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웹툰 <저무는 해, 시린 눈>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4. 어느날 왕국에 잔인하지 않은 왕자가 태어났다 : 레나드 프리데일트와 지도자의 자질
힐데가르는 동쪽에서 온 아이. 저무는 해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신비로운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어린 그녀는 납치당했다.

어린 힐데가르를 태양신의 비석 위로 내쳐서 피흘리게 만든 건 남부 기사의 폭력적인 손길이었다. 기사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무심코 휘두른 팔 한쪽이 두 나라의 운명과 수많은 백성의 생사를 바꿔놓을 거라는 걸. 침략지의 꼬마였다. 아무렇게나 죽여도 뒤탈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팔을 휘둘렀다. 잔인하게 대해도 해가 되지 않는 존재였기에.
모든 것은 잔혹한 우연이었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잔혹한 운명이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사람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만사를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왜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마음에 드는 개념과 서사를 골라 동아줄처럼 꽉 붙잡을 뿐이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명사가 아니다. 주목해야 하는 건 형용사다. 모든 것은 ‘잔혹한’ 우연이었다. 또는 모든 것은 ‘잔혹한’ 운명이었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과정은 잔혹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러니 지금부터는 해석의 여지 없는 진실인 잔혹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기사는 잔인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잔인함이다. 개인은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기원을 굳이 캐묻고 악에 서사를 부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봤자 그 인물의 본성이 바뀌지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작품에는 언제나 현상 뒤에 더 큰 맥락이 숨어 있다. 이 장면의 핵심은 이렇다. 잔인한 기사 뒤에는 잔인한 부대가 있고, 잔인한 부대 뒤에는 잔인한 군대가 있으며, 잔인한 군대 뒤에는 잔인한 나라가 있다는 것.
기사들의 나라라는 남부 왕국. 그 나라에서 기사들은 점령지의 힘없는 아이에게 함부로 팔을 휘둘렀다. 아이는 비석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흘렀다. 자신은 그때 이미 한 차례 죽었던 거라고, 훗날 힐데가르는 회상한다.

이름 모를 부족의 빨간 머리 소녀는 비참하게 죽었다. 신의 힘이 아이가 죽은 자리를 채웠다. 왕은 당황했다. 그가 계획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왕이 원한 건 직접 태양의 힘을 몸에 담는 인간 병기가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번뿐인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는데. 왕은 빨간 머리 꼬마를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왕궁에는 이번 글의 주인공인 레나드가 살고 있다. 레나드는 현왕의 조카이자 선왕의 아들이다. 레나드의 아버지인 선왕에 대해서는 언급이 많지 않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연애결혼을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평화주의자였다. 레나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전 협정을 하러 가는 길에 북부의 피습으로 사망했다.

이 짧은 언급에서 얻어낼 수 있는 몇 가지 정보가 있다. 레나드의 아버지는 정치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던 인간이었으며, 전쟁보다는 휴전을 원하던 왕이었다. 아마 그는 별로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좀 물렁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길바닥에서 서글프게 죽었겠지.

현왕인 모르모데스는 선왕과 다르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 싶은 게 아니다. 종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겨서 끝낼 수도 있고, 져서 끝낼 수도 있다. 양측의 협상으로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르모데스는 전쟁을 그냥 끝내고 싶지 않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싶다. 그래서 신의 힘을 스스로 몸에 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놈의 기사가 휘두른 팔 때문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그놈의 팔 때문에. 요즘 말로 하자면 억까를 당했다고 모르모데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모르모데스는 왕국의 백성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척할 뿐이다. 그래야 눈앞에 있는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아이가 바로 인간 병기니까. 힐데가르를 전쟁에 나서게 만들기 위해서 그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 그녀 안에 있는 선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라는 걸 알자 기꺼이 그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는 가스라이팅의 귀재다.

어쨌든 왕궁에서 두 아이는 만난다. 왕의 조카인 레나드와 왕국의 인간 병기인 힐데가르. 둘 사이에는 까마득한 신분 차가 존재하지만 아이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수십 년간 이어지는 전쟁으로 왕국은 불안정하고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어른들이 전쟁으로 바쁜 틈에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정이 싹튼다.

이 우정을 주도하는 사람은 레나드다. 첫 만남부터 그는 힐데가르에게 동경의 눈길을 보낸다.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약한 레나드의 눈에는 다치거나 아플 때마다 스스로 치유하는 힐데가르의 능력이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녀는 그가 꿈꾸던 영웅이다.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울 수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도 있다. 숙부인 왕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다. 다정한 심성을 가진 레나드는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손쉽게 해내는 또래 친구를 웃으며 지켜본다. 마음속 깊은 곳에 질투와 부러움을 꼭꼭 감춰둔 채로.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갑작스레 끝나고 만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투에 투입됐던 힐데가르가 왕궁으로 복귀한 날, 레나드는 그녀를 붙잡고 전투가 어땠는지 묻는다. 항상 전쟁터를 동경했을 뿐 현실 전쟁의 잔인함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소년은 흥분에 차 있다. 그러나 힐데가르에겐 멋모르는 왕자님의 순진한 동경에 응해줄 여유가 없다. 전쟁터에서 끔찍한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그녀는 반쯤 이성을 잃고 그를 공격한다. 이 사건으로 레나드는 귀 한쪽과 함께 하나뿐인 친구를 잃는다.

힐데가르와 이별한 레나드는 혼자다. 그에게는 믿을 만한 동지도, 배움을 얻을 스승도, 마음을 터놓을 대화 상대도 없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고 자각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가 따뜻하게 추억하던 고모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조카에게 독을 먹여온 소리 없는 암살자였다. 숙부인 모르모데스 왕이 서로 친구나 하라고 붙여 준 또래조차도 사실은 왕국의 인간 병기이자 미래 왕의 자질을 시험하는 시험관이었다.

모르모데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왕의 자질은 태양의 힘을 다루는 것이었가. 그래서 그는 레나드가 자신처럼 힐데가르를 조종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레나드는 힐데가르를 무기가 아닌 친구로 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힘에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레나드가 한쪽 귀를 잃은 끔찍한 날, 모르모데스 왕은 조카에게 부적합 딱지를 붙이고 그를 후계자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로써 레나드는 숙부의 감시와 고모의 견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친구와 맞바꾼 자유였던 셈이다.

몇 년이 지나 아이들은 청년이 되었다. 전쟁이 여전히 한창이지만 레나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왕자의 신분이지만 도무지 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테리온이 뒤뜰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레나드 역시 차가운 왕궁에 우두커니 앉아 흘러간 일들을 곱씹는다. 힐데가르는 왜 나를 공격했을까. 우리의 우정은 어째서 그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나.
답답한 마음에 승마라도 해보려고 마구간에 갔을 때 생긴 일이다. 울타리 너머에서 검은 말 한 마리를 본다.

하지만 마구간지기는 그 말이 쓸모없다고 말한다. 건강한 몸을 가졌음에도 달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나드는 묻는다.
“세상에는 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말도 있는가?”
그 말이 이상한 존재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레나드는 언제나 달리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몸만 건강했더라면, 나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나도 힐데가르처럼 영웅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약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레나드는 힐데가르가 전쟁을 종식하고 돌아온 영광의 자리에서 칼을 집어 던지고 왕 앞을 떠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니까. 그런 그의 머릿속에 문득 마구간에서 본 말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래, 달리고 싶지 않은 말이란 게 있었지. 그렇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기사도 있을 수 있겠다. 힐데가르는 싸우고 싶지 않은 기사였던 걸까.
막혀 있던 생각의 흐름이 트이자, 돌풍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달리고 싶지 않은 말에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채찍질은 폭력이다. 그렇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힐데가르에게도 그 모든 기대와 요구가 폭력이었을 것이다. 레나드가 보내는 막연한 동경과 찬탄의 시선까지도 - 모두 폭력이었다.

지난 글에서 나치 전범 재판을 지켜봤다는 철학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사적 영역이 돈이나 생로병사와 같은 생활의 영역이라면 공적 영역은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와 다른 존재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요구를 수용하고 조정하며 함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어린 레나드는 자기밖에 몰랐다. 당연했다. 원래 아이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나 자라면서 아이들은 세상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와 완전히 다른 성향과 욕망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 나는 달리고 싶은 말이어도 타자는 달리고 싶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 나는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넉넉한 재산을 가졌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머리가 뛰어나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정치는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해야 한다. 사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어린아이가 아닌 공적 영역을 인식하며 스스로 그 영역에 진입한 어른이 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을 쥐는 사람들은 그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걸 가지고 많은 걸 배운 엘리트들이다. 많이 배웠을지 몰라도 그 지식으로 뭔가를 깨우치진 못한 자들이다. 레나드가 말의 눈에서 얻은 깨달음을 영원히 얻지 못할 사람들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다 못해 벗겨졌어도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들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오직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욕망, 나의 이해관계, 나의 기분, 나의 뜻.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다. 그런 자에게 권력을 준다면 당연히 자기를 위해 전부 다 쓸 것이다. 권력을 사유화할 것이다. 그러나 부유하고 많이 배운 자가 곧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수천만 명이나 있다. 그래서 왕위가 계승되지도 않는 공화국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흰머리 금쪽이가 왕의 자리에 올라 내란을 주도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레나드가 귀를 잃었다는 설정에 주목해보자. 캐릭터의 외형 변화는 작품 내에서 큰 사건이다. 귀를 잃는다는 것은 물리적이고 비가역적인 변화다. 이 변화는 인물을 망가트릴 수도, 성장시킬 수도 있다. 레나드에게 사라진 귀는 돌이킬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의 흔적이다. 귀가 날아가면서 레나드의 마음속에 있던 질투와 시기가 터져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추악해진 사람들의 사연을 우리는 문학과 현실에서 종종 접하곤 한다.

그러나 레나드는 추해지지 않았다. 고통받고 상처입었음에도 그는 고민하고 사유하길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알아차린다. 세상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 깨달음으로 그는 먹고, 싸고, 자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으로 진입한다. 다시 말하지만 공적 영역은 곧 정치의 영역이다. 그렇게 ‘달리고 싶지 않은 말’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레나드는 왕도(王道)에 한 발짝을 내딛는다.

물론 처음에 그는 자신이 왕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레나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왕이 되고 싶어.” 이렇게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왕이 될 거야.”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왕이 될 수도 있어.”

Want(욕구)나 Will(의지)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는 단어다. 그는 이 왕궁의 인형극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끌려다니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약해빠진 왕자님. 그게 레나드다. 모르모데스는 미덥잖은 조카가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일찍이 접었다. 왕국의 기준에서는 자격 미달이 맞았다. 그 왕국은 잔인한 왕국이고, 레나드는 잔인하지 않은 왕자였으니까.

다시 잔인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저무는 해, 시린 눈>에서 가장 잔인한 인물은 누구일까. 이 작품의 독자라면 누구나 디온 프리데일트를 떠올릴 것이다. 왕의 또 다른 조카이자 레나드의 사촌인 디온은 자주 나오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다. 밑도 끝도 없이 잔인하고 사악한 그는 등장할 때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무언가 사고를 친다.

디온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통해 독자는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1. 디온 프리데일트는 잔인하다.
2. 그의 잔인함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잔인함은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된다. 모르모데스의 잔인함에는 적어도 목적이 있었다. 그가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가스라이팅한 것에는 나라를 위해서라는 구실이 있었다. 디온의 어머니이자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알리시아도 잔인한 인물이지만, 그녀에게도 왕위를 얻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목적도 구실도 없이 잔인한 인간은 오로지 디온뿐이다. 그는 그냥 끔찍한 인간이다.

디온은 사악할 뿐 유능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평민이라면 그의 손에 큰 권력이 주어질 가능성은 낮다. 레나드가 이웃집 꽃미남인 다른 작품이 있다고 치자. 이 세계에서는 디온 역시 동네 백수에 불과하다. 이런 설정 아래선 그의 잔인함이 사회적으로 크게 해롭지 않다. 길고양이나 괴롭히며 살았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개인으로 나쁜 짓을 해 체포당하고 머그샷이 찍히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왕자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디온처럼 잔인하고 무능한 인물의 손에 제한 없는 권력이 무조건적으로 쥐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파국이다. 그러나 이 왕국은 잔인한 왕국이기에 디온은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는다. 적어도 레나드처럼 배척당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지만 그것이 그의 입지를 흔들지는 못한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디온 프리데일트는 잔인하며, 그의 잔인함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만약 사회가 지금 향하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디온은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왕국은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잔인한 사회의 말로가 디온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왕국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어린 힐데가르가 왕궁에서 만난 친구 중 하나인 트리아나다. 한때 잘나가는 기사였던 트리아나는 부대원들이 점령지 아이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목격하고 욱하는 마음에 나섰다가 사형 판결을 받아 인간 병기의 살아있는 샌드백 신세가 됐다.

요컨대 그녀는 힐데가르에게 무심코 팔을 휘두른 기사와 반대편에 있는 존재다. 왕국의 잔인함을 묵과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감옥에 갇혔다. 왕국의 잔인함을 용납하지 못했기에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고 죄수가 되었다.

이 왕국은 레나드에게 독을 먹이고 트리아나를 감옥에 가뒀다. 기사들의 왕국이라는 남부는 그런 곳이었다. 전쟁에서도 이기고 구성원들 역시 그럭저럭 먹고는 살고 있었을지 몰라도, 잘 들여다보면 구석부터 중심부까지 고루 썩어 있었다. 꼭 동아시아 끝자락에 붙어 반쪽으로 갈라진 어느 반도처럼 말이다.
그런 왕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왕도를 걷기 시작한 레나드 왕자의 첫 번째 정치 행위는 바로 ‘사죄’다. 성인이 된 레나드는 힐데가르를 찾아가 숙부의 폭력과 자신의 오해를 정성껏 사과한다.

레나드가 왕국에서 힐데가르에게 유일하게 용서를 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깟 사죄가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정치적인 사죄다. 애초에 두 아이의 우정은 이웃사촌끼리의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둘의 만남은 고도로 계산된 정치 행위였다. 모르모데스 왕은 레나드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해 그를 왕국의 인간 병기에게 붙여놓았다. 그리고 시험 결과 조카는 충분히 잔인하지 않기에 그 잔인한 왕국의 차기 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나드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역사를 기억하며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모르모데스에게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잘못된 체제는 제대로 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인물을 내친다. 잔인한 프리데일트 왕국에서 유일하게 잔인하지 않은 프리데일트였던 레나드. 그의 유년기가 트라우마틱한 사건과 생존을 향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건 그가 잘못된 체제 아래서 자랐기 때문이다.

<저무는 해, 시린 눈>은 로맨스 판타지다. 작품의 배경 역시 공화국이 아닌 왕국이다. 이 세계에서 지도자는 선출되지 않으며 권력은 세습된다. 그런 나라에서 우연히도 잔인하지 않은 왕자가 태어났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레나드의 아버지가 무른 사람이라 정략결혼 대신에 연애결혼을 해서 레나드라는 사람이 탄생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레나드가 잔인한 왕국에서 견제를 받느라 외롭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인물로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 마는지.

다시 강조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회가 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어린 소녀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든 그 왕국은 사실 뿌리부터 썩은 나라였다. 잔인한 기사, 잔인한 부대, 잔인한 왕실, 잔인한 왕국. 잔인한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잘못된 체제를 갈아엎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레나드가 좋은 정치인이 될 이유는 많다. 그는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이념과 함께 다정하고 너그러운 성향도 지녔다. 타자를 이해하고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공명정대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공적 삶을 위해 자신의 사적 삶을 희생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레나드의 아버지는 연애결혼을 했다. 그러나 작중 레나드는 연애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힐데가르를 사랑하지만 비비아나와 결혼해 정치적 입지를 굳힐 생각이다.

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나드는 이웃집 꽃미남이 아니라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신념도 뚜렷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신념은 '희생'이다. 권력을 가진 자신이 희생해야만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레나드는 작품 후반부에 깨닫는다.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한때 마녀라 불렸던 영웅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이제 공은 인간에게 넘어왔다.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 인간은 더불어 살기 위해 사회를 이루고 정치를 한다. 또 다른 레나드와 또 다른 힐데가르, 상처받고 이용당하는 아이들이 다시는 없으려면 정치의 역할을 맡은 자가 소임을 다해야 한다. 자신이 왕이 되어야 힐데가르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레나드는 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을 이룬다는, 희생의 가치를 기꺼이 실천에 옮긴다. 참으로 어른다운 모습이다.

골백번 강조해도 모자란 사실. 정치는 어른이 해야 한다. 주인공도 아닌 그를 위해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건 바로 그래서다. 정치는 이런 인물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연히도 그런 인물이 이 땅에 나타났다면, 그 인물이 수많은 죽음의 위협 - 생명과 정치생명 양쪽 모두가 끝날 위협을 딛고 지금의 자리에 섰다면, 그리고 그가 정말로 간절하게 평원을 달리고 싶어 하는 말이라면 그를 달리게 해주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공화국 시민들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달리고 싶은 말을 달리게 해 주자. 평원을 그에게 주자. 그가 마음껏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다.
저무는 해, 시린 눈
북부를 불태운 전쟁 영웅, 태양의 마녀 '힐데가르'.마녀에게 부모를 잃은 시린 눈의 북부인, '에르킨'.정체와 복수심을 뒤로 숨긴 채 가까워지는 두 사람.신화와 전쟁, 가호와 저주, 사랑과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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