못 보낸 문자 삭제하기. 그러다 조쇠한테 걸리니까 자신에 집에 누가 침입해서 이 집으로 도망 온 거라고 둘러대고 실제로 침입자가 있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해 직장 동료인 폴라에게 자기 집 창문을 깨트리도록 사주하기.
 

누가 봐도 로맨스 스캠하는 놈처럼 생기지 않았니...

 
7. 조쉬한테 관심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사귄다고 거짓말을 치고 그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냅다 키갈하기.
 

"오늘 밤 내 침대 발치에서 자고 가는 걸 허락해줄게."
"멍멍이처럼 말이지?"
"그래, 트렌. 멍멍이처럼 있으라고."
결론: 트렌이랑 잠(자막..)

 
8. 불행히도 그렇게 나타난 트렌이라는 남자는 레베카에게 집착하는 정신병자 스토커였고 초반부터 이상한 놈인 티를 팍팍 냈는데도 그가 이탈리아 요리를 끝내주게 만들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이유로 침대 발치에서 며칠씩 재워주기.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외롭고 공허하다는 이유로 스토커 트렌이랑 원나잇 하기.
 

 
9. 절친 폴라의 로스쿨 입학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조쉬한테 잘 보이려고 탁구 연습하고 조쉬 친구 쫓아다니다가 홀랑 잊어버려서 결국 마감 기한 넘기기.

 

조쉬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준다

 
10. 어찌어찌 조쉬랑 사귀는(사실 그냥 같이 자는) 사이가 됐는데 임신 테스트도 안 해보고 조쉬한테 임신했다고 선언했다가 생리가 시작되는 바람에 1분만에 말 바꿔서 경악한 조쉬한테 차이기. 
 

스타성 하나는 타고난 이 여성

 
11. 조쉬와 조쉬 친구 그렉한테 동시에 차인 다음 둘의 물건들을 없애겠다고 한곳에 모아 실내에서 기름 붓고 태우다가 집에 불 내기. 911에 전화를 하긴 했는데 집에 불이 났다고 제대로 신고도 안 하고 횡설수설해서 웨스트코비나의 미친 방화녀로 유튜브 스타 되기. 
 

 
12.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조쉬의 새 여친이 혹시 마약상일까 봐 스토킹하다가 여친 고양이 차로 치기. 고양이 차로 친 증거 인멸하려고 조쉬의 또 다른 전여친이랑 함께 새 여친 가게에 몰래 침입해서 CCTV 기록 지우기.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화장실 변기에 앉에서"
"조쉬 첸이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야?"

 
13. 절친 폴라의 미성년자 아들 데리고 조쉬 만나러 클럽에 갔다가 아들은 잃어버리고 조쉬가 클럽 화장실에서 새 여친이랑 섹스하는 걸 변기 칸에 몰래 숨어서 지켜보기.

예수님께서 보내신 똥 컵케이크 :)
페이크 포르노인데 진짜처럼 찍어야 한다고 우기는 레베카(바부야 그럼 페이크가 아니라 리얼이자나)

 
14. 또 다시 어찌어찌 조쉬랑 다시 사귀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됐는데 결혼식 당일에 식장에 나타나지 않고 신부가(브라이드 x 프리스트 o) 되겠다고 도망가버린 조쉬에게 똥으로 만든 컵케이크 보내기. 조쉬 닮은 아시아계 배우 고용한 다음 페이크 포르노 찍어서 유포하려고 시도하기. 다행히도 시도만 하고 찍지는 못했다..

15. 조쉬가 신부(브라이드 x 프리스트 o) 서약을 하는 자리에 웨딩드레스 입고 쫓아가서 지금까지 자기가 한 모든 미친 짓들 샤라웃해 버리기. 원래는 조쉬의 잘못들을 까발릴 작정이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조쉬는 식장에 안 나타난 걸 빼고는 뭘 한 게 없고 거의 다 레베카가 저지른 일들이었다는,,
 

인간적으로 생업은 건드리지 말자ㅜ

 
16. 혹시라도 자기가 한 짓들 조쉬가 소문내고 다닐까 봐 변호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조쉬를 인종차별주의자에 게이 혐오자에 거짓말쟁이에 인성 파탄으로 몰아가는 기사를 온라인 저널에 저널에 올려서 조쉬 평판 나락 보내고 인간관계 박살내기. 조쉬가 직장에서 도둑질을 한 것처럼 꾸며서 잘리게 만들기.
 

 
17. 그것도 모자라서 조쉬를 따라다니고 익명으로 전화하고 편지보내고 감시하고 집에 침입해서 곰인형 목매달며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으아아아아아아ㅏㅏㅑㅏㅏㅏㅏ악 시청자 살려
야 진짜 시청자 그만 괴롭혀라 아

 
18. 자신을 걱정하고 도와주려는 친구들한테 상처주는 말을 퍼붓고 홧김에 집을 뛰쳐나와 호스텔에서 머무르면서 날라리 비행 청소년처럼 웨스트 코비나를 헤매고 다니다가 후미진 술집에서 만난 전남친 그렉 아버지랑 원나잇 하기.
 

스토킹 - 레베카 = 0

 
19. 조쉬랑 헤어지고 사귄 새 남친 나다니엘 아버지 스토킹해서 불륜 증거 잡았다고 생각하고 나다니엘에게 알렸는데 사실은 불륜이 아니라 그냥 식사 대접받는 자리일 뿐이어서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기.
 

 
20. 나다니엘이랑 대충 fwb로 지내기로 했으면서(레베카가 찼음) 계속 신경쓰이는 나다니엘의 새 썸녀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고 다크웹에 접속해서 살인청부업자 검색하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레베카 침대 밑에서 튀어나오는 트렌
스토커한테 이런 말 조언이랍시고 하는 거 법으로 막아야 한다

 
21. 스토커 트렌에게 다크웹 접속 기록으로 협박당해서 사귀는 척 하다가 나다니엘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트렌을 옥상에서 밀쳐서 죽일 뻔하고 살인미수 혐의로 감옥 들어가기.
 

레베카의 방화광과 결혼식장에서 폭로되는 진실, 신부의 흰 베일 등의 설정은 미친 여자가 등장하는 고전소설 [제인 에어]를 오마주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일으킨 가장 심각한 사건이자 이 드라마의 최대 반전은 따로 있었다. 앞서 레베카가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 로스쿨을 졸업했다고 했는데, 사실 이 디테일한 이력은 드라마 내에서 일종의 복선이었다. 그녀가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레베카는 유부남 교수와 불륜 관계였다. 그러다 이별을 통보받자 교수를 스토킹하다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해서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다. 방화 사건으로 레베카는 재판을 받지만 정신질환을 사유로 정상 참작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대신 병원에 입원한다. 그래서 하버드 대학원에 합격했음에도 입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다른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판장에서 레베카의 엄마가 판사에게 했던 말이 시즌 2의 테마 곡에 등장하는 가사이다.

 
"레베카는 그저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일 뿐이에요. 이 아이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없어요."
 

 
방화 사건은 레베카에게도 큰 상처로 남아 그녀는 해리성 기억 상실 증상을 보이며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웨스트 코비나에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두 번째 방화도 그녀가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스토커 트렌이 그녀의 어두운 과거를 파헤쳐 조쉬에게 폭로함에 따라 이 사건은 레베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일반적으로 시트콤 형식의 드라마는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한 시즌 내에서 갈등이 생겨났다 봉합되고 화합하면서 이야기가 완결되는 구조를 가진다. <크엑걸> 역시 언뜻 그런 클리셰를 따르는 듯 보인다. 작은 갈등과 오해, 사건들이 일어났다가 해결되고,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희노애락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레베카의 가장 친한 친구인 폴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깨닫고 로스쿨에 입학한다. 또 다른 친구인 헤더는 현실에 부딪히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하게 되며,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결혼도 한다. 레베카의 연적이었지만 나중에 친구가 되는 발렌시아는 조쉬와 헤어진 후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직업을 구한다.

 
이들은 실수도 저지르고 때때로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연대하고 응원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멋지고 주체적인 여성들이다. 사람들이 미드에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바로 그런 캐릭터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레베카는 어떨까? 레베카는 성장하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광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진다. 주변 캐릭터들과는 달리 갈수록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며 자기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레베카를 지켜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 사람의 바닥은 어디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전남친의 현여친을 감시하다가 그녀의 고양이를 차로 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마조히스트 성향이 있는 스토커랑 원나잇을 하는 게 레베카의 바닥인가? 전남친 닮은 배우를 고용해서 페이크 포르노를 찍는 건? 전남친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집에 불을 지르거나, 사실 자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뻔해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건?

 

 
그렇게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던 그녀는 시즌 3 후반부에서 마침내 스토커이자 레베카의 남자 버전인 트렌으로 인해 실제 범죄에 휘말린다. 그녀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체포되고 구금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여지껏 그녀가 저질렀던 모든 행동과 감추고 싶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했던 방화 사건은 레베카가 체포되기 전에 이미 웨스트 코비나의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알려진 상태다. 레베카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완전히 바닥을 쳤다. 그녀를 이보다 더 추락시키려면 그녀를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로 만들어서 이 드라마의 주제를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르게 된 레베카에게 새로운 남자인 나다니엘은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어쩌면 모든 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불행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 즉 부모의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빅뱅이 다 잘못했네

 

왜냐면 무엇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거든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결과일 뿐이죠.
무엇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에요.
(...)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어요.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요.

 

나다니엘은 인생의 모든 책임을 나쁜 부모가 초래한 끔찍했던 어린 시절로 돌리라고 레베카를 유혹한다. 이것은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너는 잘못한 게 없고, 모든 것은 너의 부모가 형편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너는 네가 한 행동에 책임이 없어. 네가 이렇게 불행한 것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도,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다니는 것도 다 네 부모의 책임일 뿐이야.

 

 
실제로 레베카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사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도, 돌보지도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기만 하는 무책임한 남자였다.
 

"나는 네게 모든 걸 줬는데도 너는 끝없이 원하기만 하는구나!"...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양육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수준의 통제 성향과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어린 레베카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괴롭혔다.


그 때문에 레베카는 대학생 때부터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며,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상담도 받았지만 수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행복감이나 만족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녀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린 시절에 돌리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감옥으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에서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털어놓는다.
 

"제게는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에요. 저는 이제껏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항상 다른 누군가가 제 인생을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 뒀었어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는 어머니가 결정하게 냅뒀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제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정하게 냅뒀죠. 저는 그 결정에 잠자코 따랐어요. 그것들이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모두 제가 내린 결정이었어요. 내가 한 선택이었어요. 내 인생이니까요."


 
시즌 3의 마지막 화까지 레베카는 언뜻 능동적이고 똑똑한 엘리트 여성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슴 속에서 날뛰는 광기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숙주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녀가 드라마 속에사 보이는 행동 역시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의 구현이라기보단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고 순간의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겉잡을 수 없는 충동의 표현이자 전남친 조쉬 첸이 상징하는 왜곡된 환상을 깨트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을 의식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며 이런 저런 시도를 깔짝거려 보기도 했지만 모두 그때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살인미수 피의자로 재판장에 서게 될 때까지 주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진심으로 책임을 져본 적도 없었다.

 

 
이런 레베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대학생 때 저지른 방화 사건이다. 이때 그녀는 모든 행동의 원인을 자신의 정신 질환으로, 즉 그녀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입원 치료를 받지만 이 치료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모든 부끄러운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서게 된 법정에서 레베카는 대학생 때와는 달리 정신질환을 핑계 삼아 법망을 빠져나가기를 거절한다. 자신이 트렌을 해치려고 했던 것을 인정한 그녀는 형을 살기로 결심한다. 레베카가 감옥에 가겠다고 선언한 순간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선택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자,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과 더 넓게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때 비로소 그녀는 변화할 준비, 치료받을 준비가 된다.

 
앞서 나는 레베카의 상태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 동안 웨스트 코비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울고 웃고 싸우고 상처받고 화해하고 이별했다. 그러면서 뉴욕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우정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시즌 1에서 폴라가 레베카에게 불러주는 노래 "Face Your Fears"


때로는 레베카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슴 저리도록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미친 전여친답게 대부분의 충고를 무시하거나 한 귀로 흘려버리고 또 다시 광기 어린 행동에 돌입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레베카에게 가 닿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베카가 법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대상은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는 판사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변호사 나다니엘도 아니다. 그녀가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은 웨스트 코비나에 와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를 항상 믿고 지지하며 따뜻한 사랑을 건네주었던 단 한 사람, 폴라다.
 

저는 변하고 싶어요, 폴라.
노력하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렇다고 당신이 나를 믿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폴라였다면 안 믿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약속들을 어겼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번에는
정말로 제 행동에 책임을 지고 싶으니까요.

 
시즌 3의 마지막 화에서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에 오기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장면은 그녀가 수많은 사건들을 일으키고 겪으면서 조금씩 나빠지는 동시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바닥을 치고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미쳤고, 그 광기가 그녀를 이 작은 도시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로소 그녀는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광기와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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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뉴욕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돈을 벌었지만, 기분이 우울했어.
어느 날 나는 한바탕 울고 나서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하기로 했어.

새 친구들과 새 직장
우연히도 전남친 조쉬가 사는 곳이지만,
내가 여기 온 건 그 때문이 아니야!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주제곡-

 
로맨틱 코미디 영화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털털하고, 다정하며, 어딘가 허술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품 속 남자들과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의 호감을 살 만큼 충분히 통통 튀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쟤는 좀 미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러나 2015년에 방영하기 시작해 2019년에 총 4개의 시즌으로 종영한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는 “좀 미쳤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귀엽게 묘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물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현대인의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인격장애(성격장애)에 관해 보기 드물게 진지하고 현실적이며 깊이 있는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레베카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인격장애 환자라는 것을 시즌 3이 될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녀를 전에 진찰했던 의사들이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성 의존증 등으로 그녀의 질환에 대해 오진을 내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온갖 정신 나간 짓들을 하면서 다닌다. 한 마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 레베카 번치는 미쳤다.

 

버터 광고에서 가르침을 얻는 여주 어떤데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쓰이는 ‘미쳤다’는 말은 주인공의 인물 소개란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꾸며주는 위트 넘치는 수식어가 아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쓰겠지만, 그녀가 극 중에서 연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또는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일으키는 사건들은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에 어울리는 웃기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보다는 당장 수갑을 차고 감옥에 끌려가야 하는 범법 행위에 가깝다.
 

시즌 3에서는 실제로 감옥에도 간다

 
레베카는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말할 때 ‘저렇게’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제발 레베카가 내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제발 내가 레베카 같은 짓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를 바랄 것이다.

 

오밤중에 전남친 집 앞에서 하울링하는 여주는 또 어떤데

 
그녀는 미쳤다. 개로 치자면 광견병에 걸린 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사람인 그녀는 누가 봐도 훌륭한 스펙을 가진, 보그나 에스콰이어 잡지에 인터뷰 기사가 실릴 것 같은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외동딸이자,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아이큐 160의 수재. 현재는 뉴욕의 유수 로펌에서 일하고 있으며 승진을 눈앞에 둔, 잘 나가는 엘리트 여성.


그러나 제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한 품종견이라도 광견병에 걸린 개는 그저 한 마리의 미친개일 뿐이다. 레베카도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레베카야, 엄마다." 소리 듣는 삶..

 
뉴욕에서 레베카는 아주 불행하다. 그녀가 이 도시에서 느끼는 불행감과 우울감은 색을 통해 화면에 구현된다. 뉴욕에 있는 그녀의 집과 직장, 그리고 거리는 온통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다. 그녀는 파란 인터넷 화면을 보며 눈을 떠 파란 옷을 입고 파란 광고판이 걸린 거리를 지나 직장으로 출근해 역시 파란 옷을 입은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


사실 레베카의 눈은 갈색이지만 뉴욕에서는 그녀의 눈동자 색까지도 푸른색으로 빛난다. 그녀의 눈에 비친 뉴욕은 그야말로 사람을 “Feel Blue” 그러니까 우울하게 만드는 곳인 것이다.

 

 
뉴욕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집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일어난 26살의 변호사 레베카는 출근 준비를 하다가 TV에서 버터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본다. 광고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요?]
 

 
로펌에 출근한 그녀에게 승진 소식이 전해진다. 분명히 날아갈 듯 행복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레베카는 기뻐하기는커녕 뒷걸음질을 치며 회사에서 뛰쳐나온다. 공황 약을 먹으려고 약통을 꺼내지만 덜덜 떨리는 손 탓에 알약을 전부 길거리에 쏟고 만다.
 

"내가 왜 이러지? 지금 느끼는 건 분명 행복한 기분일 텐데."

 
막다른 골목에서 레베카는 손을 모으고 나름대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하느님, 저는 과학을 믿기 때문에 기도 같은 건 안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제게 길을 알려주세요. 에이맨. 아니 아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그녀의 눈앞에 또다시 아침에 봤던 버터 광고가 나타난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요?


레베카는 이 문구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며 광고판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고판에 붙어 있던 화살표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눈부신 햇살과 함께 짜잔! 마치 계시와도 같이 한 남자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는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16살이던 그녀와 2달 동안 사귀었던 소년이자 그녀의 첫사랑인 조쉬 첸이다.
 
 

조쉬놈 사실 고향에 사귀던 여친 두고 캠프에서 레베카랑 바람피운 것임
다음 해에 나타날 리가..

 
레베카는 당장 그에게 달려가 두 사람은 십 년 만에 인사를 나눈다. 조쉬는 거리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뉴욕의 우울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삭막하고 경쟁적인 도시를 벗어나 막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실망한 레베카는 조쉬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까, 너 어디 산다고 했지?”
“웨스트 코비나,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동네야. 2시간이면 해변에 갈 수 있는 곳이지! 차가 막히면 4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햇살남주(문자 그대로의 뜻)

 
환한 웃음을 짓는 조쉬는 레베카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떠난다. 언젠가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레베카가 등장할 때마다 어두컴컴했던 화면이 처음으로 밝아진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레베카는 결심한다. 자신도 웨스트 코비나로 가야겠다고. 직장에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갈 생각인 걸까? 아니, 그녀는 로펌을 그만두고 이사를 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30년쯤 지나서 은퇴한 후에 가서 살겠다는 뜻일까? 아니, 지금 당장. 그러니까 오늘 바로 가서 살겠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된다. 레베카는 웨스트 코비나에 평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당연히 그 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조쉬와 레베카는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짧게 사귀고 헤어져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기에 조쉬는 그녀의 연고라고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와 직장과 모든 삶은 뉴욕에 있다.
 

웨스트 코비나 풍경
노래 부르면서 차에서 내리는데 야자수가 아니라 송전탑이 있음
아스팔트가 빛난다고 좋아함ㅋㅋㅋㅋ

 
게다가 웨스트 코비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살기 위해 이사하기에도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지역이다. 로스엔젤레스 동쪽에 있는 이 지역은 10만 명 정도의 인구 중 아시아 인종의 비율이 25% 정도로 비교적 높은 편이라는 걸 제외하면(극 중 조쉬도 필리핀계 미국인이다) 유별나게 특별하지도 대단히 아름답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소도시다.

 
이 작은 도시가 현관문만 열면 시원한 해변이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이상적인 휴양지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해변까지 2시간밖에 안 걸려요!’라는 <웨스트 코비나> 테마곡의  자조적인 마지막 가사로 알아차릴 수 있다.
 

해변까지 2시간밖에 안 걸려요! (왕복 4시간이자나ㅠ)

 
잘나가는 뉴욕 변호사인 레베카가 16살 여름에 잠깐 사귀었을 뿐인 전남친 조쉬를 따라서 무작정 웨스트 코비나 같은 낯선 시골 동네로 이사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더 무서운 건 정작  조쉬 본인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레베카의 로펌 상사들은 그녀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자 뉴욕의 다른 로펌 또는 시카고나 보스턴에 있는 경쟁사로 이직한다고 생각하지, 그녀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도시로 떠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앞에서 강조했다시피 레베카는 미친 여자다. 그녀는 자신을 승진시켜주겠다고 말하는 상사들 앞에서 연봉 55만 달러를 받는 로펌을 때려치우고 뉴욕 생활을 청산한다.

 

 
비행기를 타고 웨스트 코비나로 날아가 새 직장을 구하고 살 집도 찾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뇐다. “나는 조쉬 첸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게 아니야... 우연히 그가 여기 있었을 뿐이야.”


그녀는 자신이 조쉬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자신은 그저 웨스트 코비나에서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신과 시청자들에게 변명하고 또 변명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레베카: 나는 웨스트 코비나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어~~
응 뒤에 조쉬 이름 있음

 

“She’s Crazy Ex Girlfriend!”
“걔 완전 미친 전여친이잖아!”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프닝곡 형식으로 만들어진 'West Covina '
팬분이 올려주신 크엑걸 콘서트 한글 자막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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