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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느날 왕국에 잔인하지 않은 왕자가 태어났다 : 레나드 프리데일트와 지도자의 자질

 

 
힐데가르는 동쪽에서 온 아이. 저무는 해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신비로운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어린 그녀는 납치당했다.
 

 
어린 힐데가르를 태양신의 비석 위로 내쳐서 피흘리게 만든 건 남부 기사의 폭력적인 손길이었다. 기사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무심코 휘두른 팔 한쪽이 두 나라의 운명과 수많은 백성의 생사를 바꿔놓을 거라는 걸. 침략지의 꼬마였다. 아무렇게나 죽여도 뒤탈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팔을 휘둘렀다. 잔인하게 대해도 해가 되지 않는 존재였기에.


모든 것은 잔혹한 우연이었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잔혹한 운명이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사람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만사를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왜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마음에 드는 개념과 서사를 골라 동아줄처럼 꽉 붙잡을 뿐이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명사가 아니다. 주목해야 하는 건 형용사다. 모든 것은 ‘잔혹한’ 우연이었다. 또는 모든 것은 ‘잔혹한’ 운명이었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과정은 잔혹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러니 지금부터는 해석의 여지 없는 진실인 잔혹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기사는
잔인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잔인함이다. 개인은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기원을 굳이 캐묻고 악에 서사를 부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봤자 그 인물의 본성이 바뀌지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작품에는 언제나 현상 뒤에 더 큰 맥락이 숨어 있다. 이 장면의 핵심은 이렇다. 잔인한 기사 뒤에는 잔인한 부대가 있고, 잔인한 부대 뒤에는 잔인한 군대가 있으며, 잔인한 군대 뒤에는 잔인한 나라가 있다는 것.

 

기사들의 나라라는 남부 왕국. 그 나라에서 기사들은 점령지의 힘없는 아이에게 함부로 팔을 휘둘렀다. 아이는 비석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흘렀다. 자신은 그때 이미 한 차례 죽었던 거라고, 훗날 힐데가르는 회상한다.


 

 
이름 모를 부족의 빨간 머리 소녀는 비참하게 죽었다. 신의 힘이 아이가 죽은 자리를 채웠다. 왕은 당황했다. 그가 계획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왕이 원한 건 직접 태양의 힘을 몸에 담는 인간 병기가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번뿐인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는데. 왕은 빨간 머리 꼬마를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왕궁에는 이번 글의 주인공인 레나드가 살고 있다. 레나드는 현왕의 조카이자 선왕의 아들이다. 레나드의 아버지인 선왕에 대해서는 언급이 많지 않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연애결혼을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평화주의자였다. 레나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전 협정을 하러 가는 길에 북부의 피습으로 사망했다.


이 짧은 언급에서 얻어낼 수 있는 몇 가지 정보가 있다. 레나드의 아버지는 정치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던 인간이었으며, 전쟁보다는 휴전을 원하던 왕이었다. 아마 그는 별로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좀 물렁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길바닥에서 서글프게 죽었겠지.

 

 
현왕인 모르모데스는 선왕과 다르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 싶은 게 아니다. 종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겨서 끝낼 수도 있고, 져서 끝낼 수도 있다. 양측의 협상으로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르모데스는 전쟁을 그냥 끝내고 싶지 않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싶다. 그래서 신의 힘을 스스로 몸에 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놈의 기사가 휘두른 팔 때문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그놈의 팔 때문에. 요즘 말로 하자면 억까를 당했다고 모르모데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모르모데스는 왕국의 백성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척할 뿐이다. 그래야 눈앞에 있는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아이가 바로 인간 병기니까. 힐데가르를 전쟁에 나서게 만들기 위해서 그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 그녀 안에 있는 선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라는 걸 알자 기꺼이 그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는 가스라이팅의 귀재다.


어쨌든 왕궁에서 두 아이는 만난다. 왕의 조카인 레나드와 왕국의 인간 병기인 힐데가르. 둘 사이에는 까마득한 신분 차가 존재하지만 아이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수십 년간 이어지는 전쟁으로 왕국은 불안정하고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어른들이 전쟁으로 바쁜 틈에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정이 싹튼다.

 

 
이 우정을 주도하는 사람은 레나드다. 첫 만남부터 그는 힐데가르에게 동경의 눈길을 보낸다.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약한 레나드의 눈에는 다치거나 아플 때마다 스스로 치유하는 힐데가르의 능력이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녀는 그가 꿈꾸던 영웅이다.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울 수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도 있다. 숙부인 왕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다. 다정한 심성을 가진 레나드는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손쉽게 해내는 또래 친구를 웃으며 지켜본다. 마음속 깊은 곳에 질투와 부러움을 꼭꼭 감춰둔 채로.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갑작스레 끝나고 만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투에 투입됐던 힐데가르가 왕궁으로 복귀한 날, 레나드는 그녀를 붙잡고 전투가 어땠는지 묻는다. 항상 전쟁터를 동경했을 뿐 현실 전쟁의 잔인함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소년은 흥분에 차 있다. 그러나 힐데가르에겐 멋모르는 왕자님의 순진한 동경에 응해줄 여유가 없다. 전쟁터에서 끔찍한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그녀는 반쯤 이성을 잃고 그를 공격한다. 이 사건으로 레나드는 귀 한쪽과 함께 하나뿐인 친구를 잃는다.
 

 
힐데가르와 이별한 레나드는 혼자다. 그에게는 믿을 만한 동지도, 배움을 얻을 스승도, 마음을 터놓을 대화 상대도 없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고 자각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가 따뜻하게 추억하던 고모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조카에게 독을 먹여온 소리 없는 암살자였다. 숙부인 모르모데스 왕이 서로 친구나 하라고 붙여 준 또래조차도 사실은 왕국의 인간 병기이자 미래 왕의 자질을 시험하는 시험관이었다.
 

 
모르모데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왕의 자질은 태양의 힘을 다루는 것이었가. 그래서 그는 레나드가 자신처럼 힐데가르를 조종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레나드는 힐데가르를 무기가 아닌 친구로 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힘에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레나드가 한쪽 귀를 잃은 끔찍한 날, 모르모데스 왕은 조카에게 부적합 딱지를 붙이고 그를 후계자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로써 레나드는 숙부의 감시와 고모의 견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친구와 맞바꾼 자유였던 셈이다.

 

 
몇 년이 지나 아이들은 청년이 되었다. 전쟁이 여전히 한창이지만 레나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왕자의 신분이지만 도무지 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테리온이 뒤뜰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레나드 역시 차가운 왕궁에 우두커니 앉아 흘러간 일들을 곱씹는다. 힐데가르는 왜 나를 공격했을까. 우리의 우정은 어째서 그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나.
 

답답한 마음에 승마라도 해보려고 마구간에 갔을 때 생긴 일이다. 울타리 너머에서 검은 말 한 마리를 본다.
 

 
하지만 마구간지기는 그 말이 쓸모없다고 말한다. 건강한 몸을 가졌음에도 달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나드는 묻는다.
 
“세상에는 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말도 있는가?”

 
그 말이 이상한 존재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레나드는 언제나 달리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몸만 건강했더라면, 나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나도 힐데가르처럼 영웅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약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레나드는 힐데가르가 전쟁을 종식하고 돌아온 영광의 자리에서 칼을 집어 던지고 왕 앞을 떠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니까. 그런 그의 머릿속에 문득 마구간에서 본 말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래, 달리고 싶지 않은 말이란 게 있었지. 그렇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기사도 있을 수 있겠다. 힐데가르는 싸우고 싶지 않은 기사였던 걸까.


막혀 있던 생각의 흐름이 트이자, 돌풍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달리고 싶지 않은 말에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채찍질은 폭력이다. 그렇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힐데가르에게도 그 모든 기대와 요구가 폭력이었을 것이다. 레나드가 보내는 막연한 동경과 찬탄의 시선까지도 - 모두 폭력이었다.

 

 
지난 글에서 나치 전범 재판을 지켜봤다는 철학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사적 영역이 돈이나 생로병사와 같은 생활의 영역이라면 공적 영역은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와 다른 존재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요구를 수용하고 조정하며 함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어린 레나드는 자기밖에 몰랐다. 당연했다. 원래 아이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나 자라면서 아이들은 세상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와 완전히 다른 성향과 욕망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 나는 달리고 싶은 말이어도 타자는 달리고 싶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 나는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넉넉한 재산을 가졌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머리가 뛰어나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정치는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해야 한다. 사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어린아이가 아닌 공적 영역을 인식하며 스스로 그 영역에 진입한 어른이 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을 쥐는 사람들은 그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걸 가지고 많은 걸 배운 엘리트들이다. 많이 배웠을지 몰라도 그 지식으로 뭔가를 깨우치진 못한 자들이다. 레나드가 말의 눈에서 얻은 깨달음을 영원히 얻지 못할 사람들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다 못해 벗겨졌어도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오직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욕망, 나의 이해관계, 나의 기분, 나의 뜻.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다. 그런 자에게 권력을 준다면 당연히 자기를 위해 전부 다 쓸 것이다. 권력을 사유화할 것이다. 그러나 부유하고 많이 배운 자가 곧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수천만 명이나 있다. 그래서 왕위가 계승되지도 않는 공화국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흰머리 금쪽이가 왕의 자리에 올라 내란을 주도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레나드가 귀를 잃었다는 설정에 주목해보자. 캐릭터의 외형 변화는 작품 내에서 큰 사건이다. 귀를 잃는다는 것은 물리적이고 비가역적인 변화다. 이 변화는 인물을 망가트릴 수도, 성장시킬 수도 있다. 레나드에게 사라진 귀는 돌이킬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의 흔적이다. 귀가 날아가면서 레나드의 마음속에 있던 질투와 시기가 터져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추악해진 사람들의 사연을 우리는 문학과 현실에서 종종 접하곤 한다.
 
 


그러나 레나드는 추해지지 않았다. 고통받고 상처입었음에도 그는 고민하고 사유하길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알아차린다. 세상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 깨달음으로 그는 먹고, 싸고, 자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으로 진입한다. 다시 말하지만 공적 영역은 곧 정치의 영역이다. 그렇게 ‘달리고 싶지 않은 말’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레나드는 왕도(王道)에 한 발짝을 내딛는다.

 

눈을 참 잘 그리시는 작가님

 
 
물론 처음에 그는 자신이 왕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레나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왕이 되고 싶어.” 이렇게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왕이 될 거야.”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왕이 될 수도 있어.”

 

 
Want(욕구)나 Will(의지)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는 단어다. 그는 이 왕궁의 인형극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끌려다니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약해빠진 왕자님. 그게 레나드다. 모르모데스는 미덥잖은 조카가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일찍이 접었다. 왕국의 기준에서는 자격 미달이 맞았다. 그 왕국은 잔인한 왕국이고, 레나드는 잔인하지 않은 왕자였으니까.

 

 
다시 잔인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저무는 해, 시린 눈>에서 가장 잔인한 인물은 누구일까. 이 작품의 독자라면 누구나 디온 프리데일트를  떠올릴 것이다. 왕의 또 다른 조카이자 레나드의 사촌인 디온은 자주 나오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다. 밑도 끝도 없이 잔인하고 사악한 그는 등장할 때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무언가 사고를 친다.

 

 
디온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통해 독자는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1. 디온 프리데일트는 잔인하다.
2. 그의 잔인함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잔인함은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된다. 모르모데스의 잔인함에는 적어도 목적이 있었다. 그가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가스라이팅한 것에는 나라를 위해서라는 구실이 있었다. 디온의 어머니이자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알리시아도 잔인한 인물이지만, 그녀에게도 왕위를 얻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목적도 구실도 없이 잔인한 인간은 오로지 디온뿐이다. 그는 그냥 끔찍한 인간이다.

 

레나드가 이웃집 꽃미남인 작품 진짜 재밌겠다

 

디온은 사악할 뿐 유능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평민이라면 그의 손에 큰 권력이 주어질 가능성은 낮다. 레나드가 이웃집 꽃미남인 다른 작품이 있다고 치자. 이 세계에서는 디온 역시 동네 백수에 불과하다. 이런 설정 아래선 그의 잔인함이 사회적으로 크게 해롭지 않다. 길고양이나 괴롭히며 살았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개인으로 나쁜 짓을 해 체포당하고 머그샷이 찍히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왕자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디온처럼 잔인하고 무능한 인물의 손에 제한 없는 권력이 무조건적으로 쥐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파국이다. 그러나 이 왕국은 잔인한 왕국이기에 디온은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는다. 적어도 레나드처럼 배척당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지만 그것이 그의 입지를 흔들지는 못한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디온 프리데일트는 잔인하며, 그의 잔인함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만약 사회가 지금 향하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디온은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왕국은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잔인한 사회의 말로가 디온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왕국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어린 힐데가르가 왕궁에서 만난 친구 중 하나인 트리아나다. 한때 잘나가는 기사였던 트리아나는 부대원들이 점령지 아이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목격하고 욱하는 마음에 나섰다가 사형 판결을 받아 인간 병기의 살아있는 샌드백 신세가 됐다.

 

 
요컨대 그녀는 힐데가르에게 무심코 팔을 휘두른 기사와 반대편에 있는 존재다. 왕국의 잔인함을 묵과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감옥에 갇혔다. 왕국의 잔인함을 용납하지 못했기에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고 죄수가 되었다.
 

 
이 왕국은 레나드에게 독을 먹이고 트리아나를 감옥에 가뒀다. 기사들의 왕국이라는 남부는 그런 곳이었다. 전쟁에서도 이기고 구성원들 역시 그럭저럭 먹고는 살고 있었을지 몰라도, 잘 들여다보면 구석부터 중심부까지 고루 썩어 있었다. 꼭 동아시아 끝자락에 붙어 반쪽으로 갈라진 어느 반도처럼 말이다.

 
그런 왕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왕도를 걷기 시작한 레나드 왕자의 첫 번째 정치 행위는 바로 ‘사죄’다. 성인이 된 레나드는 힐데가르를 찾아가 숙부의 폭력과 자신의 오해를 정성껏 사과한다.

 

 
레나드가 왕국에서 힐데가르에게 유일하게 용서를 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깟 사죄가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정치적인 사죄다. 애초에 두 아이의 우정은 이웃사촌끼리의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둘의 만남은 고도로 계산된 정치 행위였다. 모르모데스 왕은 레나드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해 그를 왕국의 인간 병기에게 붙여놓았다. 그리고 시험 결과 조카는 충분히 잔인하지 않기에 그 잔인한 왕국의 차기 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나드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역사를 기억하며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모르모데스에게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잘못된 체제는 제대로 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인물을 내친다. 잔인한 프리데일트 왕국에서 유일하게 잔인하지 않은 프리데일트였던 레나드. 그의 유년기가 트라우마틱한 사건과 생존을 향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건 그가 잘못된 체제 아래서 자랐기 때문이다.

ㅠㅠ


 <저무는 해, 시린 눈>은 로맨스 판타지다. 작품의 배경 역시 공화국이 아닌 왕국이다. 이 세계에서 지도자는 선출되지 않으며 권력은 세습된다. 그런 나라에서 우연히도 잔인하지 않은 왕자가 태어났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레나드의 아버지가 무른 사람이라 정략결혼 대신에 연애결혼을 해서 레나드라는 사람이 탄생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레나드가 잔인한 왕국에서 견제를 받느라 외롭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인물로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 마는지.

외할아버지-어머니-아들(레나드 외탁했구나)

 

다시 강조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회가 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어린 소녀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든 그 왕국은 사실 뿌리부터 썩은 나라였다. 잔인한 기사, 잔인한 부대, 잔인한 왕실, 잔인한 왕국. 잔인한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잘못된 체제를 갈아엎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레나드가 좋은 정치인이 될 이유는 많다. 그는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이념과 함께 다정하고 너그러운 성향도 지녔다. 타자를 이해하고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공명정대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공적 삶을 위해 자신의 사적 삶을 희생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레나드의 아버지는 연애결혼을 했다. 그러나 작중 레나드는 연애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힐데가르를 사랑하지만 비비아나와 결혼해 정치적 입지를 굳힐 생각이다.

레나드가 비비아나를 이용하는 것만은 아님 둘이 썸도 잘 탐ㅋㅋ



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나드는 이웃집 꽃미남이 아니라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신념도 뚜렷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신념은 '희생'이다. 권력을 가진 자신이 희생해야만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레나드는 작품 후반부에 깨닫는다.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한때 마녀라 불렸던 영웅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이제 공은 인간에게 넘어왔다.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 인간은 더불어 살기 위해 사회를 이루고 정치를 한다. 또 다른 레나드와 또 다른 힐데가르, 상처받고 이용당하는 아이들이 다시는 없으려면 정치의 역할을 맡은 자가 소임을 다해야 한다. 자신이 왕이 되어야 힐데가르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레나드는 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을 이룬다는, 희생의 가치를 기꺼이 실천에 옮긴다. 참으로 어른다운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레나드의 베스트 컷은 2부 50화에 나온다. 어떤 장면인지는 보면 앎



골백번 강조해도 모자란 사실. 정치는 어른이 해야 한다. 주인공도 아닌 그를 위해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건 바로 그래서다. 정치는 이런 인물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연히도 그런 인물이 이 땅에 나타났다면, 그 인물이 수많은 죽음의 위협 - 생명과 정치생명 양쪽 모두가 끝날 위협을 딛고 지금의 자리에 섰다면, 그리고 그가 정말로 간절하게 평원을 달리고 싶어 하는 말이라면 그를 달리게 해주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공화국 시민들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달리고 싶은 말을 달리게 해 주자. 평원을 그에게 주자. 그가 마음껏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다.

저무는 해, 시린 눈

북부를 불태운 전쟁 영웅, 태양의 마녀 '힐데가르'.마녀에게 부모를 잃은 시린 눈의 북부인, '에르킨'.정체와 복수심을 뒤로 숨긴 채 가까워지는 두 사람.신화와 전쟁, 가호와 저주, 사랑과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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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 <저무는 해, 시린 눈>의 중/후반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3. 마음의 전쟁을 끝내는 방법: 기사의 용기와 평민의 용기

 
테리온이 쏜 화살은 마녀에게 명중한다 - 사실 이 말은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문장이 아니다. 속사정은 이렇다. "마녀가 테리온의 화살 앞에 몸을 대줬다."


한때의 친구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적으로 돌변하는 것. 힐데가르는 그런 일에 익숙하다. 8년 전 평원 대전투에서 형제자매를 잃었다고 테리온이 말했던 순간부터 그녀는 이 순간을 예상했을지 모른다. 한 번은 테리온의 화살에 맞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화살에 맞으면 죽을 만큼 아프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 죽지 않는 몸을 전쟁으로 상처받은 친구의 화살 앞에 내어주는 건 신의 힘을 가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저무는 해, 시린 눈>의 배경은 전쟁이 끝난 왕국이다. 전쟁은 왕이 일으키고 귀족이 일으킨다. 사람들을 전쟁터로 끌어들이기 위해 왕과 귀족은 이념의 씨앗을 퍼트린다. 산 너머 이웃이 어느 날 도깨비의 얼굴을 한 악마로 변한다. 평범한 소녀가 소름 끼치는 마녀가 된다. 왕과 귀족이 퍼트려 심어놓은 증오의 이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 씨앗이 어디에서 온 건지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가스라이팅의 귀재, 그의 이름은 모르모데스


전쟁을 시작하는 건 왕, 전쟁을 끝내는 것도 왕이다. 억울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그렇다. 어느 날 왕은 종전을 선언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증오의 싹은 사라지지 않는다. 씨를 뿌린 사람들은 결과물을 거둬갈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그 증오에서 이익만을 취해간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여전히 왕과 귀족이 적이라고 명명한 자들을 증오한다.

 

 
명분 없는 증오는 아니다. 전쟁으로 사람들은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일상을 잃었다. 명분이 충분한 증오는 전염성이 짙다. 그렇게 증오가 공기 중을 떠돈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계속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끈질긴 마음의 전쟁이 계속된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을 던진다. 전쟁이 끝난 땅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몸의 전쟁은 끝났지만 마음의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땅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남부는 기사들의 땅이다.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물러서지 않고 싸울 용기’다. 전투를 앞두고 겁쟁이처럼 도망치지 않을 용기. 공동체를 위해 죽음을 각오할 용기. 다수의 평화를 위해 잔인함을 감내하는 소수가 될 용기.

 


 
그러나 전쟁이 끝난 땅에서 이 용기는 효력을 잃는다. 물론 전시가 아닌 때에도 사람들은 기사의 용기를 찬양한다. 많은 이들이 기사의 용기를 원한다. 하지만 만약 모두가 기사의 용기를 가지고 서로에게 적이 되어 싸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평화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땅에 필요한 용기는 맞서 싸울 용기가 아니다. 그 반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싸움에서 물러설 용기’가 필요하다. 적 앞에서 등을 돌려 피할 용기, 겁쟁이라고 손가락질당할 용기.

 

 
이것은 기사의 용기가 아니라 평민의 용기다. 역사에 남지 않는 용기다. 사람들이 알아주기는커녕 무시하고 비웃는 용기다.


<저무는 해, 시린 눈>의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용기가 바로 이것이다. 알브레히트와 테리온 와이드헨이 아닌 에르킨과 힐데가르(카야)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자 주인공이지만 가난하고 울보에 고아인 에르킨. 그런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남부의 용맹한 기사인 테리온은 있는 힘껏 싸움을 건다. 야만적인 북부인이 당연히 자신에게 맞설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에르킨은 조용히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난다. 테리온은 그런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지만 남은 거라곤 씁쓸한 뒷맛밖에 없다. 테리온이 만들어낸 작은 전쟁터에서 에르킨이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음의 전쟁은 몸의 전쟁과는 다르다. 한쪽에서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상대에게 싸울 의지가 없다면 마음의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왕과 귀족의 전쟁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전쟁이기에 그렇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알브레히트와 힐데가르가 만났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2부 46화에는 알브레히트가 조카들의 죽음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8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그는 열띤 어투로 평원 대전투에서 조카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혀 죽었는지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생생하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이기라도 한 양. 이 장면은 알브레히트의 마음이 여전히 그 전투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군대는 이미 모두 철수했건만 그는 여전히 평원에서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브레히트는 힐데가르를 끌어내리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건다. 그녀의 눈에서 처참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볼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전진한다. 눈물을 목격한 그는 마침내 만족한다. 힐데가르를 화형대에 올려 불태울 때보다 더 큰 만족감을 그 순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의 전쟁은 마음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울리고 좋아하는 하남자! 우우우우👎🏻


알브레히트는 마음의 전쟁에서 1승을 거뒀다. 그래서 화형대에서 풀려난 마녀의 칼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내심으로는 그녀가 자신을 찔러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자신이 죽으면 친인척 중 누군가가 복수의 굴레를 이어받아 마녀를 사냥해 줄 테니까. 그를 대신해 마음의 전쟁을 계속해줄 테니까. 조카들을 아끼고 사랑하던 마음을 이미 오래전에 잃고 복수와 증오의 화신이 된 기사는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마녀는 칼을 내리고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알브레히트는 절규한다. 돌아와서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친다. 전쟁을 계속하라는 외침이다. 어림없는 소리다. 힐데가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알브레히트의 증오가 테리온에게 전염병처럼 옮겨간 걸 알고 일부러 그의 화살에 맞아주기까지 한 그녀가 이런 시시한 도발에 넘어갈 리 없다.
 
 
그녀는 알브레히트를 두고 가버린다.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는 중인 미친 기사가 불구덩이 속에서 괴로워하도록 내버려 둔 채.

 


"...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행한 최고의 복수였다." 이런 뒷이야기는 필요하지 않다. 힐데가르에겐 복수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전쟁을 끝내는 일이었으므로.

 
태양의 힘을 담은 그릇이던 시절, 그녀는 죽어도 죽여도 죽지 않는 몸으로 전쟁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무수한 증오를 받아냈다. 탑에서 떨어지고, 칼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화형대에서 불탔다. 그렇게라도 그녀는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전쟁의 잔해 - 증오의 굴레를 끊어내고 싶었다.
 
 
에르킨이 힐데가르를 부모의 원수로 여기며 원망을 쏟아낼 때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한다. 그의 부모를 직접 죽이진 않았어도 자신은 북부인인 그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문자 T여자를 사랑하게 된 대문자 F남자

 
모든 건 잔혹한 우연이었다. 힐데가르는 태양의 힘을 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성장한 소녀는 세상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배우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좋은 것이라곤 기사의 용기밖에 없었다. 그 용기를 발휘해서 끝까지 싸웠다. 도망치지 않고 싸웠다. 기사답게 싸웠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싸웠다.

 

모든 건 잔혹한 운명이었다. 평범한 기사인 테리온과 달리 힐데가르는 난세의 영웅이다. 영웅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다. 북부와 남부, 하나가 이기면 하나는 진다. 하나가 살면 하나는 죽는다.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 하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힐데가르는 얼굴도 모르는 북부인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그리운 고향민들의 운명과 친구 레나드의 안위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부의 편에 섰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존재는 '태양의 기사'뿐이라는 모르모데스 왕의 믿음에 부응했다.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했다.

 
영웅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선택을 요구하다니. 그래놓고 고통은 알아서 감당하라니. 얼마나 잔인한가. 잔인함의 대가로 남부는 승리를 거뒀다. 고로 쓸모 있는 잔인함이었다고 왕국의 위정자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힐데가르는 잔인했던 선택이 남긴 상처를 받아들인다. 꼬마였던 자신이 왜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억울함은 가슴 깊숙이 밀어놓은 채. 영웅인 그녀는 묵묵히 짐을 짊어진다. 모두를 원망할 수 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해 봤자 마음의 전쟁은 끝나지 않으니.


이 점이 알브레히트와 힐데가르의 근본적인 차이다. 조카들의 죽음에는 분명 알브레히트의 책임도 있었다. 비록 그에게 악의는 없었을지라도, 그 역시 용감한 기사였고 조카들도 그렇게 키우고 싶었을 뿐이라도. 아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태양의 기사를 자유롭게 풀어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갓캐들을 만들고....죽이는...작가란 무엇인가


벌어질 일은 이미 벌어졌다. 모든 책임은 태양의 마녀에게 있다고, 알브레히트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은 그녀라고. 그녀를 불태우고 나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그런 그에게 마녀가 묻는다.

"
후회하고 있나? 알브레히트 와이드헨."
 

 
마녀는 역시 마녀다. 한 마디 질문으로 그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그는 후회했어야 했다. 1%의 책임이라도 자신에게 있음을 통감하며 눈물을 흘렸어야 했다. 조카들을 위해 울었어야 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운 다음 가족들을 위로했어야 했다. 살아 있는 두 아이, 테리온과 린디아를 돌봤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모든 걸 태양의 마녀 탓으로 돌리고 그녀를 상대로 고독한 전쟁을 계속했다. 자신의 삶이 폐허가 될 때까지. 테리온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지고 린디아의 목에서 비명이 새어 나올 때까지.

 

 
그러나 힐데가르는 싸울 생각이 없다. 태양의 마녀에게 화살을 날려 형제자매의 원수를 갚은 테리온도 더는 싸울 의지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젊은이들은 늙은이들보다 현명하다. 마음의 전쟁은 이 아이들의 손에서 마무리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알브레히트는 적어도 한 가지는 옳게 봤다. 마녀를 화형대에 올리자 모든 게 끝났다. 불길은 태양의 기사를 태워 끝장냈다. 신의 힘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왕이 그녀에게 억지로 떠넘긴 '힐데가르'라는 신의 이름도 함께 불타 사라졌다.

 


신의 힘을 잃은 그녀는 인간일 뿐이다. 한 번뿐인 생을 사는, 하나의 목숨을 가진 인간. 이제 화살에 일부러 맞아 주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 하고 싶지도 않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런 식으로 쓸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신만이 할 수 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인 그녀는 살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신의 힘을 원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원한 적 없는 힘이었다. 기사의 용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또한 원하지 않는 용기였다. 원치 않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서도 그녀는 충분히 용감히 싸웠다. 몸의 전쟁을 앞장서서 끝냈고 마음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했다.


지상으로 내려온 태양의 신은 자신의 모든 걸 땔감으로 삼아 활활 타올랐다. 잿더미만 남을 때까지 타올랐다. 잿더미 위에서는 새싹이 움트는 법. 겨울이 오면 농부들은 한 해 농사의 부산물을 태우기 위해 들불을 지른다. 찌꺼기가 모두 불타면 이듬해 봄에 그 재를 영양분 삼아 씨앗을 심을 수 있다. 그러니 잿더미는 폐허가 아니다. 새로운 봄을 위한 밑거름이다.

 

잿더미 위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카야에게 남은 것은 평민의 용기. 이것은 에르킨의 용기다. 에르킨은 힘없는 평민이다. 원수를 죽이지도 용서하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사람이다. 모욕을 당해도 이를 깨물고 자리를 피한다. "겁쟁이 자식." 테리온의 말대로다.


그러나 이 겁쟁이는 강자 앞에서 겁을 상실한다. 권력의 손에 끌려가 목숨을 위협받아도 물러서지 않는다. 칼날 앞에서도 고개를 치켜들고 옳은 말을 한다. 언제까지나 카야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하나뿐인 생명을 걸고 그렇게 한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나치 전범 재판을 치켜봤던 한 철학자는 '악이란 진부한 것'이라는 통찰을 내놨다. 에르킨이 선한 인물인 이유가 악에 대한 이 정의에 있다. 그는 평범하지만 진부하지 않다. 약하지만 나약하지 않다. 겁쟁이지만 권력에 겁먹지 않는다. 가난하지만 목숨이라는 유일한 재산으로 중요한 걸 지킨다. 매 순간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판단한다. 그 판단의 결과로 상처 입어도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기사의 용기를 가진 힐데가르가 그랬듯이. 평민의 용기와 기사의 용기는 결국 같은 본질을 공유하기에.


모두가 힐데가르를 마녀라 말하며 불태운다면, 잿더미에 자신을 묻어서라도 그녀의 곁에 있겠다던 그가 보여준 건 평민의 용기였다. 기사의 용기밖에 알지 못한 채 전쟁의 고통을 홀로 견디던 그녀에게 평민의 용기를 알려준 사람. 함께 살아가자고 말해준 사람. 카야에게는 에르킨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알브레히트를 남겨두고 등을 돌려 떠난다.


복수하지 않는다. 증오하지 않는다. 미안해하지 않는다. 신의 힘을 몸에 담고 왕의 전쟁에 나섰던 것이 죄라면 그녀는 모든 죗값을 치렀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들의 황혼 뒤로한 채 달려간다. 인간의 시대를 향해 달려간다. 더 이상 불타는 그녀를 식혀주는 ‘시린 눈’이 아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전하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이 후기를 쓰며 2025년이 된 이래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예술은 정말 좋은 거야



(쓰다 보니까 레나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져서.. 4편이 나올 예정)

저무는 해, 시린 눈

북부를 불태운 전쟁 영웅, 태양의 마녀 '힐데가르'.마녀에게 부모를 잃은 시린 눈의 북부인, '에르킨'.정체와 복수심을 뒤로 숨긴 채 가까워지는 두 사람.신화와 전쟁, 가호와 저주, 사랑과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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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 <저무는 해, 시린 눈>의 중/후반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강함과 약함, 파괴와 돌봄 - 힐데가르와 에르킨

 

<저무는 해, 시린 눈>의 남자주인공 에르킨. 그는 로맨스 장르에서 전통적으로 여자 주인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속성을 가진 인물이다. 치유의 힘과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 무력보다는 지력으로 승부하는 캐릭터다.

 

"그래도 사람은 착혀~"의 대명사

 
네이버의 유명 로판 작품인 <마른 가지에 바람처럼>의 캐릭터들과 비교하면 성별이 반전된 에르킨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마른 가지>에서 남자 주인공은 영지를 가진 성주이자 기사이고 여자 주인공은 치유의 능력을 가진 평민이다.

 

그나마 덜 오글거리는 표지로 가져옴

 
반면 <저무는 해, 시린 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치유의 능력을 가진 고아이자 평민이고, 여자 주인공은 강력한 힘을 가진 기사이자 성주다. 이처럼 에르킨은 여성향 로맨스 남자 주인공의 기본 소양인 '재력, 무력, 권력'의 3요소 중 어느 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캐릭터다.
 

또한 에르킨은 작중에서 얼음과 눈의 땅인 '북부' 출신이지만 로판 장르의 주요 클리셰인 '북부 대공'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 북부 대공은 일반적으로 출신에 걸맞게 차갑고 무감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에르킨은 작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다. 여타 북부 대공들처럼 부유하지도 않고 귀족도 아니다.

 

일반적인 북부대공남주 x 햇살여주 이미지(구글에서 찾은 표지일 뿐 작품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봤을 때 그는 요즘 여자들의 기호에 잘 맞는 성별 반전 로판 남자주인공 캐릭터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에르킨이라는 인물이 보기 좋은 다정함만을 모아 놓은 양산형 로판식 #다정남 #대형견남 #순정남 캐릭터에 불과했다면 이 작품으로 이런 긴 후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가는 단순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상가'라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한 바 있다. 사실 나는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막되먹은 사상을 가지고 뛰어난 작품을 썼던 작가들이 있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만 해도 마가렛 미첼이나 키플링 등 여럿이다. 하나는 노예제 옹호론자였고 하나는 제국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창조하고 기록한 이야기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대단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 오하라에게 신들의 황혼을 언급하지만 뇌가 청순한 스칼렛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다. 신들의 황혼에 대해서는 다음 편 참고

 

작가로서의 재능과 사상가로서의 재능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훌륭한 이야기꾼은 자신의 가치관을 어떤 식으로든 작품 속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차가운 땅에서 온 푸른 눈의 다정한 청년 에르킨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쟁이 끝난 땅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이 작품처럼 말이다.

 

 

<저무는 해, 시린 눈>의 주요 배경은 전쟁이 끝난 왕국이다. 오랜 전쟁을 남부의 승리로 끝낸 주역은 이 작품의 여자 주인공이자 '저무는 해'가 상징하는 인물인 힐데가르다. 불로불사의 능력과 태양의 힘을 지닌 그녀는 이 작품에서 '강함'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힘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태양의 힘은 부수고 상처 입힐 수 있을 뿐 돌보거나 치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왕국에서 그녀는 시한폭탄 취급을 받는다. 파괴하는 행위에만 특화된 그녀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태양의 마녀 덕분에 전쟁은 끝났다. 남부는 승전했다. 북부는 패전했다. 남부와 북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전쟁은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저무는 해, 시린 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직, 간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했으며 주요 인물들은 모두 크고 작은 전쟁 PTSD를 가지고 있다.

 

 

힐데가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우연한 사건으로 태양의 힘을 얻었다. 힘 때문에 고향 땅에서 납치당해 왕국의 무기로 잔인하게 이용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런 그녀는 남은 삶에 아무런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은 무감한 상태로 오지 않는 죽음을 기다린다.

 

 

죽음의 고통은 날마다 찾아온다. 그러나 그녀는 죽을 수 없다. 매일 저녁 서쪽으로 지지만 아침에는 다시 동쪽 하늘로 떠오르는 것이 태양의 속성이니. 밤이 오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동이 트면 다시 타올라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의 몸으로 태양의 힘을 담게 된 그녀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녀는 이 고통이 저주라고 생각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전쟁터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든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힐데가르가 은거하는 '이름 없는 성'은 원래 수도원이었다고 한다. 작중에서 '이름 없는 성'은 여러 번 강조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뛰어난 작가들은 이름 하나 허투루 짓지 않는다. 이름 없는 성에는 왜 이름이 없을까. 왜 그 성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그토록 자주 나오는 걸까.

 

이름 없는 성 전경(이래 봬도 배산임수)

 

힐데가르에게는 마지막 전투까지 함께 싸웠던 '이네스'라는 이름의 부관이 있었다. 평민 출신인 이네스의 꿈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성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힐데가르를 따르면서 그 꿈은 전쟁이 끝나면 힐데가르의 성에서 함께 남을 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바뀐다.

 

이네스 경...내 최애...가슴이 박박 찢어져요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 힐데가르의 곁에는 이네스가 없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녀는 죽었다. 힐데가르와 함께 싸우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수많은 동료 기사들처럼 이네스 역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름 없는 성은 이네스의 성이다. 평화를 되찾기 위해 힐데가르가 죽여야 했던 사람들의 성이다. 그녀를 위해 죽어야 했던 사람들의 성이다. 이 성에 스스로를 가둔 힐데가르는 날마다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을 홀로 감내하면서 먼저 떠난 사람들을 추모해 왔다. 이것이 그녀가 가진 전쟁 PTSD다.

 

 

북부인인 에르킨은 그런 힐데가르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돌봄'과 '나눔'이라는 가치를 평생에 걸쳐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처음에 힐데가르는 그가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에르킨의 다정함을 힐데가르는 이해하지 못한다. 힐데가르가 죽을 게 뻔한 말(🐎)을 왜 굳이 살려야 하냐고 질문하자 에르킨은 그 말이 소년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힐데가르가 내 것을 왜 타인에게 나누는지 이해하지 못하자 에르킨은 그들이 자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힐데가르는 강하고 에르킨은 약하다. 힐데가르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지만 에르킨은 싸움도, 수영도 못하는 평범한 서민일 뿐이다. 힐데가르는 웬만해선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에르킨은 작품에서 수없이 눈물을 흘린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운다. 독자들이 기대하는 멋진 로판 남주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에르킨은 남주치고는 압도적으로 인기가 없다(캐릭터 인기투표 결과).

 

작가님 솔직히 말해봐요 얘 울리는 거 좋아하시죠

 

아무리 저물어도 다시 떠오르는 뜨거운 태양인 힐데가르와, 한 번 녹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차가운 눈인 에르킨. 강력한 태양과 연약한 눈송이. 이것이 둘의 관계다. 겉으로는 그렇다.

 

바로 이 구도처럼

 

작품의 2부에서 에르킨은 마침내 부모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된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한 과거 앞에서 그는 눈앞의 원수에게 칼을 꽂을지 고민한다. 그러나 끝내 원수를 죽이지 못한다. 대신 두 눈을 들어 진실을 마주한다. 당장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원수 역시 실은 끔찍한 전쟁의 죄 없는 피해자이며 희생자라는 사실을.

 
"세상이 너무 끔찍해. 너무 끔찍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난 끝까지 칼을 놓지도 못했어요. 속 시원하게 복수하지도, 완전히 용서하지도 못하겠어! 내가 너무 나약해요!"

 

작가님...노벨상 드려야 한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에르킨은 자신의 약함을 비관한다. 하지만 힐데가르는 이제 에르킨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 에르킨을 보며 '바보 같다'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죽일 수 있지만 굳이 죽이지 않는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내 것을 나눠준다. 그녀는 에르킨을 사랑하면서 점점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힐데가르는 에르킨에게 이렇게 말한다.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향해 가는 네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강함과 약함의 경계는 부서지고 흐트러져 뒤섞인다. 힐데가르는 강하고 에르킨은 약하다. 힐데가르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두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 모두는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에르킨은 그런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고 치료했다. 그녀는 적국의 장수였다. 이 돌봄으로 북부의 운명이 바뀌었다. 에르킨의 운명도 달라졌다. 무서운 일이다. 선의로 행한 일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결과로 돌아오다니. 그러나 작중에서 에르킨이 과거 일을 후회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힐데가르가 적국의 장수라는 사실을 어린 에르킨이 알았어도 그는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을 힐데가르가 알고, 에르킨이 알고, 독자도 안다. 에르킨은 그런 사람이니까. 돌보고 나누고 돕는 사람이니까. 힐데가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건 그래서니까.

 

 

그녀가 더 이상 그를 약하다고 여기지 않게 된 건 에르킨의 가치관인 ‘돌봄’과 '나눔'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따뜻함을 그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적장을 사랑하게 된 남자. 신분을 숨긴 여자. 파괴의 힘을 가진 여자, 치유의 힘을 가진 남자. 이처럼 <저무는 해, 시린 눈>은 로맨스 장르의 오랜 클리셰를 때로는 활용하고 때로는 비틀어 뒤집으며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 승리를 이뤄냈다. 사람들은 그녀가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영웅인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였다. 전투에 나가본 적도 없고 싸울 줄도 몰랐다. 적국 사람들의 비아냥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원수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는 약한 사람이었을까.

 

 

파괴의 힘은 강하고 돌봄의 힘은 약한 것일까. 파괴의 힘만을 추구하다 보면 모두의 인생이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말 텐데. 그렇기에 힐데가르가 에르킨을 사랑하며 필요로 하는 것인데.
 

물론 에르킨도 힐데가르를 필요로 한다. 그녀에게는 그에게 없는 힘이 있다. 태양의 힘을 말함이 아니다. 인간 힐데가르가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며 경험으로 터득한 힘이다.
 

전쟁터에서 그녀는 한 번 머뭇거렸다. 단 한 번일 뿐이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걸 잃었다. 돌로 얼굴을 찧으며 처절하게 후회했다. 이날 이후로 그녀는 망설이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는다. '망설임은 죽음을 부르며, 때로는 단호함이 자비가 될 때도 있는 법'이라는 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전쟁터의 법이며 기사의 법이다. 힐데가르의 결단력은 기사로 살아본 적 없는 에르킨이 가지지 못한 자질이다. 자신에게 결여된 힘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그는 끌릴 수밖에 없다.

 
태양은 열기를 식혀줄 냉기를 원한다. 힐데가르에게 에르킨이 필요하다는 건 작품을 보는 모두가 안다. 그러나 눈에게도 냉기를 가시게 할 따뜻한 태양의 열기가 필요하다. 비록 그 열기가 눈을 녹여 사라지게 할지라도.
 

작가님..에르킨 죽이진 않으실 거죠? 에이 설마

 

저무는 해와 차가운 눈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인간에게 상처를 주는 끔찍한 사건이다. 살고 싶다면 상처를 딛고 나아가야 한다.

 

2부는 진짜로 정병 안 오게 이 꽉 물고 봐야 함. 과장이 아니라 2부 30화 보고 밤새 잠을 못 이뤘음

 

전쟁이 끝난 땅에서 눈은 녹고 태양은 식는다. 남은 것은 언뜻 폐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신화는 예고하고 있다. 태양과 눈을 상징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덕에 땅에는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설산은 녹아 강이 되며-
그것이 지상의 비옥한 첫 봄이 되었다.”

 

현실에도 봄이 왔으면 좋겠다!! 언제 오냐 대체!!

 

지상에는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것임을.

 

2.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 테리온 와이드헨과 선택의 딜레마

 

 

알브레히트 와이드헨. 남부 왕국의 기사단장인 그는 8년 전 평원 대전투에서 사랑하는 세 조카를 잃었다. 부대를 지휘하는 태양의 기사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조카들은 오지 않는 후발대를 기다리며 선두에서 싸우다가 영문도 모른 채 찢기고 밟혀 죽었다.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그의 제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은 후 미쳐버리고 말았다.

 

 
알브레히트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자 그는 이름 없는 성에 자신의 수족인 조카 테리온을 보낸다. ‘태양의 기사’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녀를 마녀로 만들기 위해서. 마녀 사냥을 시작하기 위해서.

 
 

테리온 와이드헨은 남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인 '와이드헨'은 예로부터 왕가를 보필해 온 기사 가문이다. 왕의 최측근이지만 왕위를 탐내지는 않는, 권력을 지키는 감시견과도 같은 충직한 기사.

 

 

그에게는 원래 세 명의 손위 형제자매가 있었다. 나이 차가 큰 두 형과 누나는 모두 훌륭한 기사였기에 그에게는 별다른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린 테리온은 뒤뜰에서 꽃과 새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는 조용하고 섬세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금손 테리온
테리온은 확신의 infp라고 생각합니다. 주변 잉뿌삐들하고 성격이 똑같음


그러나 전쟁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가문의 기둥이었던 두 형과 누이는 8년 전 평원 대전투에서 한꺼번에 전사했다. 하루아침에 장남이 된 어린 테리온은 형제들처럼 기사가 되어 북부인을 모두 처단하고 가족을 지키겠다고 결심한다. 그림을 그리던 관찰 실력으로 검술을 익힌다.

 

애들을 무슨 와랄라 갓기천사처럼 그려놔서 더 가슴이 아파

 

하지만 그가 기사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쟁이 끝나버린다. 사라졌다 돌아온 태양의 기사가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멋지게 갑옷을 입고 귀향했지만 미쳐버린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스무 살 테리온은 막막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가슴에 품고 '이름 없는 성'에 왔다.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북부인들을 만나본 적조차 없는 그의 눈앞에 에르킨이 나타난다. 테리온은 혼란스럽다. 평생 북부인을 적으로 여겨 왔건만, 눈앞의 에르킨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악마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테리온이 상상으로 그린 북부인의 모습

 

작품이 진행되며 테리온은 끝없이 고뇌하고 흔들린다. 자신이 충성하는 숙부의 편에 서야 할까.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준 힐데가르의 편에 서야 할까. 힐데가르는 그의 원수다. 그러나 누이와 형제들을 전쟁에 내보낸 건 숙부를 비롯한 가족들이 아니었던가. 전쟁에 나간 이상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 있었다. 힐데가르에게 책임을 무는 게 옳을까.

 

 

뒤뜰에서 그림을 그리던 소년은 모든 것을 신중히 관찰하며 실은 이미 진실에 도달했다. 숙부는 사적인 복수심으로 명분 없는 마녀 사냥을 하고 있다. 태양의 기사는 잔인한 전쟁귀가 아니라 타의로 전쟁에 투입된 소녀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실이 쉽게 보인다. 그러나 그 진실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테리온의 곁에는 ‘선택’이라는 주제가 항상 떠돈다. 테리온의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언젠가는 너도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힐데가르도, 힐데가르의 하녀인 헤이시도, 알브레히트의 심복인 가레인도 그렇게 말한다. 다들 무언가를 선택하며 사는 거라고. 너도 다르지 않다고.
 

 

테리온은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비현실적인 힘을 가진 힐데가르나 극적인 다정함을 가진 에르킨과는 달리 그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누구보다도 현실의 우리를 닮았다. 우물쭈물하며 망설이고, 너무 많이 고민한다. 큰 힘과 권력을 가진 인물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며, 책임 앞에서 겁쟁이처럼 도망친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선택을 유보한다. 마치 우리들처럼.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이 가진 낭만적이고 달콤한 어감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에 서는 건 조심스럽고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한국 사회가 독재냐 민주주의냐의 기로에 서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선택하지 않겠다는 선언조차도 선택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461048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 같은 건 없다고. 작중 테리온은 ‘나는 아직 선택하지 않은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어영부영 숙부의 마녀 사냥에 동참한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다. 테리온은 전설 속 기사도, 위대한 영웅도 아닌 평범한 청년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역사에 연루된다. 역사적 사건은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다.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어떤 사건에 개입할지'가 아니라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뿐이다. 오직 그뿐이다.


테리온은 운 나쁘게도 마녀 사냥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고 말았다. 스무 살. 축제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가슴 떨리는 연애를 시작할 나이. 원하는 꿈을 좇으며 희망찬 앞날을 그릴 나이. 마녀 사냥이 시작됐다. 발을 뺄 수는 없다. 가문의 앞날이 달려 있다.


기차는 달려간다. 그 끝이 아득한 절벽인지 안전한 역인지는 알 수 없다. 테리온은 기차가 싫다. 그는 걷고 싶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역을 떠났다. 기차가 싫다고 뛰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간혹 그런 이들이 나타난다. 영웅이거나 미친놈이거나. 하지만 테리온은 평범한 사람이다. 내키지 않지만 기차에 계속 타있는다.

 

 
그의 눈앞에 마녀가 나타난다. 양자택일의 순간이 와버렸다. 화살을 쏠 것이냐 말 것이냐. 사실 답은 이미 내려진 지 오래다.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숙부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입장이 테리온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힐데가르를 향해 화살을 쏜다.


화살을 쏘는 테리온의 뒤에는 가문과 숙부의 그림자가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라'는 힐데가르의 조언을 그는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걸까.

 

꽁꽁 얼어붙은 저해시눈 위로 테리온이 걸어갑니다🐈

 

(..쓰다 보니 징하게 길고 유료분 내용도 포함돼서 다음 편으로 넘어가기로 함)

저무는 해, 시린 눈

북부를 불태운 전쟁 영웅, 태양의 마녀 '힐데가르'.마녀에게 부모를 잃은 시린 눈의 북부인, '에르킨'.정체와 복수심을 뒤로 숨긴 채 가까워지는 두 사람.신화와 전쟁, 가호와 저주, 사랑과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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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 <저무는 해, 시린 눈>의 초반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이 나고 자란 곳은 북쪽의 차가운 땅. 그 땅에는 남색 머리에 푸른 눈, 굵은 뼈대를 가진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소년의 고향인 북부는 이웃 남부와의 오랜 전쟁 끝에 패전한 상태다. 북부 연합국은 사라지고 남부 왕국 '모르메라타'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으로 소년은 부모를 잃었다. 고아가 된 소년은 친숙한 고향 마을을 떠나 한때 적국이었던 남부로 떠난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보다는 채집이 좋았던 소년은 부모에게 배운 기술로 약제사가 되어 생계를 꾸려나간다. 한때 적국이던 북부의 고아 소년에게 남부 사람들이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따뜻하고 정직한 마음씨를 가진 소년은 이웃과 친구를 사귀며 남부에 정착한다.


뛰어난 약제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청년 '에르킨'의 앞에 어느날 정체불명의 의뢰인이 나타난다. 의뢰인은 한 환자의 병증을 대며 약 처방을 요청한다. 환자는 마을 근처에 있는 '이름 없는 성'의 성주.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다. 의뢰인은 에르킨에게 수수께끼처럼 오직 증상만을 알려준다.

 

 
말도 안 되는 요구다. 환자를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약을 처방하라니. 그러나 에르킨은 이 기묘한 요구를 받아들여 성주의 의원이 되기로 한다. 부모님의 원수이자 남부의 전쟁 영웅인 '태양의 마녀'에게 가까워질 기회였기 때문이다.
 

 
에르킨은 전쟁 중 부모님을 불타 죽게 만든 태양의 마녀에게 깊은 복수심을 품고 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적국인 남부까지 온 것도 사실은 그녀 때문이다.

 
그러나 패전국의 고아인 그가 왕이 아니면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신비로운 전쟁 영웅을 직접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에르킨은 이름 없는 성의 성주를 치료하는 의원이 된다. 귀족의 눈에 들어 힐데가르에게 접근하겠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은 채로.
 

 
이름 모를 성의 성주는 3층 침실에만 기거한다. 에르킨은 약제를 처방할 수는 있지만 성주를 직접 만나서 진단을 할 수는 없다. 3층은 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당연한 클리셰지만 성주의 정체는 에르킨의 원수이자 전쟁 영웅인 '힐데가르 아일리우스'가 맞다. 그녀는 상처가 나도 저절로 낫고 몸이 두 동강 나도 죽지 않는 불로불사의 존재다. 태양의 힘인 '광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는 십 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홀로 전장을 누비며 남부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그녀는 지금 어찌 된 영문인지 시골의 작은 성에 유배당하다시피 은거하고 있다. 게다가 원인 모를 병증으로 밤마다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힐데가르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최측근인 기사 '그리셀다'와 하녀인 '헤이시' 그리고 일부 왕족뿐이다. 대중 앞에서는 항상 가면을 착용한다. 가면은 어린 나이부터 전쟁에 투입되었던 그녀의 왜소한 몸을 감추고 대중에게 위압감을 주며 그녀를 사람이 아니라 ‘전쟁 아이콘’으로 만드는 수단이기도 했다.  
 

 
힐데가르는 가면 없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에르킨이 '이름 없는 성'에 온 첫날 밤, 약 덕분에 오랜만에 병증 없이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무심코 성을 돌아다니다가 에르킨을 마주치고 만다. 물론 맨 얼굴로 말이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본 에르킨을 당장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살인을 잠시 유보한다.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에르킨은 당연히 모른다. 힐데가르를 성주의 하녀로 착각한 그는 그녀에게 이름을 묻는다. 본명을 말할 수 없었던 힐데가르는 마침 눈에 띈 태양신 ‘카리야’의 조각상에서 따온 ‘카야’라는 이름을 즉석에서 지어낸다.

 
에르킨의 고향인 북부가 땅의 신 '누메타스'를 섬긴다면 힐데가르의 고향인 남부는 태양의 여신 '카리야'를 섬긴다. 카리야는 인간에게 불과 문명을 선사한 신이자 전쟁과 불멸의 여신이기도 하다.
 

 
자신도 모르게 원수를 치료하게 된 북부 남자 '에르킨'. 그리고 전장에서 수없이 살해했던 북부인의 손에 목숨을 맡기게 된 남부 여자 '힐데가르(카야)'.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남주라 그런지 감이 좋구나

 
평생 타인을 돌보며 치료사로 살아온 에르킨과 기사의 신분으로 전장을 누비며 살아온 힐데가르. 그들은 서로가 낯설다. 그러나 어쩐지 불쾌하지 않은 낯섦이다. 증오를 감춘 남자와 정체를 감춘 여자는 평화로운 변방의 성에서 함께 지내며 점점 서로에게 이끌린다.

 
가정사도 나누고,

소소한 모험도 함께한다.

 
위험에서 보호해준다는 핑계로 스킨십도 하고

 
야심한 밤에 따로 만나서 대화도 나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고,

 

 
그녀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죽이려고 도끼 든 거 아님; 장작 패려고 든거임

 
그들은 어느덧 선물을 주고받고, 약속을 나누고, 서로를 의식하는 관계가 된다. 하지만 힐데가르는 알고 있다. 자신이 '태양의 기사'라는 사실을 밝히는 그 순간 이 다정한 관계는 깨어진다는 사실을.

 

 
그렇게 아슬아슬한 평화를 이어나가던 두 사람 앞에 어느 날 젊은 기사가 나타난다.


 
귀족 가문의 자재인 이 남자는 왕이 태양의 기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보냈다고 주장하며 그대로 성에 눌러앉는다. 그러나 남자의 말은 궤변이다. 불로불사의 존재는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기사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단은 그도 불타는 청춘이기에 하녀인 척 성을 돌아다니는 카야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 여기까지는 2020년부터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저무는 해, 시린 눈>의 초반 줄거리다. 대충 흑발남주 x 먼치킨여주 클리셰 범벅 양산형 로판 중 하나처럼 보인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연재가 시작된 지 4년이 지나 거의 완결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에서야 이 작품을 접했다. 그마저도 12.3 내란이 아니었으면 읽어보지 않았을 작품이다.
 

탄핵 가결 안했음 수괴 임기 800일 넘게 남음 ㅁㅊ

 
2024년 12월은 참으로 심란한 한 달이었다. 원래 <위키드> 시리즈를 열심히 읽고 리뷰를 쓰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내란 이후로 순문학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계엄시국에 파시즘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패배하는 민중의 이야기인 위키드? 응 스트레스 받아서 죽을게) 오랜만에 이것저것 웹툰과 웹소설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 작품.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손을 댔다. 그냥 딱 킬링타임용 로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200화를 단숨에 읽었다. 유료분을 보기 위해 웹툰 앱을 다시 깔고 탈퇴했던 아이디를 살렸다. 그렇다. 나는
 
계엄 시국에 그만
 
인생작을 찾아버리고 말았다.
 

내란수괴야 너도 내 인생에 0.000000000001%나마 도움을 주는구나? 하나도 안 고마워

 
좋은 작품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준다. 그러나 다 읽은 다음에는 현실을 깨닫게 해 준다. 이 작품 덕분에 고맙게도 며칠 동안 내란성 우울증을 잊을 만큼 완벽하게 행복했다(작가님 감사해요). 그러나 마지막 연재 분량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작품이 단순히 현실도피를 위한 양산형 로판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가볍게 소비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이었으므로.
 

헤이시랑 레나드랑 먼 친척이라서 얘네 둘이 묘하게 닮은 걸 볼때마다 작가님이 존나 천재 같아 이 정도면 그림의 신 아니냐고

 
<저무는 해, 시린 눈>은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속하지만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다룬다. 한국인이라면 어딘가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남부’와 ‘북부’, 그리고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자연스레 6.25를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이 끝난 뒤 분열된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증오 역시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연상시킨다. 무지에서 비롯된 혐오에 물든 아이들, 자식이 용감한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머니, 남부와 북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청년 등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가레인이 주인공인 스핀오프를 보고 싶다

 
작가는 모든 인물을  놀라울 만큼 신중하게 다룬다. 흐릿한 인상의 하녀부터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문지기까지 모두에게 자신의 입장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다. 왕족, 귀족, 기사, 평민, 북부인, 남부인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한다. 이야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억지로 끌려 나와 이용당하는 캐릭터는 이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을 보는 독자는 모든 인물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가 곧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캐릭터를 무작정 연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여전히 악인은 악인이고 배신자는 배신자다. 그러나 그의 행보와 감정이 작품 내에서 충분히 설명된다면 독자는 그 캐릭터를 하나의 입체적인 '인물'로서 바라볼 수 있다. <저무는 해, 시린 눈>이 바로 그 일을 해내는 작품이다. 한 작가가 만들었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단단한 세계. 오랜만에 긴 후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정말 좋은 작품을 만났다.
 

잇츠 주접타임

 
이 댓글처럼 만신은 한국에서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만신의 예명은 MURO. <저무는 해 시린 눈>은 그의 데뷔작이다. 어떻게 이런 완성도 높은 작품이 데뷔작일 수 있니.... 세상에는 넘볼 수 없는 천재들이 진짜로 존재하는구나 싶고ㅜㅜ 진짜 이런 거장들이 세상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니까 장르 가리지 말고 이것저것 찍먹해봐야 행복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겠구나 싶고ㅠㅠ 아니 대체 무로 작가님은 대체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길래 이런 걸 그려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만화 그려 주셔야 합니다... 단행본 꼭 내주시고....
 

무덤에 들어갈 때 끌어안고 갈거야....단행본...

 
주접은 이만 떨고 내란 시국에 찾은 나의 인생작, <저무는 해, 시린 눈>에 대한 리뷰를 시작해 보겠다.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 창을 끄고 바로 네이버로 넘어가서 1화부터 쭉 완독하기를 권한다. 완결 나기 전에 꼭 보길 바란다. 후회 없는 시간이 될 테니까. 이래 봬도 강풀 순정만화 시절부터 유명작들 실시간으로 달리는 것도 부족해서 네이버 베도랑 다음 리그까지 챙겨봤던 웹툰 고인물의 추천이다...진짜 꼭 보세요 왜안보냐고 이 리뷰 당장 끄라고 난 혼자서 왈왈거릴 거니까

 

얼른 가세요
⬇️⬇️⬇️아래 링크로 ⬇️⬇️⬇️ 

https://m.comic.naver.com/webtoon/list?titleId=746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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