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중인 블로거 분이 쓰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후기를 읽고 갑자기 삘 받아서 쓰는 후기(정작 마지막으로 바함사를 읽은 건 언제였지..코로나 때였나? 그것도 유튜브에서 오디오북(이라고 쓰고 자장가라고 부른다)으로 부분부분 들었기 때문에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대목들이 있을 수 있겠다. 언젠가 쿨타임 차면 또 읽을 테니 그때 수정해야지 뭐
1. 그 어떤 연인의 사랑보다 강렬한, 스칼렛을 향한 멜라니의 사랑

멜라니 윌크스는 '온화하고 착한 숙녀'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진 등장인물이다. 실제로도 그녀는 누구에게나 다정한 외유내강 여성의 표본이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인물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붓는 성인은 아니다.
애슐리의 동생인 인디아가 멜라니에게 느끼는 감정을 들여다보자. 인디아는 오빠의 아내인 멜라니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멜라니의 애정은 항상 스칼렛을 향해 있기에 그녀는 원래도 싫어하던 스칼렛을 더욱 미워하고 질투한다(애슐리와 몰래 만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던 순간 스칼렛의 기억에 남은 장면이 '인디아 윌크스의 의기양양한 표정'이었을 정도로 둘 사이는 최악이다). 이렇게 멜라니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티 나게 스칼렛을 편애한다.
스칼렛이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멜라니는 그녀를 옹호한다. 스칼렛이 자신의 오빠인 찰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곧바로 재혼을 해버려도, 그렇게 얻은 두 번째 남편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거의 죽게 만들다시피 해도, 상류층 숙녀의 품위를 바닥에 처박으며 장사에 뛰어들고 품위 없는 사람들과 어울려도, 레트 버틀러와 염문을 뿌리고 다녀도 멜라니는 충직하게 스칼렛의 곁을 지키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대신 막아준다. 무엇보다 자신의 남편인 애슐리와 스칼렛이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고 나중에는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어도 멜라니는 스칼렛을 보호한다. 멜라니가 아니었다면 스칼렛은 진작에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다.
멜라니는 왜 이렇게 스칼렛을 아끼는 걸까? 그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멜라니는 착한 여자고 스칼렛은 나쁜 여자라는 문학적 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을 때 나는 멜라니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었다. 스칼렛이라는 캐릭터의 강한 인상에 비해 흐릿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씩 반복해 읽으면서 이 소설에서 멜라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차차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스칼렛과 멜라니를 포함해 4명이다. 스칼렛 오하라, 멜라니 윌크스, 레트 버틀러, 애슐리 윌크스. 이들은 사랑과 우정과 집착과 애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두 명의 멍청이와 한 명의 겁쟁이, 그리고 한 명의 현자'라는 말로 셋의 캐릭터를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주인공인 스칼렛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도 모르는 멍청이다. 레트는 자신이 스칼렛을 사랑한다는 건 알았으나 그녀가 사실 애슐리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으니 그 또한 멍청이였다. 그리고 애슐리가 있다. 스칼렛을 사랑했지만 멜라니와 결혼했던, 그러다 막상 살아보니 멜리니가 좋아졌지만 끝까지 스칼렛에게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이 우유부단한 금발 귀족 남자는 멍청이보다 더 나쁜 존재다. 그는 겁쟁이다.
그러나 스칼렛의 표현에 따르면 '못생긴 하트 모양 얼굴형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매력 없는 멜라니 윌크스 부인은 그녀가 해밀턴 양이던 시절부터 자신이 무엇을 왜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멍청이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현자였기에 약하고 외모도 평범했지만 모두가 그녀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부드러운 존경을 멜라니에게 기꺼이 바치는 것도 그녀가 현자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멜라니는 세상이 격변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차릴 만큼 현명했지만 달라진 세계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킬 만큼 처세에 능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과거에 속한 채 미래를 지켜보는 인물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미래의 모습이 바로 스칼렛에게 있었다. 멜라니가 스칼렛을 지켜주고 싶어했던 건 그녀를 연약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필연적으로 사회와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몸이 약한 멜라니는 자신이 살아서 가닿지 못할 미래를 스칼렛에게서 봤고, 그 미래에 진심 어린 신뢰를 바쳤다.
그리고 이 절대적인 신뢰는 중요한 순간 보상을 받는다. 전선이 애틀랜타 시내까지 밀려와 모든 시민이 대피해야만 하는 날. 남편인 애슐리는 임신만 시켜놓고 전쟁터로 떠난 지 오래고, 멜라니의 인품을 찬양하던 이웃 신사 숙녀들도 온데간데 없다. 위험에 처한 멜라니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갓 태어난 아기를 받아 탯줄을 끊어 주고 산모와 아기를 대피시킨 건 스칼렛이었다. 빨리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스칼렛은 발목을 잡는 멜라니가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이지만 욕설을 내뱉을지언정 그녀를 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숙녀의 품위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레트 버틀러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묘수를 생각해 내기까지 한다.
스칼렛의 이런 생명력, 위기 상황에 빛을 발하는 생존 능력은 멜라니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멜라니의 친구인 우아한 사교계 숙녀들은 스칼렛의 이런 생명력을 부담스럽게 느끼며 그녀를 향해 껄끄러운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현명한 멜라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 세계의 오래된 질서가 부서져 가는 이 혼란스러운 전쟁통에서 누구의 손을 잡아야 연약한 자신과 갓 태어난 아이가 살아남을지 알고 있었다. 스칼렛의 손을 잡으면 그녀는 아무리 싫어도 뿌리치지 않을 것이다. 길고양이가 자신을 키워줄 사람을 간택하듯 멜라니도 스칼렛의 옷자락을 부여잡았고 스칼렛은 멜라니와 그녀의 아기를 어떻게든 살려놨다. 그렇게 스칼렛은 멜라니의 은인이 되었고 멜라니는 그녀에게 진 빚을 잊지 않았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끝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칼렛을 지켰던 멜라니. 그녀는 자신의 남편인 애슐리도 진심으로 사랑했다. 희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었다. 스칼렛과 애슐리 사이에 흐르는 불온한 기류를 모른 척해야 그들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멜라니는 기꺼이 모든 걸 외면했다. 겁쟁이 애슐리가 스칼렛의 끈질긴 플러팅에 보인 애매한 반응처럼 비겁한 외면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한 용감한 결단이었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음을 스칼렛에게 알린다. 그녀를 그동안 멍청이로 취급해온 스칼렛은 멜라니가 속사정을 다 알면서도 인내했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이 세상 누구도 - 어머니조차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던 무한한 사랑과 이해를 자신에게 보내고 있었음을 깨닫고 크게 후회한다.
그러니까 스칼렛은 멍청이였지만 적어도 각성할 수 있는 멍청이였다. 이 점은 중요하다. 왜냐하며 세상에는 교화 불가능한 멍청이들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착하지만 변함없는 목석같은 인물보다는 멍청하지만 작품 속에서 변화하는 인물이 훨씬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스칼렛은 보여준다. 그녀는 일반적인 대중 소설의 주인공인 '착한 여자'보다는 악녀에 가까운 인물이고 가끔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정에 둔감한 멍청이지만 적어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한 여성의 죽음을 통해서 삶의 진실을 깨달을 만큼은 선량했고 또 현명했다.
멜라니의 죽음으로 스칼렛이 깨달은 진실이란 이렇다. 그녀가 지금껏 실제라고 믿었던 모든 강렬한 것들은 전부 허상이었다. 허상이라고 비웃었던 초라한 것들은 전부 실제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건 투엘브 오크스 농장의 대저택에서 보내는 유유자적한 오후뿐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을 만들어 스칼렛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레트와 멜라니의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녀가 자신이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애슐리를 향한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애슐리는 허상이었고 레트와 멜라니는 실제였다. 그러나 멜라니는 죽었고 레트는 그녀의 곁을 떠났다. 모든 건 그녀의 기대와 환상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떠난 사람들을 제외하곤.
2. 엘렌 오하라는 누구의 이름을 불렀나

오하라 가문에는 스칼렛 이전에 원조 멍청이가 하나 있었다. 스칼렛의 아버지인 제럴드 오하라다. 그는 아내인 엘렌 오하라를 사랑하고 숭배한다. 그의 경애를 받는 엘렌은 어떤 여인인가. 젊은 시절 그녀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를 놓치고 만다. 그 순간 엘렌의 청춘은 끝이 났다. 그녀는 사랑과 열정을 모두 잃고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되었다. 자신에게 미래를 약속하며 그녀의 과거를 책망하지 않을 만큼 둔감한 남자를 하나 골라잡아 결혼을 했다. 그렇게 엘렌 오하라가 된 그녀는 집안일을 두루 살피며 세 딸을 훌륭하게 키워낸 현숙한 부인으로 가족과 이웃의 존경을 받는다.
그녀의 남편만큼은 아니겠지만 딸인 스칼렛 역시 엘렌을 깊이 존경하며 사랑한다. 하지만 스칼렛은 아버지만큼이나 어머니를 모른다. 그녀는 어머니를 우아한 '숙녀'의 전형으로 여기지만 둘 사이에는 언제나 차가운 거리감이 있다. 엘렌이 스칼렛에게 단 한 번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인 제럴드에게도, 다른 두 딸에게도. 드러낼 진심이 없다. 줄 마음도 없다. 엘렌의 마음은 이미 과거의 연인과 함께 죽어버렸으므로.
전쟁 이전의 세계에서는 엘렌처럼 껍데기만 남은 사람도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자만이 생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엘렌에게는 생존의 의지가 없었다. 그래서 작가는 엘렌을 죽여벼렸다. (엘렌 오하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죽기 직전 그녀가 이상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무리했다는 묘사가 있기에 정황상 자살에 가까운 죽음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뒤늦게 엘렌의 죽음을 알게 된 스칼렛은 어머니가 사망하기 직전 어떤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는 사실을 전해듣는다. 어머니의 입에서 유언 대신 튀어나왔다는 낯선 남자의 이름. 그는 누구일까. 독자는 알지만 스칼렛은 모른다. 엘렌의 죽음으로 어머니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는 스칼렛이 영영 풀 수 없는 미제로 남게 된다. 그리고 제럴드 오하라는 이젠 정말로 껍데기만 남은 아내의 몸뚱아리를 부여잡고 그만 미쳐버린다. 원조 멍청이의 말년다운 모습이다. 엘렌은 그에게 한 방울의 진심도 주지 않았는데 그런 아내를 그토록 사랑해 상실감에 미치기까지 하다니. 도대체 그녀의 무엇을 사랑했기에.
제럴드는 엘렌(의 모습을 한 어떤 여자)에게 진심을 바쳤지만 엘렌에게 결혼은 계약일 뿐이다. 워낙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초반 몇 페이지에는 오하라 집안의 속사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드넓고 비옥한 목화 농장의 위풍당당한 지주인 제럴드 오하라와 그 뒤를 따르는 아름다운 부인 엘렌, 그리고 두 부부의 세 딸이 이루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러나 사실 제럴드는 마음씨 좋고 충동 조절을 못하는 알콜중독 아저씨일 뿐이고 이 집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살림을 꾸리는 일은 엘렌이 전부 하고 있다. 제럴드는 엘렌과의 결혼을 통해 어리고 예쁜 트로피 와이프를 얻음과 동시에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 줄 무보수 종신계약 노동자를 얻었던 것이다. 대신 엘렌은 제럴드를 통해 '어떤 남자의 부인'이라는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불공정 거래 같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에 실패한 엘렌은 그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동시대 여자들이 그랬듯이.
엘렌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스칼렛은 어머니의 결혼 생활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봤다. 영혼 없는 여자와 그 여자의 껍데기를 숭배하는 남자가 만들어내는 결혼이라는 촌극을 지켜보며 자라났다. 어른이 된 그녀는 세 번의 결혼을 한다. 애슐리와 어떻게든 가족이 되어보려는 발버둥으로 선택한 첫 번째 남편 찰스(찰스는 멜라니의 오빠이자 애슐리의 친척이다). 전쟁 상황에서 과부라는 사회적 제약을 벗어나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고 싶은 욕망으로 선택한 두 번째 남편 프랭크. 굶주림과 공포로 얼룩진 전쟁의 기억을 윤택한 생활로 덮어씌워 줄 거라는 기대로 선택한 세 번째 남편 레트. 세 번의 결혼은 모두 엘렌과 마찬가지로 계약 관계다. 독자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레트의 로맨틱한 청혼조차도 스칼렛에게는 거래의 순간이다. 다만 레트가 그녀를 원한다고 고백했으므로 그녀에게 조금 더 유리한 계약일 수는 있다.
그래서 스칼렛은 남편이 된 레트가 둘 사이에 습관처럼 자리 잡은 조롱과 가식을 들어내고 연약한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 우습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녀는 레트의 사랑을 세 살배기의 생떼처럼 취급한다. '당신 왜 이래? 우리 둘은 거래를 했어. 당신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 대신 당신은 나에게 재산과 울타리를 제공하는 거야. 내 사업과 내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울타리. 우리가 한 약속은 애초에 그런 거였잖아?' 이 반응으로 스칼렛을 무정한 악녀라고 손가락질한다면 그건 정말 안타까운 평가다. 엘렌과 제럴드를 보고 자란 그녀는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여운 스칼렛. 누구보다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는 뜨겁고 다정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그 마음이 있는지조차 자각할 수 없었던 불쌍한 스칼렛. 그녀는 어리석었지만 그 어리석음을 온전히 그녀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녀의 마음은 시대라는 비좁고 먼지낀 틀 안에 갇힌 채 속절없이 썩어가고 있었으므로.
스칼렛은 아버지 제럴드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려준 건 선명한 푸른 눈과 성마르고 거침없는 성격만이 아니었다. 사랑의 방식도 대물림이 됐다. 허상을 끌어안고 이것이 실제라고 굳게 믿는 멍청이의 사랑 말이다.
3. 스칼렛이 버린 것과 버리지 않은 것

어머니 엘렌의 죽음이 스칼렛에게는 신의 죽음이다. 그녀는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그려낼 만큼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의 머릿속에서 신은 어머니 엘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향 집 복도를 따라 서걱서걱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어머니는 결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차갑고 어려운 존재다. 스칼렛이 또래 소녀들이 흔히 그렇듯 소소한 고민으로 괴로워할 때 엘렌은 엄격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숙녀가 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흔들림 없이 제시한다. 신이 인간을 하늘에서 지켜보듯이, 어디선가 어머니가 나의 행동을 감시하며 선을 넘는 순간 단죄할 거라고 스칼렛은 습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엘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어머니의 금기를 어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머니 엘렌을 스칼렛은 동경과 두려움과 사랑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대한다. 어머니가 원하는 '숙녀'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애써왔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를 닮았기에 절대 어머니처럼 품위 있는 숙녀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공포와, 숙녀처럼 재미없고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 싫다는 반감이다. 그래서 엘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스칼렛은 슬픔과 동시에 한 가지 '못된' 감정을 함께 느낀다. 그건 바로 안도감이다.
전쟁이 신을 죽인 세상을 그녀는 맞닥뜨렸다. 신이 죽은 세상에서 숙녀가 아닌 그녀는 자유를 얻는다. 원래라면 치장과 남편감 찾기에 몰두하며 심심한 젊은 날을 보냈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신이 죽은 세상에서 스칼렛은 뭐든지 할 수 있고, 실제로 뭐든지 한다. 전남편들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강행한 두 번의 재혼. 굶어 죽지 않으려고 시작한 농업 노동과 더 잘살아 보려고 시작한 상업 노동. '내가 신사가 아니듯이 너 역시 숙녀가 아니야'라고 그녀의 귓가에 줄기차게 속삭여온 레트 버틀러를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그녀는 '숙녀'라는 단어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사회적 압박을 하나씩 떨쳐내며 점점 어머니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런 스칼렛이 온갖 규율을 깨트리면서도 절대로 하지 않는 단 두 가지 행동이 있다. 이것은 신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종의 불문율이다.
1 - 기사도를 잃지 않는다.
아무리 목숨이 위태로워도 산모와 아기(멜라니와 그녀의 아들)를 버리지 않는다.
2 -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땅(타라)을 팔지 않는다.
이 두 원칙을 포기하면 신사와 숙녀가 아닌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이길 포기하게 된다. 멜라니가 스칼렛을 신뢰했던 건 스칼렛이 '숙녀'의 이름을 버릴지라도 사람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인디아 윌크스 같은 숙녀들은 그 반대를 선택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숙녀로 남았을 수도 있다. 포화 속에서 멜라니를 버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기절하거나 나몰라라 도망쳤을 수도 있다. 혹은 스칼렛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이익과 사회적 체면을 위해서 얼마든지 타라를 팔아치울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스칼렛이 그런 위선자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멜라니는 정말 현명한 사람이었다.
4. 포화 속으로 떠난 레트 버틀러와 마가렛 미첼의 한계

레트 버틀러는 자신이 신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칼렛보다 훨씬 일찍, 스스로 깨쳤다. 남부의 부유하고 잘나가는 가문 출신인 그는 마차 사고라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사건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재미없게 살 운명이었다. 그러나 레트는 그 운명을 스스로 거부하며 반항아가 된다. 삐딱선을 탄 레트는 사회의 언저리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며 재산을 쌓는다. 사회를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그는 신사임을 포기했어도 좋은 가문의 남자였고 태생적인 권력과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가족들은 레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사교계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해적'이라고 수군거리지만 자유를 위해서 그 정도 무시나 손가락질은 감수할 수 있다.
그렇게 레트는 남부 귀족 사회의 언저리에서 갖고 싶은 것들을 취하고, 비웃고 싶은 것들은 마음껏 비웃으며 스스로 선택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왔다.
레트 버틀러가 비웃는 대상에는 전쟁도 있다. 처음에 레트는 전쟁을 재산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 무역업에 종사하며 전시라는 특수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재산을 불리지만 자신이 속한 남부가 승리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도덕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레트가 어디 그런 걸 신경 쓰는 인물이었던가. 남부 사람들이 현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산업이 발달한 북부는 일찍이 노예 해방 같은 진보적이고 실리적인 가치를 논의할 만큼 정신적, 물질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러나 노예 노동으로 축적된 부유함을 누리기만 했던 남부는 모든 면에서 농업 중심 사회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레트 버틀러는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패배할 게 뻔한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 (남부가 패할 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던 또 다른 캐릭터는 바로 애슐리 윌크스다. 이 사실은 스칼렛이 사랑했던, 언뜻 보기엔 전혀 다른 부류처럼 느껴지는 두 남자에게 인상적인 공통점을 부여한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뿐인 자신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방해해 온 남부 사회에 대한 레트의 애증은 깊고도 복잡하다. 그래서 그는 애틀랜타 시내가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면서 남부의 패배가 확실해지는 그날 밤 도시를 떠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도시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지도 않은 채 시가지가 망가지는 모습을 변방에서 구경하며 방관한다.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리라를 연주했다는 미친 황제 네루처럼 사창가에서 창녀들과 술을 마시며 밤을 보내는 레트. 허무와 비관이 극에 달하는 순간, 창문 밖에서 누군가 그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스칼렛이다. 멜라니는 아이를 낳았고 스칼렛은 불타는 도시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과 꼭 닮은 모습으로, 그러나 자신과는 달리 살아남기 위해 절박하게 싸우고 있는 여자를 보며 레트는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방관자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들인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으며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대목은 마차를 몰아 도시를 빠져나온 레트가 스칼렛에게 말고삐를 쥐어주고 그녀의 곁을 떠나버리는 장면이다. 어렸을 때는 여주인공을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내버려두고 가버린다고? 하면서 기겁했고, 어른이 된 뒤에는 레트 버틀러라는 인물의 가치관을 한순간에 변화시킨 동기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 그의 가슴에 어떤 불꽃을 일으켰던 걸까? 사랑하는 스칼렛이 보여준 생을 향한 의지가 레트를 감동시켜 비관주의에서 빠져나오게끔 했나? 폭탄이 날아오고 화마가 일렁거리는 아수라장을 보면서 사실은 자신에게도 대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남부 동맹을 향한 충성심이 있었음을 깨달았나?
여하튼 레트 버틀러는 그날로 입대해 패전하는 순간까지 남부의 편에서 싸운다. 그리고 그의 이런 행보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당혹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전쟁이 단순히 미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전쟁이 아니라, 흑인 노예를 해방하느냐 마느냐는 도덕적 가치가 걸린 전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의 명예로운 애인이 되기 위해서 한 번은 전쟁터로 갈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차라리 끝까지 참전하지 않고 방관자 또는 도망자로 남는 것이 나았다. 남부 동맹은 명예롭지 않았으며 그들이 지키기 위해 싸운 사회 또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없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패전한 남부 사회를 향한 미첼의 시선이 모순적이라는 점을 나는 늘 흥미롭게 여겼다. 전쟁이 끝난 후 스칼렛은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귀족 사회의 신사 숙녀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흥 자본가들과 어울린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다 함께 굶어 죽어가는 중인 재미 없는 남부의 올드머니들과 다르게 전쟁 특수로 큰돈을 번 뉴머니들은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하며 유쾌하게 사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화려한 겉모습으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천박한 부류라는 것을 간파한 스칼렛은 새 친구들에게 금세 흥미를 잃는다.
레트도 마찬가지다. 스칼렛과 레트의 딸인 보니 블루 버틀러가 태어나자 그는 사랑하는 딸을 뉴머니 틈바구니에서 근본 없이 키울 수는 없다고 선언하고는 보니를 데리고 자신이 한때 거부했던 올드머니 사교계에 들어가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한때 해적이자 배신자 취급을 받았던 버틀러 선장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남부의 편에서 싸운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레트는 대단하신 올드머니들의 인정을 받아 나름대로 사회에 편입된다.

모순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때 남부의 상류사회는 스칼렛과 레트를 억압하는 족쇄이자 굴레였다. 그래서 그 안에 속한 사람들 역시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관습을 지키며 어리석은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레트 버틀러와 스칼렛 오하라는 그 귀족들의 세계에서 말라 죽지 않기 위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을 열심히 헤엄쳐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작가는 스칼렛과 레트의 눈을 통해 점점 더 과거를 동경하게 된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비루한 실패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가난하지만 우아한 귀족들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가렛 미첼은 남북전쟁 세대의 인물은 아니지만 부모님과 이웃들을 통해서 전쟁 이전 풍요로웠던 남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젊은 시절 제 1차 세계대전이 사회를 바꿔놓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쟁 이후에 나타난 신흥 자본주의는 작가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느낀 혐오감을 이 소설 속에 가감 없이 묘사했다. 대단한 솜씨였다(지금까지 읽은 모든 장르 문학과 순문학을 통틀어 미첼만큼 필력이 좋은 작가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2020년 미국의 방송사인 HBO는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인 HBO Max에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삭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작품의 오랜 팬들조차도 이 조치가 공정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남북 전쟁을 다룬 고전 명작으로는 드물게 대놓고 남부의 편을 들며 노예제를 옹호하는 문제적인(negative) 소설이고 이 논란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마가렛 미첼은 작가로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독자들을 설득하려 든다. "사실 남부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흑인들도 노예제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았어…. 스칼렛의 유모인 마미를 봐, 빨간 내복도 선물 받잖아? 오해와는 달리 우리는 자비로운 주인이었단 말이야. 너는 모르겠지…. 그 시대가 얼마나 우아하고 풍요로웠는지" 그녀의 필력이 너무 뛰어난 탓에 깜빡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어린 독자들은 알아야만 한다. 작가의 모든 수사는 오직 변명과 추억팔이를 위한 빌드업일 뿐이라는 사실을.
불완전한 현실을 벗어나 더 나은 세계를 소환하는 것은 이야기꾼의 특권이다. 어떤 작가는 과거를 재현하고, 어떤 작가는 현재를 연민하며, 어떤 작가는 미래를 상상한다. 세 가지를 다 해내는 사람도 있다. 마가렛 미첼은 단 한 편의 소설로 문학사에 이름을 올릴 만큼 재능 있는 작가였다. 하지만 과거의 재현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선택적으로 추출해서 불러온 과거는 전혀 공정하지도 사실적이지도 않다. 그녀가 연민한 현재 역시 '우리들만의 현재'였다. 트럼프가 'Make America Great Again'라고 부르짖으며 자신들이 전보다 가난해졌다고 생각하는 미국 백인들을 사로잡은 프레임을 창조해낸 것처럼 말이다.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에도 미첼은 실패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한때는 답답하게 여기며 벗어나고 싶어 했던 남부 귀족들의 세계로. 그들만 풍요롭고 그들만 우아한 세계로.
스칼렛의 흑인 유모인 '마미'가 더 이상 '유모'라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성과 이름으로 구성된 고유명사로 불리게 되는 시대. 마미의 자손들이 자신만의 레트 버틀러와 자신만의 애슐리를 만나 사랑하고 미워하며 누군가가 쓴 소설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 그들이 인권을 가진 시민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 마가렛 미첼은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는 못했다. 소설가로서 그녀가 가진 한계였는지, 그녀 인격의 한계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한계는 문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이 근사한 소설을 도저히 고전의 반열에 올릴 수 없게 만든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나타난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평등과 민주주의의 가치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끝까지 외면했기 때문이다.
5.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 후의 이야기
'열린 결말'로 끝나는 작품을 생각할 때 내 머릿속에는 항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떠오른다. 멜라니가 죽고 레트가 떠난 순간 좌절하던 스칼렛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내게는 타라가 있다. 타라로 돌아가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고 레트는 반드시 내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유명한 장면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작가인 미첼 여사가 이렇게 독자들을 미치게 만드는(positive) 열린 결말을 쓴 후 후속작도 내지 않고 48세에 사망해 버렸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를 다룬 수많은 속편이 쏟아졌다. 가장 인기가 많은 몇 작품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었고, 어릴 때부터 덕후 기질이 다분했던 나는 공립 도서관에서 그 속편들을 모두 찾아 읽었다.
속편을 쓴 작가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레트가 스칼렛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가' 였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레트와 스칼렛의 재결합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속편들을 영 재미없게 읽었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레트가 스칼렛에게 돌아갈 것 같지도 않다. 그에게 그녀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둘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상처가 있다. 레트가 스칼렛을 보며 딸 보니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있을까. 스칼렛이 그가 자신에게 가한 폭력을 떠올리지 않는 날이 있을까(스칼렛이라면 다 잊었을 것 같긴 해ㅋㅋ).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관계를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나. 무엇보다 노인이 된 레트와 스칼렛이 지팡이를 짚고 서로를 부축하며 교외의 산책길을 걸어가는 모습 따위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타라로 돌아간 스칼렛이 고구마 장사로 대성공을 거두고, 레트는 벨 와틀링의 업소에서 술을 마시며 젊음을 모두 바쳐 사랑했던 한 여자가 휩쓸고 지나가버린 자신의 청춘을 씁쓸하게 회상하는 장면이 훨씬 쉽게 상상이 된다.
상관없다. 그가 돌아오건, 돌아오지 않건. 중요한 건 스칼렛의 가슴에서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니까. 레트와 멜라니가 떠난 뒤에도 스칼렛은 억척스럽게 잘 살아갔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착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스칼렛이 인생에 대한 진실을 깨달았다고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선량하고 성숙한 인격체가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스칼렛은 인격적으로 분명히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심리 검사를 해 보면 성격장애 한두 가지 정도는 분명 나올 법한 이 못되고 이기적인 여자는 무려 노예제도와 KKK단을 대놓고 옹호하며 역사의 반대편에 선 이 문제 많은 소설과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라는 스칼렛의 쓸쓸하면서도 희망찬 독백이 끊임없이 젊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수많은 착하고 도덕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살아남아 끊임없이 재출간되고 번역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가 스칼렛이라는 여자를 마치 살아 있는 인물처럼 여기며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한 인간이 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녀는 모든 걸 잃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녀 자신의 잘못으로. 그러나 모두가 그녀를 떠나 혼자가 된 바로 그 순간, 자신에게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온 세상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해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을 한 가지. 나의 정체성. 내가 나고 자란 땅. 그녀가 죽는다면 그 땅에 묻힐 것이기에 그것은 죽음으로도 잃을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을 잃어도 잃지 않는 뭔가를 가졌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런 걸 가진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가.

이 소설에 내재된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끊임없이 새로운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스칼렛 오하라가 불멸의 캐릭터로 세대를 넘어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