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들 정말 안정적인 선택이라 했어
돈 잘 벌고 명예로운 직업이니까 말야
그렇게 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거야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지

근데 이제 내가 공짜 조언을 해줄게
네가 뭘 먹고살지 결정할 때

변호사는 되지 말아요
하지 마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야

변호사는 되지 말아요
가차 없이
네 속은 썩어 문드러지게 될 걸

한국에서 인터넷 좀 해봤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수많은 장르에서 패러디를 만들어 낸 ‘변호사 되지 마세요’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프레첼 가게를 운영 중인 전직 변호사로, 그는 노래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인지 열과 성을 다해 토로한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뒷이야기가 존재한다. 이 곡을 부른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변호사 일을 하겠다며 프레첼 가게를 접고 자신을 고용해 줄 로펌을 찾아서 떠나버린다(!). 역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자영업이 제일 힘들다니까 그리고 매물이 된 프레첼 가게를 인수한 사람이 바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이자 경계성 인격장애 치료를 받는 중인 레베카다.

 

레베카: 세상에, 이렇게 큰 프레첼은 여기서 처음 봤어!

 
갑자기 웬 프레첼인가 싶지만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라고 여겼던 음식이 프레첼이었고, 레베카 자신도 프레첼을 좋아해서 가게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변호사를 그만둔 레베카가 새로 시작한 프레첼 가게인 ‘레베첼’에 생계유지 수단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그녀가 직원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이 장소가 얼마나 의미 있는 장소인지 저도 아니까요. 사장님의 꿈을 지키는 사람으로 선택받다니 기분이 좋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 가게요. 사장님이 꿈꾸던 일 아니었나요?”

“대체 왜 ‘레베첼’이 제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기 벽에 걸린 셔츠에 그렇게 쓰여있잖아요. ‘레베첼, 제 꿈을 한 입 베어무세요.’”

“그렇게 써놔야 사람들이 이 가게가 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프레첼을 한 개라도 더 살 테니까요. 안 그래요?”

 

 
그러자 직원은 레베카에게 묻는다.

 
“이 가게가 꿈꾸던 일이 아니라면, 사장님의 꿈은 뭔가요?”

 
직원에게 질문을 받은 레베카는 고민에 빠진다. 사실 그녀가 변호사를 그만두고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제작진은 그녀의 꿈이 무엇인지에 대해 드라마 초반부터 꾸준하게 암시해 왔다.


시즌 1 15화에서 조쉬가 자신이 아니라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인 발렌시아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베카는 자신의 인생에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에 좌절한 채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비행기 안에서 잠이 든 그녀는 꿈속에서 웨스트 코비나의 임상 심리사인 아코피온 박사를 만난다.

 
꿈속에서 아코피온 박사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말리 영감이 스크루지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그녀를 데리고 과거와 현재를 여행한다. 아버지가 그녀와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그 끔찍했던 날, 그녀가 대학에서 뮤지컬 동아리를 하면서 행복해하던 시절. 그러다 동아리에서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아 뮤지컬에서도 멀어졌던 시간들.

 

레베카: 그래요. 제가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런 게 어떻게 진정한 사랑이겠어요?
꿈의 유령: 사랑이 반드시 사람을 향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은 열정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레베카의 삶을 지탱해 왔던 것도
바로 그런 열정이었어요. 안 그래요?
레베카: 맞아요, 사는 게 힘들었을 때
뮤지컬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곤 했어요.
제 인생을 뮤지컬 속 노래들이라고 상상하면서 지냈죠.
꿈의 유령: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찾아와요.
알잖아요 레베카, 아마도 당신의 인생에는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 사랑을 당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걸 수도 있어요.
한쪽에서 열심히 뮤지컬 연습하는 학식 레베카(노래 개못함)

아코피온 박사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멍하니 듣던 레베카는 그녀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짜가 아니죠?”
“당연하죠, 우리는 꿈의 유령이니까요.”

 

씐나는 <꿈의 유령> 테마곡

 
꿈 속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가 자신의 무의식을 현실의 인물에게 투영한 결과물이다. 그녀가 자기 안의 해결책을 함께 탐색할 동료로 다정한 상담사의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현실에서는 박사님 말 잘 듣지도 않으면서 '꿈의 유령' 에피소드는 레베카가 이미 문제의 해결책을 마음 어딘가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무의식 안에 있을 뿐이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꿈의 유령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최종화에서 다시 레베카의 앞에 나타난다. 이제 경계성 인격장애를 거의 치료하고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게 된 레베카의 연애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예전에 그녀가 자존심을 버려가며 매달렸던 그녀의 옛 남자친구들은 이제 그녀를 동화 속 공주처럼 우러러보며 자신들을 선택해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새로워진 레베카를 만나보세용~

 
그녀를 붙잡으려는 조쉬, 그렉, 나다니엘 세 남자에게 레베카는 며칠만 시간을 준다면 누굴 선택할지 정해서 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로 한 날.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한 레베카는 고민이 있을 때 늘 그랬듯이 화장실 변기 위로 피신한다.

 
변기에 앉아 잠깐 잠이 든 그녀는 아코피온 박사의 모습을 한 꿈의 유령을 다시 만난다. 꿈의 유령은 예전처럼 레베카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 그러나 이번에 꿈의 유령이 보여주는 건 레베카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세 남자와 함께하게 될 세 개의 미래.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레베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의 자신의 얼굴에서 뉴욕에서와 꼭 닮은 우울한 표정을 본다. 이제 드디어 세 남자 중 한 사람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 준비가 되었는데, 도대체 저 우울한 표정은 뭐지? 놀라고 화가 난 레베카는 꿈속의 자신에게 무작정 걸어가 묻는다.

 
“말해봐.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거야? 왜 그렉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지 않은 거냐고?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인형처럼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꿈속의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현실의 레베카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렉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나다니엘과 조쉬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그럼 대체 왜 나는 그 남자들 중 한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건데?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너는 그들을 사랑했어. 문제는 이거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

 
다음 순간 채소 주스가 든 병을 들고 화장실에서 들고 깨어난 레베카는 방금 꾼 꿈을 부정한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멍청한 꿈의 유령 같으니라고.”

 
곧이어 친구 폴라를 만난 레베카는 그녀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지금까지 열심히 애쓰면서 많은 일을 해왔는데, 어떻게 평소보다 더 혼란스러울 수 있는 거냐고요. 심지어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인 데다가, 시간은 벌써 11시잖아요.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지금 11시네요?” 오타쿠 특 의미부여에 환장함

 

레베카: 열한 시예요, 폴라!
폴라: 그래요. 오전 열한 시네요. 아직 이른 시간이죠.
레베카: 그게 아니라, 11시는 엄청나게 의미 있는 시간이에요.
만약 우리가 지금 뮤지컬을 하는 중이라면,
이 시각에 저는 뮤지컬의 주요 넘버 중 하나인 열한 시 테마곡을 부르고 있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좋아요.
열한 시 넘버란 극의 흐름을 전환시키는 노래를 말해요.
앞으로 나오게 될 새로운 주제를 예고하는 곡이죠.
보통 밤 11시 정도에 부르는데
왜냐면 뮤지컬은 보통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하곤 했거든요.
요즘은 여러 이유로 더 일찍 시작하지만요.
폴라: 그렇군요..(오늘도 덕후 친구의 맨스플레인에 고통받는 그녀)
레베카: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렇게 질문한 그녀는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 방금 던진 ‘이제 뭘 해야 하는 걸까?’라는 물음에 대해 자신만의 고민을 시작한다. 레베카가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폴라는 그녀를 굳이 깨우려 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이정도면 폴라가 레쪽이 키우는 거다 ‘얘가 또 이러네’라는 폴라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레베카가 종종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레베카가 상상의 세계에 있을 때 흘러나오는 ‘11시’라는 곡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테마곡을 총망라해 섞어 놓은 노래로, 레베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뮤지컬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인 '의상'과 '음악'을 통해 제시한다.

 

열한 시가 됐으면
"행복하게 존나 잘 살았습니다"
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니야?
검사지도 쓰고,
약도 먹었잖아
내가 뭘 더 해야 해?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어째서 난 나 자신을 모르는 거지?

 
잠시 후 상상 속 공간에서 노래를 마치고 11시 방향으로 손을 치켜든 채 깨어난 레베카는 꿈의 유령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다가오는 선택의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레베카가 세 남자 중 한 명을 선택하기로 약속한 그날 저녁. 웨스트 코비나의 친구와 이웃들을 모두 초대한 그녀는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는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레베카가 피아노를 칠 줄 알았던가? 이 낯선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꿈이 ‘뮤지컬
’이라는 사실을 이미 몇 달 전에 알아차리고 노래와 작곡 수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현실 레베카의 노래 솜씨를 구경하려면 1:00부터

 
(정식 노래 수업을 받기 전 현실의 레베카는 음치에 가깝게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드라마 내에서 그녀가 불렀던 근사한 노래들은 모두 상상의 산물이었다. 딱 하나, 레베카가 신부 서약을 하려는 조쉬 앞에서 부르는 이 곡을 제외하면 말이다)

 

 
처음에 그녀는 이미 만들어진 뮤지컬에 참여해서 퍼포머로 활동하고자 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생각하기에 기존 뮤지컬 노래의 가사와 스토리는 대부분 오래되고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를 수 없었다.

 

오타쿠 특 쉽게 감동함

 
결국 레베카는 직접 곡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그녀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오늘 저녁은 몇 달에 걸쳐 음악을 배운 레베카가 마침내 무대에 올라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날이다. 그렇다. 사실 오늘은 세 남자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전에 상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11시 넘버'를 듣게 된
레베카는 오후에 그렉과 조쉬와 나다니엘을 각각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셋 중 누구도 선택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한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조쉬는 레베카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레베카가 아닌 다른 여자라는 걸 깨달아 그녀에게 달려간다(이 장면에서 우리는 조쉬가 정말 바라던 것이 일찍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참고로 원래 여친이었던 발렌시아는 이미 한참 전에 조쉬 차버리고 사업가로 변신해서 갓생 사는 중이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이 드라마의 진짜 남주 롤은 레베카의 꿈을 한결같이 응원해주는 폴라입니다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은 레베카가 친구들을 위해 불러주는 이 작품의 마지막 넘버. 시청자인 우리는 그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 곡은 웨스트 코비나에서 살아가는 레베카 번치와 그녀의 친구들만이 들을 수 있는 노래로 드라마 속에 남겨졌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그녀가 무엇을 불렀는지 이미 알고 있다. <크엑걸>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노래들을 통해 레베카가 들려주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줄곧 들어왔으니 말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막 부르려는 레베카의 모습을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은 시청자들이 레베카 번치라는 드라마 속 캐릭터와 작별하는 순간임과 동시에, 이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열여섯 살의 청소년 레베카가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조쉬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바로 레베카가 방금 마치고 돌아온 뮤지컬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어린 레베카는 티 없이 행복해 보인다. 뉴욕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살아가는 어른 레베카가 시종일관 우울한 푸른빛 속에 빠져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레베카의 등 뒤로 보이는 무대에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을 연상시키는 야자수와 해변 배경이 있다.

 

나는 사랑에 빠졌네,
나는 사랑에 빠졌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레베카가 조쉬라는 남자와 가망 없는 사랑에 빠져서 모든 걸 버리고 웨스트 코비나로 떠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화를 보고 시즌 1의 첫 장면을 떠올린 시청자라면 문득 궁금해질 수도 있다. 레베카는 정말로 조쉬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뉴욕에서 우연히 조쉬를 마주친 레베카가 그를 보며 자신이 잊고 있던 열여섯 살의 여름을 떠올렸던 건 아닐까.
 

 
어른이 된 레베카는 뉴욕에 살며 근사한 직업을 가진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우울하고 불행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언제나 어머니의 꿈이었던 변호사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레베카 앞에 조쉬가 나타났을 때, 그는 레베카가 무의식 중에서 간절히 원하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 서로를 지지하는 이웃 커뮤니티, 다정한 친구들..


무엇보다 그는 그녀가 잊고 있었던 열여섯 살의 여름과 그때 그 무대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연상시켰다. 조쉬는 레베카가 무의식적으로 ‘행복’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있던 ‘캘리포니아’ 그 자체였다.

 

레베카는 조쉬라는 해맑고 천진한 대가리 꽃밭 시골 남자를 통해서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에 돌입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첫 번째 글에서 레베카는 개 중에서도 광견병에 걸린 개라고 썼다. 지금까지 그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에 가까운 본능과 직감으로 여기저기 코를 들이밀며 냄새를 밭고 다녔다.
 

아 이 짤은 어찌 이리 적절하냐

 
그녀가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다녔던 것은 행복의 향기였다. 하지만 레베카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향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것을 쫓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향기가 언제 어디에서 났었는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의 향기가 났던 건 조쉬라는 남자였다는 오해를 해버렸다. 그의 여자친구가 되고 아내가 되면 그 향기를 영원히 맡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레베카가 조쉬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녀는 분명 조쉬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또한 그녀는 그렉도 사랑했고, 나다니엘도 사랑했다.
 

꿈의 유령: 남자 얘기 작작 좀 해!


레베카는 항상 이성과의 사랑이야말로 온전한 형태의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남자를 찾아 헤매며 연애에 정신없이 몰두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성을 들였던 관계들은 그녀에게 허무함만을 남겼고, 결국은 어떤 남자도 자신이 찾아 헤매던 행복을 줄 수 없음에 레베카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여름방학 캠프에서 느꼈던 행복감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느꼈던 행복감. 그녀의 엄마가 억지로 밀어 넣은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에서 느끼는 행복감 말이다.

 
만약 레베카가 제대로 된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한 상태로 성인이 되었다면 그녀의 삶은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레베카는 어쩌면 변호사라는 명예롭고 부유한 직업에 만족한 채로 뉴욕의 짙푸른 우울감을 어느 날에는 즐기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베카라는 인물을 통해 <크엑걸>을 만든 제작진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한 번 맛본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열여섯 살에 이미 그런 행복을 맛봤던 레베카는 그때의 감각을 되찾아 그녀 자신으로 사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해야만 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대륙 저편으로 이주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친 전 여자친구 취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연봉을 반토막 내거나 가족에게 배은망덕하다고 손가락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여섯 여름날에 처음 맡았던
행복의 향기를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많은 고전 작품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는 오해와 착각에서부터 시작된다. 때로 오해와 착각은 기나긴 모험의 시발점이 되어 주인공을 생각지도 못했던 여행길로 이끌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에서 레베카의 이야기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이 뮤지컬이었는지 아니면 조쉬 첸이었는지 헷갈렸던 열여섯 여름날의 착각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레베카의 이야기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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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간은 다를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담이 될 거야, 나는 알아
이번 환자도 다른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이제는 그녀도 성장하고 싶을 거라는 걸

수많은 방화를 저지르고 찾아온 여자아이들이
수차례 나를 번아웃에 빠트렸었지
그럼에도 희망과 인내심을 잃지 않았어
하늘이 보우하사, 건강보험을 받지 않는 덕분에
시간당 250달러를 벌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번 상담은 유용한 시간이 될 거야
환자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만 하다면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겠지
치유의 숄도 잊지 말고 챙겨야겠다
벽에 걸린 멋진 학위 액자에 키스를 보내면서
행운을 기원해야지, 이번에는 다를 거니까
그녀가 달라지도록 도울 수 있을 거니까

맙소사, 이번엔 정말로 달라야만 해
안 그러면 상담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말 테니까!

-심리 상담가 아코피온 박사의 노래

 

나약한 미국인들, 그들은 정신과와 심리상담소를 자기 짐 침실처럼 드나든다. 의지의 한국인이라면 분명 노오력과 정신승리로 이겨낼 수 있는 사소한 사건들 조차 상담사에게 찾아가 상세하게 털어놓으며, 부모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를 고해바치기 위해서 시간당 수십 수백 달러를 지불한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도 마찬가지다. 시즌 1에서 조쉬가 여자친구와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베카는 극심한 불안감과 우울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뉴욕에 살던 시절부터 정신과를 일상적으로 이용해 왔기에 어렵지 않게 지역의 심리 상담소를 찾는다.
 

하지만 레베카는 전문 임상심리사와의 1대1 상담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이기에 그녀는 미리 준비해 간 쪽지를 내밀며 상담사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여기 적힌 약들을 전부 주세요." 그 쪽지에는 그녀가 뉴욕에 있을 때 복용했던 각종 정신과 약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레베카는 뉴욕에서처럼 쉽게 약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웨스트 코비나의 임상 심리사인 아코피온 박사는 그녀가 가져온 약 리스트를 보고 경악하면서 레베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베카, 당신이 뉴욕에서 만났던 의사들은 돌팔이에요. 그들은 당신에게 반창고를 줬을 뿐 치료를 해준 게 아니었어요. "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에게 약을 주는 대신 자신의 방법론을 차근차근 따라올 것을 제안한다. 먼저 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직면한 다음 적절한 약 처방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미 여러 차례 심리 상담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코피온 박사의 제안을 불편하게 여긴다.

 

우리 함께 당신의 어린 시절로 깊이 파고들어 봅시다 :)
어, 이러실 줄 알고 걱정했던 건데
사실 저는 이미 상담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고
어린 시절의 얘기들도 그때 다 털어놨었어요.
이제 그런 건 정말로 그만 하고 싶어요.
사실 저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을 위해서기도 해요.
선생님한테까지 짐을 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두 사람의 강렬한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나지만 아코피온 박사는 다음날 아침 레베카를 다시 보게 된다. 전날보다 훨씬 강렬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약에 흠뻑 취한 채 고양이 문에 끼여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이때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정기적으로 여기 와서 저와 상담을 받겠다고 약속하면 당신을 침입죄로 고소하지 않을게요."  미국에서 주거 침입은 심각한 범죄이므로 레베카는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아코피온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쉬한테 톡하면서)"쌤 근데 저 이미 기분이 나아졌어요" EZR

 
하지만 레베카는 상담을 열심히 받지 않는다. 이미 전에 다 해본 시시한 상담 따위를 뭐 하러 진지하게 받겠는가? 그녀에게는 이미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녀만의 전문 상담사이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정신과 의사이자,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대리 부모이자,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완벽하기 그지없는 꿈의 연예인이자, 그녀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빈틈없이 채워주는 친구이자, 입만 열면 명언을 쏟아내는 인생 스승인 조쉬 첸이 있는데 말이다.
 
 

*레베카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베이비,
이젠 어린 시절 트라우마들을 보내 줘도 돼
절대 그리워질 일은 없을 걸
네 안에 담아 왔던 그 스트레스들이 말이야
네 모든 정신적 문제들
우린 함께 풀어나갈 수 있어
왜냐면 우린 단순히
조쉬가 4명인 보이밴드가 아니라
동시에 정신건강 전문 자격을 지닌
전문가들이기도 하니까

이 가사가 암시하듯 레베카에게 조쉬는 단순한 짝사랑 상대가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조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며 그녀가 꿈꾸는 행복한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인물이다. 레베카는 조쉬와 사귀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만성적인 우울감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불도저처럼 직진한다.
 

그 결과 그녀는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 그토록 바라던 조쉬의 고백을 받고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조쉬의 친구인 그렉도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그녀는 자신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우쭐해한다.
 
 

삼각관계에 빠진 레베카가 얄밉게 부르는 노래, "The Math of Love Triangles"는 고전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사운드트랙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코피온 박사다.
 

당신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진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저는...!
지금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지요.
하지만 당신의 갈등은 사실 그 남자들과 관계가 없어요.
레베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란 걸 받아들여야 해요.

 
한참 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신나게 자존감을 채우고 있던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에게 반기를 들며 "당신은 틀렸다"고 외친다. 그녀는 자신을 이곳 웨스트 코비나로 이끌었던 하늘의 계시가 이번에도 자신의 앞에 나타나 선택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상담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제가 웨스트 코비나로 온 건 우주가 저한테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라고요!!

 
상담보다는 하늘의 계시를 기다리겠다며 뛰쳐나가 버리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보며 아코피온 박사는 과연 저 사람의 돈을 계속 받으며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돈을 모아서 카약을 사겠다는 목표가 있던 아코피온 박사는 결국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젊은 변호사의 등골을 계속 뽑아먹겠다는 결심을 유지한다.
 

이후에도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와 약속한 대로 정기적으로 상담소를 드나든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녀는 마치 '나의 기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다. 레베카의 기분은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 한 명, 즉 조쉬와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조쉬와 분위기가 좋거나 둘 사이에 긍정적인 사건이 생기면 레베카의 기분도 날아갈 듯 좋아진다.
 
 

조쉬와 좋을 때의 레베카

 
기분이 좋을 때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와의 상담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귀찮은 잡일 정도로 취급한다. 이렇게 기분이 좋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어째서 상담 따위를 받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코피온 박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만족감에 취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수차례 조언하지만 레베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쉬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레베카의 기분도 한없이 우울해진다. 이럴 때 그녀는 아코피온 박사에게 자기혐오, 우울감, 조쉬에 대한 미움과 실망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쏟아놓기 위해 상담소를 찾는다. 이때 그녀에게 상담은 완전히 감정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조쉬와 안 좋을 때의 레베카

 
아코피온 박사는 이렇게 다루기 어려운 내담자를 어르고 달래 가며 레베카가 그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레베카의 방어기제는 상담을 통해서 깨지기에는 이미 너무나 견고해진 상태다. 그녀는 이미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많이 만나봤었고, 심지어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이미 정신건강 영역과 관련해서 너무 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는 레베카의 귀에 심리 상담사인 아코피온 박사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들어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강력한 레베카의 방어기제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아코피온 박사는 그녀가 달라질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레베카와 계속 상담을 진행한다. 레베카가 이번 상담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하며 변화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담아 부르는 노래가 바로 글 앞부분에서 소개한 <이번 상담은 다를 거야>다.
 

"조쉬가 성직자가 된다고요?!"(물론 그전까지 둘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진짜 엄청난..상상 이상의 일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코피온 박사가 위의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레베카의 첫 집착 상대인 조쉬 첸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레베카의 엄청난 애정 공세에 휘말려든 조쉬는 시즌 2에서 그녀와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결혼식 직전 레베카의 과거가 담긴 파일을 전해받은 조쉬는 그것을 열어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고, 결국 선택을 회피하기 위해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두고 달아난다. 이 사건으로 조쉬에 대한 레베카의 속절없는 판타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제 그녀가 조쉬에게 품고 있는 것은 오직 불타는 증오뿐이다.
 

조쉬 사건 이후 레베카의 이상 행동은 점점 심해져 이제는 친구들까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다. 당연히 그녀의 평판은 수직으로 내리꽃히고, 레베카는 도망치듯 뉴욕에 있는 본가로 떠나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몰래 항우울제를 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다시 웨스트 코비나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안에서 본가에서 가져온 약통에 있던 항우울제를 전부 삼켜 병원으로 실려간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그녀는 자신을 담당한 정신과 의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레베카, 제 소견에 따르면 당신은 지금까지 오진을 받아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사랑의 삼각형도 그렇고 이거 번역하신 분 실력이 대단하시다

 

새로운 정신질환 진단을 기다리면서 레베카가 부르는 노래는 뮤지컬 위키드에서 주인공인 엘파바가 부르는 넘버인 <마법사와 나>와 닮아 있다.
 

평생을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려 온 레베카는 마침내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된 증상으로 인정해 줄 '새로운 진단명'을 향해 막연하고 근거 없는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초록 피부의 마녀 엘파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사의 초대를 받은 뒤 위대한 마법사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거라고 희망차게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초록색 피부를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가 바꿔줄 거라고 엘파바가 기대하는 것처럼, 레베카 역시 새로운 진단명이 자신의 고통을 씻은 듯이 치료해 줄 거라고 기대한다.

 
희망에 차 눈을 빛내는 레베카에게 의사는 낯선 진단명을 내놓는다. 각종 정신의학 병명에 통달한 그녀조차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진단명을.


"제 소견에 따르면, 당신에게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여러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뭔가요?"

"일반적으로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요. 세상의 여러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피부를 가지지 못한 거라고 할 수 있죠."
 

진단명 인터넷에 검색해서 괜한 불안감 느끼지 말라고 선생님이 경고했지만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가서 검색해주고요(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처음에 레베카는 이 진단을 믿지 않는다. 기껏해야 비교적 잘 알려진 질환인 조울증이나 편집증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병명이었던 탓이다. 그녀는 이 새로운 의사도 전에 그녀를 진단했던 의사들처럼 돌팔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밤중에 무작정 아코피온 박사를 찾아간다.


이전 내담자를 내쫓고 무작정 쳐들어온
레베카를 앞에 앉혀 놓고 아코피온 박사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분류 및 진단 절차인 'DSM-5'에서 사용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아홉 가지 진단 기준을 하나하나 읽어 준다. 극한직업 상담사

 

1:59 부터

 
"급격한 기분 변화, 심각한 유기 공포, 불안정한 대인 관계, 급변하는 자아상, 피해망상 또는 해리성 삽화, 과도하고 빈번한 분노, 만성적인 공허감, 충동적인 행동, 자살 시도 또는 위협."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회상씬과 함께 레베카는 경계성 인격장애 증상이 자신과 전부 일치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인정하며 마침내 자신의 질환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가장 치료하기 힘든 인격장애'로 악명이 높은 경계성 인격장애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진단 이후 그녀가 벌이는 많은 소동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조쉬 이후에 사귀는 남자를 대하는 레베카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야야야 잠깐만
우리 이러는 거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당연하지, 이게 우리 마지막 섹스잖아(레베카는 환자니까 그렇다 쳐도 나다니엘 니는 참..)

 
결혼식장에서 달아난 조쉬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레베카는 진지한 관계를 회피하며 나다니엘과 육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한다. 그녀는 남들보다 지나치게 강력한 소유욕과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집착,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자기 자신이 불편한 나머지 모든 상황을 회피하며 도덕적인 책임마저 방조한다. 막다른 곳까지 다다르고 만 레베카의 회피와 방어기제를 우리는 이 대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나다니엘의 여자친구인) 모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니까 상처받을 일도 없죠. 그녀와 저는 서로 만난 적도 없다고요.
 
게다가 저는 지금까지 해본 것 중에서 가장 건강한 연애를 하는 중이에요. 이 남자에게 집착하지 않고 있어요. 왜냐면 어차피 그를 절대 가지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사람에게 거는 기대치가 난생처음으로 현실적인 차원으로 내려온 거예요. 어제는 나다니엘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몇 시간 동안이나 답장을 해주지 않더라고요. 한데 그동안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무려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니까요. 그런데도 기분이 괜찮았어요. 다 잘 되고 있는 거예요. 다 괜찮은 거라고요. 아시겠죠?"
 

레베카의 헛소리를 듣는 아코피온 박사의 표정

 
그렇게 또다시 자해에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레베카에게 아코피온 박사는 당신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며, 부디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또 다시 진심을 다해 충고한다. 그러나 레베카가 이 말을 어디까지 새겨 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마음 깊이 변화를 겪으며 진심으로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즌 4에서부터다. 스토커 트렌과의 긴 악연을 마침내 끝내고 정당방위 판결을 받아 교도소에서 석방된 그녀는 이제 정말 달라지기를 원한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집과 상담소를 오가며 성실하게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상담사와의 면대면 상담이나 집단상담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레베카는 이전 시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예전의 자신으로 관성적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공허하다는 이유로 술을 퍼마시고는 눈에 띄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원나잇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에 고통받는 레베카의 노래, "I'm Not Sad You're Sad"(곡이 정말 숭하다)

 
그러자 시즌 1에서 레베카에게 약을 주기를 거절했던 아코피온 박사가 역으로 그녀에게 항우울제를 먹어보라고 제안한다. 이번에 망설이는 것은 레베카다. 사실 레베카에게 약물은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그녀는 뉴욕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며 각종 정신과 약을 달고 살았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그녀의 근본적인 불행감을 해결해 주지 않았고, 사실 레베카는 약을 먹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한 첫날에 한 일도 조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먹던 정신과 약들을 싱크대에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약은 절대 이렇게 버리면 안 됩니다!! 남은 약은 포장을 뜯지 말고 가까운 행정복지센터나 약국에 가져다 줍시다!!

 
또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어머니가 사실은  딸기 스무디에 몰래 항우울제를 섞어서 마시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경험도 있다. 이 일로 약물 과다복용을 한 레베카는 거의 죽을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능하면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노오력과 의지만으로 나아지고 싶어 한다.
 
 

곡 제목: "어쩌면 우리 엄마는 그렇게까지 가증스런 쌍X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 레베카에게 아코피온 박사는 <항우울제는 정말 별거 아니에요!>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영화 <라라랜드>를 오마주한 이 곡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트랙 가운데 하나이며,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물론 한국에서는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낸 <변호사 되지 마세요>라는 곡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 드라마는 하나도 안 유명한데 이 곡 혼자만 유명하다는 게 슬플 뿐이지..)
 
 

항우울제 먹어본 적도 없는데도 크게 감독받아버림

 

걷고 말하는 걸 배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우리가 특별하다고 말하죠.
그 말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당신은 우울하니까, 그건 특별하지 않아요.
(...)
말하자면 이런 거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클럽에 잘 왔어요.
당신은 오디션 없는 연극에서
배역을 따낸 거예요.
그래, 모두가 특별하단 게 보통은 맞지만
약 문제에 관해서만은
당신은 존나 평범하기 짝이 없어요!

 

이 곡에서 특히 멋진 대목은 레베카가 약통 모양의 커다란 신발 상자를 선물 받는 장면이다. 상자 안에서 탭댄스 구두를 꺼낸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로 활짝 웃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짠! 마법처럼 구두가 레베커의 발에 신겨지고, 그녀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박자를 맞추며 멋진 춤을 춘다.
 

우울감을 피하기 위해서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해 왔던 약물이 자신을 근본적으로 나아지게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레베카와 시청자가 함께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우울감과 싸우며 살아가는 칭구들 모두 힘냅시다


이렇게 시즌 1에서 약 처방을 거절했던 아코피온 박사가 오히려 약물 사용을 권장할 만큼 레베카는 달라져 있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장치는 바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이다.

 
시즌 1에서 시즌 3까지 총 44개 에피소드의 주어는 모두 레베카가 사귀는 남자들이다. 조쉬가 37번, 나다니엘이 5번, 트렌이 1번 제목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딱 한 번 등장하는 다른 남자의 이름은 레베카의 친구인 폴라의 첫사랑이다).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조쉬가 우연히도 여기 살고 있네!> 시즌 1 1화
<조쉬의 여자친구는 정말 멋져!> 시즌 1 2화
<조쉬의 친구와 나는 데이트를 할 거야!> 시즌 1 4화
<조쉬의 기분이 왜 나쁜 걸까?> 시즌 1 17화
<조쉬가 데이트하는 저 멋진 여자는 누구지?> 시즌 2 4화
<조쉬의 수프 요정은 과연 누구일까?> 시즌 2 8화
<조쉬는 내가 꿈꾸던 남자가 맞을 거야, 그렇지?> 시즌 2 11화



조쉬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직후인 시즌 3 초반부에서는 조쉬에 대한 레베카의 격렬한 분노가 느껴지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배신감을 느껴도 여전히 조쉬는 제목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쉬의 전여친은 복수를 원해> 시즌 3 1화
<조쉬는 거짓말쟁이야> 시즌 3 3화
<조쉬의 전여친은 미쳤어> 시즌 3 4화
<조쉬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시즌 3 5화

 
<조쉬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시즌 3 6화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레베카의 마음은 조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제목에 등장하는 것은 나다니엘이라는 새 남자다.

 
<나다니엘은 내 도움이 필요해!> 시즌 3 8화
<나다니엘이 메시지를 받았어!> 시즌 3 9화
<오 나다니엘, 가보자고!> 시즌 3 10화
<나다니엘과 나는 그냥 친구야!> 시즌 3 11화

 
시즌 3은 <나다니엘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마침내 시즌 4에서 레베카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자 제목에서 남자들의 이름이 사라진다. 이제 제목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레베카 자신, 그러니까 '나'다.

 
<나는 여기 있고 싶어> 시즌 4 1화
<나는 부끄러워> 시즌 4 2화
<나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시즌 4 5화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야> 시즌 4 8화
<나는 휴식이 필요해> 시즌 4 12화
<나는 오늘밤 데이트를 해> 시즌 4 16화
<나는 사랑에 빠졌어> 시즌 4 최종화

 

 

에피소드의 주어가 레베카로 바뀌면서 드라마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이전까지 레베카의 광기가 만들어 낸 기묘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은은하게 휩싸여 있었던 이 드라마는 이제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 미드로 바뀌었다.

 
안타깝게도싸패냐? 레베카는 이전처럼 돌발 행동을 하면서 보는 사람에게 황당함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던 광견병 걸린 개 같은 여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고통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기쁨과 책임감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고 느끼면 '나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고 성장하는 진정한 시트콤 여주인공이 되었다. 비록 극적인 재미는 약간 떨어졌을지라도 시즌 4까지 보고 있자면 레베카에게 정이 많이 들어서 그녀의 변화를 마음으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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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이야.
내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지.
내게는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없어.
나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게
몰입하고 있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대.
그러니 그녀에게 미쳤다고 해도 괜찮아,
왜냐면 그녀가 미쳤다는 건 바로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니까!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2 주제곡-



전남친 조쉬를 따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도시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한 레베카. 그녀는 유능한 변호사이기에 지역 로펌에서 무난하게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날이 웨스트 코비나에 적응해 간다.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예고 없이 오가며 널뛰는 그녀의 감정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일중독자의 면모는 웨스크 코비나의 따뜻한 날씨와 여유롭고 다정한 이웃들 사이에서 점차 둥글게 다듬어져 가는 듯 보인다.

 

웨스트 코비나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야외 카페에 옹기종기 앉아서 버블티를 마신다(대체 췌장이 얼마나 큰 거야)
휴일로 정해놓은 수요일에는 저런 모자 쓰고 칵테일 마시면서 일한다(퇴근하면 안 됨 일은 해야 함)

그러나 그녀로 하여금 뉴욕에서의 삶을 때려치우고 이곳까지 오게 만든 광기는 따뜻한 날씨와 다정한 사람들만으로는 쉽사리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드라마의 제목은 <힐링타운 웨스트 코비나>로 지어졌지 <크엑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레베카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고, 그녀의 선 넘는 행동들은 자신의 의지로 일으키는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정신적인 문제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증상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한 시청자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레베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네가 어떤 일을 하건 지지할 거니까!”라며 주인공의 행동에 절대적인 응원을 보내서는 안 되는 드라마다.

 
왜냐면 극 중에서 레베카는 이런 짓들을 하기 때문이다.
 

 
1. 조쉬 여자친구에게 접근하고 조쉬한테 관심 없는 여사친인 척 잘해줘서 친해진 다음 같이 클럽 가서 키스하고(조쉬한테 x 조쉬 여친한테 o) 사실 자기가 예전에 조쉬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폭로해 버리기.
 

 
2. 조쉬의 절친 그렉과 타코 페스티벌에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던 도중 말도 없이 그렉을 길거리에 버려놓고 그날 처음 만난 다른 남자를 집에 끌여들어셔 원나잇하기.
 

 
3. 브로치 모양 초소형 몰래카메라를 차고 조쉬네 본가에 가서 일어나는 일들을 친구 폴라한테 라이브로 중계하기. 조쉬네 본가 화장실에 숨어서 조쉬가 여자친구랑 섹스하는 소리 들으면서 그것도 폴라한테 중계하기.
 

 
4. 조쉬가 여자친구랑 동거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자 사무실에서 연필꽂이 컵으로 보드카 퍼마시다가 중요한 업무 미팅 망칠 뻔하기.
 

환각 속의 존재한테 말하는 중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임상심리사의 정신과 약 처방이 가능하다(그리고 레베카는 DD컵이다)

 
5. 우울해서 약 받으려고 아무 상담소나 찾아갔는데 임상심리사가 약 처방을 거절하자 진료소 화장실 바닥에서 발견한 뭔지도 모르는 약을 먹고 밤새도록 조증 삽화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마약까지 하고 (자기가 주고 온) 처방전을 훔치려고 새벽에 임상심리사 사택 겸 진료소 담을 넘어 고양이 문으로 침입 시도하기. 고양이 문에 가슴이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들키기.
 

들어간 김에 조쉬 셔츠 냄새도 킁킁 맡아주고요

 
 6. 조쉬네 집에 침입해서 핸드폰 비밀번호를 풀고 잘못 보낸 문자 삭제하기. 그러다 조쇠한테 걸리니까 자신에 집에 누가 침입해서 이 집으로 도망 온 거라고 둘러대고 실제로 침입자가 있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해 직장 동료인 폴라에게 자기 집 창문을 깨트리도록 사주하기.
 

누가 봐도 로맨스 스캠하는 놈처럼 생기지 않았니...

 
7. 조쉬한테 관심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사귄다고 거짓말을 치고 그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냅다 키갈하기.
 

"오늘 밤 내 침대 발치에서 자고 가는 걸 허락해줄게."
"멍멍이처럼 말이지?"
"그래, 트렌. 멍멍이처럼 있으라고."
결론: 트렌이랑 잠(자막..)

 
8. 불행히도 그렇게 나타난 트렌이라는 남자는 레베카에게 집착하는 정신병자 스토커였고 초반부터 이상한 놈인 티를 팍팍 냈는데도 그가 이탈리아 요리를 끝내주게 만들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이유로 침대 발치에서 며칠씩 재워주기.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외롭고 공허하다는 이유로 스토커 트렌이랑 원나잇 하기.
 

 
9. 절친 폴라의 로스쿨 입학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조쉬한테 잘 보이려고 탁구 연습하고 조쉬 친구 쫓아다니다가 홀랑 잊어버려서 결국 마감 기한 넘기기.

 

조쉬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준다

 
10. 어찌어찌 조쉬랑 사귀는(사실 그냥 같이 자는) 사이가 됐는데 임신 테스트도 안 해보고 조쉬한테 임신했다고 선언했다가 생리가 시작되는 바람에 1분만에 말 바꿔서 경악한 조쉬한테 차이기. 
 

스타성 하나는 타고난 이 여성

 
11. 조쉬와 조쉬 친구 그렉한테 동시에 차인 다음 둘의 물건들을 없애겠다고 한곳에 모아 실내에서 기름 붓고 태우다가 집에 불 내기. 911에 전화를 하긴 했는데 집에 불이 났다고 제대로 신고도 안 하고 횡설수설해서 웨스트코비나의 미친 방화녀로 유튜브 스타 되기. 
 

 
12.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조쉬의 새 여친이 혹시 마약상일까 봐 스토킹하다가 여친 고양이 차로 치기. 고양이 차로 친 증거 인멸하려고 조쉬의 또 다른 전여친이랑 함께 새 여친 가게에 몰래 침입해서 CCTV 기록 지우기.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화장실 변기에 앉에서"
"조쉬 첸이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야?"

 
13. 절친 폴라의 미성년자 아들 데리고 조쉬 만나러 클럽에 갔다가 아들은 잃어버리고 조쉬가 클럽 화장실에서 새 여친이랑 섹스하는 걸 변기 칸에 몰래 숨어서 지켜보기.

예수님께서 보내신 똥 컵케이크 :)
페이크 포르노인데 진짜처럼 찍어야 한다고 우기는 레베카(바부야 그럼 페이크가 아니라 리얼이자나)

 
14. 또 다시 어찌어찌 조쉬랑 다시 사귀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됐는데 결혼식 당일에 식장에 나타나지 않고 신부가(브라이드 x 프리스트 o) 되겠다고 도망가버린 조쉬에게 똥으로 만든 컵케이크 보내기. 조쉬 닮은 아시아계 배우 고용한 다음 페이크 포르노 찍어서 유포하려고 시도하기. 다행히도 시도만 하고 찍지는 못했다..

15. 조쉬가 신부(브라이드 x 프리스트 o) 서약을 하는 자리에 웨딩드레스 입고 쫓아가서 지금까지 자기가 한 모든 미친 짓들 샤라웃해 버리기. 원래는 조쉬의 잘못들을 까발릴 작정이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조쉬는 식장에 안 나타난 걸 빼고는 뭘 한 게 없고 거의 다 레베카가 저지른 일들이었다는,,
 

인간적으로 생업은 건드리지 말자ㅜ

 
16. 혹시라도 자기가 한 짓들 조쉬가 소문내고 다닐까 봐 변호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조쉬를 인종차별주의자에 게이 혐오자에 거짓말쟁이에 인성 파탄으로 몰아가는 기사를 온라인 저널에 저널에 올려서 조쉬 평판 나락 보내고 인간관계 박살내기. 조쉬가 직장에서 도둑질을 한 것처럼 꾸며서 잘리게 만들기.
 

 
17. 그것도 모자라서 조쉬를 따라다니고 익명으로 전화하고 편지보내고 감시하고 집에 침입해서 곰인형 목매달며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으아아아아아아ㅏㅏㅑㅏㅏㅏㅏ악 시청자 살려
야 진짜 시청자 그만 괴롭혀라 아

 
18. 자신을 걱정하고 도와주려는 친구들한테 상처주는 말을 퍼붓고 홧김에 집을 뛰쳐나와 호스텔에서 머무르면서 날라리 비행 청소년처럼 웨스트 코비나를 헤매고 다니다가 후미진 술집에서 만난 전남친 그렉 아버지랑 원나잇 하기.
 

스토킹 - 레베카 = 0

 
19. 조쉬랑 헤어지고 사귄 새 남친 나다니엘 아버지 스토킹해서 불륜 증거 잡았다고 생각하고 나다니엘에게 알렸는데 사실은 불륜이 아니라 그냥 식사 대접받는 자리일 뿐이어서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기.
 

 
20. 나다니엘이랑 대충 fwb로 지내기로 했으면서(레베카가 찼음) 계속 신경쓰이는 나다니엘의 새 썸녀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고 다크웹에 접속해서 살인청부업자 검색하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레베카 침대 밑에서 튀어나오는 트렌
스토커한테 이런 말 조언이랍시고 하는 거 법으로 막아야 한다

 
21. 스토커 트렌에게 다크웹 접속 기록으로 협박당해서 사귀는 척 하다가 나다니엘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트렌을 옥상에서 밀쳐서 죽일 뻔하고 살인미수 혐의로 감옥 들어가기.
 

레베카의 방화광과 결혼식장에서 폭로되는 진실, 신부의 흰 베일 등의 설정은 미친 여자가 등장하는 고전소설 [제인 에어]를 오마주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일으킨 가장 심각한 사건이자 이 드라마의 최대 반전은 따로 있었다. 앞서 레베카가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 로스쿨을 졸업했다고 했는데, 사실 이 디테일한 이력은 드라마 내에서 일종의 복선이었다. 그녀가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레베카는 유부남 교수와 불륜 관계였다. 그러다 이별을 통보받자 교수를 스토킹하다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해서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다. 방화 사건으로 레베카는 재판을 받지만 정신질환을 사유로 정상 참작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대신 병원에 입원한다. 그래서 하버드 대학원에 합격했음에도 입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다른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판장에서 레베카의 엄마가 판사에게 했던 말이 시즌 2의 테마 곡에 등장하는 가사이다.

 
"레베카는 그저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일 뿐이에요. 이 아이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없어요."
 

 
방화 사건은 레베카에게도 큰 상처로 남아 그녀는 해리성 기억 상실 증상을 보이며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웨스트 코비나에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두 번째 방화도 그녀가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스토커 트렌이 그녀의 어두운 과거를 파헤쳐 조쉬에게 폭로함에 따라 이 사건은 레베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일반적으로 시트콤 형식의 드라마는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한 시즌 내에서 갈등이 생겨났다 봉합되고 화합하면서 이야기가 완결되는 구조를 가진다. <크엑걸> 역시 언뜻 그런 클리셰를 따르는 듯 보인다. 작은 갈등과 오해, 사건들이 일어났다가 해결되고,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희노애락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레베카의 가장 친한 친구인 폴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깨닫고 로스쿨에 입학한다. 또 다른 친구인 헤더는 현실에 부딪히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하게 되며,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결혼도 한다. 레베카의 연적이었지만 나중에 친구가 되는 발렌시아는 조쉬와 헤어진 후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직업을 구한다.

 
이들은 실수도 저지르고 때때로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연대하고 응원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멋지고 주체적인 여성들이다. 사람들이 미드에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바로 그런 캐릭터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레베카는 어떨까? 레베카는 성장하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광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진다. 주변 캐릭터들과는 달리 갈수록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며 자기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레베카를 지켜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 사람의 바닥은 어디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전남친의 현여친을 감시하다가 그녀의 고양이를 차로 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마조히스트 성향이 있는 스토커랑 원나잇을 하는 게 레베카의 바닥인가? 전남친 닮은 배우를 고용해서 페이크 포르노를 찍는 건? 전남친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집에 불을 지르거나, 사실 자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뻔해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건?

 

 
그렇게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던 그녀는 시즌 3 후반부에서 마침내 스토커이자 레베카의 남자 버전인 트렌으로 인해 실제 범죄에 휘말린다. 그녀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체포되고 구금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여지껏 그녀가 저질렀던 모든 행동과 감추고 싶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했던 방화 사건은 레베카가 체포되기 전에 이미 웨스트 코비나의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알려진 상태다. 레베카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완전히 바닥을 쳤다. 그녀를 이보다 더 추락시키려면 그녀를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로 만들어서 이 드라마의 주제를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르게 된 레베카에게 새로운 남자인 나다니엘은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어쩌면 모든 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불행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 즉 부모의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빅뱅이 다 잘못했네

 

왜냐면 무엇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거든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결과일 뿐이죠.
무엇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에요.
(...)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어요.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요.

 

나다니엘은 인생의 모든 책임을 나쁜 부모가 초래한 끔찍했던 어린 시절로 돌리라고 레베카를 유혹한다. 이것은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너는 잘못한 게 없고, 모든 것은 너의 부모가 형편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너는 네가 한 행동에 책임이 없어. 네가 이렇게 불행한 것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도,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다니는 것도 다 네 부모의 책임일 뿐이야.

 

 
실제로 레베카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사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도, 돌보지도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기만 하는 무책임한 남자였다.
 

"나는 네게 모든 걸 줬는데도 너는 끝없이 원하기만 하는구나!"...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양육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수준의 통제 성향과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어린 레베카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괴롭혔다.


그 때문에 레베카는 대학생 때부터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며,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상담도 받았지만 수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행복감이나 만족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녀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린 시절에 돌리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감옥으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에서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털어놓는다.
 

"제게는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에요. 저는 이제껏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항상 다른 누군가가 제 인생을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 뒀었어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는 어머니가 결정하게 냅뒀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제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정하게 냅뒀죠. 저는 그 결정에 잠자코 따랐어요. 그것들이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모두 제가 내린 결정이었어요. 내가 한 선택이었어요. 내 인생이니까요."


 
시즌 3의 마지막 화까지 레베카는 언뜻 능동적이고 똑똑한 엘리트 여성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슴 속에서 날뛰는 광기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숙주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녀가 드라마 속에사 보이는 행동 역시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의 구현이라기보단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고 순간의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겉잡을 수 없는 충동의 표현이자 전남친 조쉬 첸이 상징하는 왜곡된 환상을 깨트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을 의식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며 이런 저런 시도를 깔짝거려 보기도 했지만 모두 그때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살인미수 피의자로 재판장에 서게 될 때까지 주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진심으로 책임을 져본 적도 없었다.

 

 
이런 레베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대학생 때 저지른 방화 사건이다. 이때 그녀는 모든 행동의 원인을 자신의 정신 질환으로, 즉 그녀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입원 치료를 받지만 이 치료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모든 부끄러운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서게 된 법정에서 레베카는 대학생 때와는 달리 정신질환을 핑계 삼아 법망을 빠져나가기를 거절한다. 자신이 트렌을 해치려고 했던 것을 인정한 그녀는 형을 살기로 결심한다. 레베카가 감옥에 가겠다고 선언한 순간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선택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자,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과 더 넓게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때 비로소 그녀는 변화할 준비, 치료받을 준비가 된다.

 
앞서 나는 레베카의 상태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 동안 웨스트 코비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울고 웃고 싸우고 상처받고 화해하고 이별했다. 그러면서 뉴욕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우정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시즌 1에서 폴라가 레베카에게 불러주는 노래 "Face Your Fears"


때로는 레베카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슴 저리도록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미친 전여친답게 대부분의 충고를 무시하거나 한 귀로 흘려버리고 또 다시 광기 어린 행동에 돌입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레베카에게 가 닿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베카가 법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대상은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는 판사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변호사 나다니엘도 아니다. 그녀가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은 웨스트 코비나에 와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를 항상 믿고 지지하며 따뜻한 사랑을 건네주었던 단 한 사람, 폴라다.
 

저는 변하고 싶어요, 폴라.
노력하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렇다고 당신이 나를 믿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폴라였다면 안 믿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약속들을 어겼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번에는
정말로 제 행동에 책임을 지고 싶으니까요.

 
시즌 3의 마지막 화에서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에 오기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장면은 그녀가 수많은 사건들을 일으키고 겪으면서 조금씩 나빠지는 동시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바닥을 치고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미쳤고, 그 광기가 그녀를 이 작은 도시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로소 그녀는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광기와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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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뉴욕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돈을 벌었지만, 기분이 우울했어.
어느 날 나는 한바탕 울고 나서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하기로 했어.

새 친구들과 새 직장
우연히도 전남친 조쉬가 사는 곳이지만,
내가 여기 온 건 그 때문이 아니야!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주제곡-

 
로맨틱 코미디 영화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털털하고, 다정하며, 어딘가 허술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품 속 남자들과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의 호감을 살 만큼 충분히 통통 튀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쟤는 좀 미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러나 2015년에 방영하기 시작해 2019년에 총 4개의 시즌으로 종영한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는 “좀 미쳤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귀엽게 묘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물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현대인의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인격장애(성격장애)에 관해 보기 드물게 진지하고 현실적이며 깊이 있는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레베카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인격장애 환자라는 것을 시즌 3이 될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녀를 전에 진찰했던 의사들이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성 의존증 등으로 그녀의 질환에 대해 오진을 내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온갖 정신 나간 짓들을 하면서 다닌다. 한 마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 레베카 번치는 미쳤다.

 

버터 광고에서 가르침을 얻는 여주 어떤데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쓰이는 ‘미쳤다’는 말은 주인공의 인물 소개란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꾸며주는 위트 넘치는 수식어가 아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쓰겠지만, 그녀가 극 중에서 연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또는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일으키는 사건들은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에 어울리는 웃기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보다는 당장 수갑을 차고 감옥에 끌려가야 하는 범법 행위에 가깝다.
 

시즌 3에서는 실제로 감옥에도 간다

 
레베카는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말할 때 ‘저렇게’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제발 레베카가 내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제발 내가 레베카 같은 짓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를 바랄 것이다.

 

오밤중에 전남친 집 앞에서 하울링하는 여주는 또 어떤데

 
그녀는 미쳤다. 개로 치자면 광견병에 걸린 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사람인 그녀는 누가 봐도 훌륭한 스펙을 가진, 보그나 에스콰이어 잡지에 인터뷰 기사가 실릴 것 같은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외동딸이자,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아이큐 160의 수재. 현재는 뉴욕의 유수 로펌에서 일하고 있으며 승진을 눈앞에 둔, 잘 나가는 엘리트 여성.


그러나 제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한 품종견이라도 광견병에 걸린 개는 그저 한 마리의 미친개일 뿐이다. 레베카도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레베카야, 엄마다." 소리 듣는 삶..

 
뉴욕에서 레베카는 아주 불행하다. 그녀가 이 도시에서 느끼는 불행감과 우울감은 색을 통해 화면에 구현된다. 뉴욕에 있는 그녀의 집과 직장, 그리고 거리는 온통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다. 그녀는 파란 인터넷 화면을 보며 눈을 떠 파란 옷을 입고 파란 광고판이 걸린 거리를 지나 직장으로 출근해 역시 파란 옷을 입은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


사실 레베카의 눈은 갈색이지만 뉴욕에서는 그녀의 눈동자 색까지도 푸른색으로 빛난다. 그녀의 눈에 비친 뉴욕은 그야말로 사람을 “Feel Blue” 그러니까 우울하게 만드는 곳인 것이다.

 

 
뉴욕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집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일어난 26살의 변호사 레베카는 출근 준비를 하다가 TV에서 버터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본다. 광고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요?]
 

 
로펌에 출근한 그녀에게 승진 소식이 전해진다. 분명히 날아갈 듯 행복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레베카는 기뻐하기는커녕 뒷걸음질을 치며 회사에서 뛰쳐나온다. 공황 약을 먹으려고 약통을 꺼내지만 덜덜 떨리는 손 탓에 알약을 전부 길거리에 쏟고 만다.
 

"내가 왜 이러지? 지금 느끼는 건 분명 행복한 기분일 텐데."

 
막다른 골목에서 레베카는 손을 모으고 나름대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하느님, 저는 과학을 믿기 때문에 기도 같은 건 안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제게 길을 알려주세요. 에이맨. 아니 아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그녀의 눈앞에 또다시 아침에 봤던 버터 광고가 나타난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요?


레베카는 이 문구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며 광고판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고판에 붙어 있던 화살표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눈부신 햇살과 함께 짜잔! 마치 계시와도 같이 한 남자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는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16살이던 그녀와 2달 동안 사귀었던 소년이자 그녀의 첫사랑인 조쉬 첸이다.
 
 

조쉬놈 사실 고향에 사귀던 여친 두고 캠프에서 레베카랑 바람피운 것임
다음 해에 나타날 리가..

 
레베카는 당장 그에게 달려가 두 사람은 십 년 만에 인사를 나눈다. 조쉬는 거리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뉴욕의 우울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삭막하고 경쟁적인 도시를 벗어나 막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실망한 레베카는 조쉬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까, 너 어디 산다고 했지?”
“웨스트 코비나,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동네야. 2시간이면 해변에 갈 수 있는 곳이지! 차가 막히면 4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햇살남주(문자 그대로의 뜻)

 
환한 웃음을 짓는 조쉬는 레베카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떠난다. 언젠가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레베카가 등장할 때마다 어두컴컴했던 화면이 처음으로 밝아진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레베카는 결심한다. 자신도 웨스트 코비나로 가야겠다고. 직장에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갈 생각인 걸까? 아니, 그녀는 로펌을 그만두고 이사를 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30년쯤 지나서 은퇴한 후에 가서 살겠다는 뜻일까? 아니, 지금 당장. 그러니까 오늘 바로 가서 살겠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된다. 레베카는 웨스트 코비나에 평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당연히 그 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조쉬와 레베카는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짧게 사귀고 헤어져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기에 조쉬는 그녀의 연고라고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와 직장과 모든 삶은 뉴욕에 있다.
 

웨스트 코비나 풍경
노래 부르면서 차에서 내리는데 야자수가 아니라 송전탑이 있음
아스팔트가 빛난다고 좋아함ㅋㅋㅋㅋ

 
게다가 웨스트 코비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살기 위해 이사하기에도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지역이다. 로스엔젤레스 동쪽에 있는 이 지역은 10만 명 정도의 인구 중 아시아 인종의 비율이 25% 정도로 비교적 높은 편이라는 걸 제외하면(극 중 조쉬도 필리핀계 미국인이다) 유별나게 특별하지도 대단히 아름답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소도시다.

 
이 작은 도시가 현관문만 열면 시원한 해변이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이상적인 휴양지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해변까지 2시간밖에 안 걸려요!’라는 <웨스트 코비나> 테마곡의  자조적인 마지막 가사로 알아차릴 수 있다.
 

해변까지 2시간밖에 안 걸려요! (왕복 4시간이자나ㅠ)

 
잘나가는 뉴욕 변호사인 레베카가 16살 여름에 잠깐 사귀었을 뿐인 전남친 조쉬를 따라서 무작정 웨스트 코비나 같은 낯선 시골 동네로 이사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더 무서운 건 정작  조쉬 본인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레베카의 로펌 상사들은 그녀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자 뉴욕의 다른 로펌 또는 시카고나 보스턴에 있는 경쟁사로 이직한다고 생각하지, 그녀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도시로 떠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앞에서 강조했다시피 레베카는 미친 여자다. 그녀는 자신을 승진시켜주겠다고 말하는 상사들 앞에서 연봉 55만 달러를 받는 로펌을 때려치우고 뉴욕 생활을 청산한다.

 

 
비행기를 타고 웨스트 코비나로 날아가 새 직장을 구하고 살 집도 찾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뇐다. “나는 조쉬 첸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게 아니야... 우연히 그가 여기 있었을 뿐이야.”


그녀는 자신이 조쉬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자신은 그저 웨스트 코비나에서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신과 시청자들에게 변명하고 또 변명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레베카: 나는 웨스트 코비나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어~~
응 뒤에 조쉬 이름 있음

 

“She’s Crazy Ex Girlfriend!”
“걔 완전 미친 전여친이잖아!”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프닝곡 형식으로 만들어진 'West Covina '
팬분이 올려주신 크엑걸 콘서트 한글 자막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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