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이야.
내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지.
내게는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없어.
나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게
몰입하고 있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대.
그러니 그녀에게 미쳤다고 해도 괜찮아,
왜냐면 그녀가 미쳤다는 건 바로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니까!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2 주제곡-
전남친 조쉬를 따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도시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한 레베카. 그녀는 유능한 변호사이기에 지역 로펌에서 무난하게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날이 웨스트 코비나에 적응해 간다.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예고 없이 오가며 널뛰는 그녀의 감정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일중독자의 면모는 웨스크 코비나의 따뜻한 날씨와 여유롭고 다정한 이웃들 사이에서 점차 둥글게 다듬어져 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녀로 하여금 뉴욕에서의 삶을 때려치우고 이곳까지 오게 만든 광기는 따뜻한 날씨와 다정한 사람들만으로는 쉽사리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드라마의 제목은 <힐링타운 웨스트 코비나>로 지어졌지 <크엑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레베카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고, 그녀의 선 넘는 행동들은 자신의 의지로 일으키는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정신적인 문제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증상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한 시청자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레베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네가 어떤 일을 하건 지지할 거니까!”라며 주인공의 행동에 절대적인 응원을 보내서는 안 되는 드라마다.
왜냐면 극 중에서 레베카는 이런 짓들을 하기 때문이다.


1. 조쉬 여자친구에게 접근하고 조쉬한테 관심 없는 여사친인 척 잘해줘서 친해진 다음 같이 클럽 가서 키스하고(조쉬한테 x 조쉬 여친한테 o) 사실 자기가 예전에 조쉬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폭로해 버리기.


2. 조쉬의 절친 그렉과 타코 페스티벌에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던 도중 말도 없이 그렉을 길거리에 버려놓고 그날 처음 만난 다른 남자를 집에 끌여들어셔 원나잇하기.


3. 브로치 모양 초소형 몰래카메라를 차고 조쉬네 본가에 가서 일어나는 일들을 친구 폴라한테 라이브로 중계하기. 조쉬네 본가 화장실에 숨어서 조쉬가 여자친구랑 섹스하는 소리 들으면서 그것도 폴라한테 중계하기.

4. 조쉬가 여자친구랑 동거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자 사무실에서 연필꽂이 컵으로 보드카 퍼마시다가 중요한 업무 미팅 망칠 뻔하기.


5. 우울해서 약 받으려고 아무 상담소나 찾아갔는데 임상심리사가 약 처방을 거절하자 진료소 화장실 바닥에서 발견한 뭔지도 모르는 약을 먹고 밤새도록 조증 삽화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마약까지 하고 (자기가 주고 온) 처방전을 훔치려고 새벽에 임상심리사 사택 겸 진료소 담을 넘어 고양이 문으로 침입 시도하기. 고양이 문에 가슴이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들키기.


6. 조쉬네 집에 침입해서 핸드폰 비밀번호를 풀고 잘못 보낸 문자 삭제하기. 그러다 조쇠한테 걸리니까 자신에 집에 누가 침입해서 이 집으로 도망 온 거라고 둘러대고 실제로 침입자가 있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해 직장 동료인 폴라에게 자기 집 창문을 깨트리도록 사주하기.


7. 조쉬한테 관심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사귄다고 거짓말을 치고 그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냅다 키갈하기.




8. 불행히도 그렇게 나타난 트렌이라는 남자는 레베카에게 집착하는 정신병자 스토커였고 초반부터 이상한 놈인 티를 팍팍 냈는데도 그가 이탈리아 요리를 끝내주게 만들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이유로 침대 발치에서 며칠씩 재워주기.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외롭고 공허하다는 이유로 스토커 트렌이랑 원나잇 하기.

9. 절친 폴라의 로스쿨 입학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조쉬한테 잘 보이려고 탁구 연습하고 조쉬 친구 쫓아다니다가 홀랑 잊어버려서 결국 마감 기한 넘기기.

10. 어찌어찌 조쉬랑 사귀는(사실 그냥 같이 자는) 사이가 됐는데 임신 테스트도 안 해보고 조쉬한테 임신했다고 선언했다가 생리가 시작되는 바람에 1분만에 말 바꿔서 경악한 조쉬한테 차이기.


11. 조쉬와 조쉬 친구 그렉한테 동시에 차인 다음 둘의 물건들을 없애겠다고 한곳에 모아 실내에서 기름 붓고 태우다가 집에 불 내기. 911에 전화를 하긴 했는데 집에 불이 났다고 제대로 신고도 안 하고 횡설수설해서 웨스트코비나의 미친 방화녀로 유튜브 스타 되기.

12.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조쉬의 새 여친이 혹시 마약상일까 봐 스토킹하다가 여친 고양이 차로 치기. 고양이 차로 친 증거 인멸하려고 조쉬의 또 다른 전여친이랑 함께 새 여친 가게에 몰래 침입해서 CCTV 기록 지우기.



13. 절친 폴라의 미성년자 아들 데리고 조쉬 만나러 클럽에 갔다가 아들은 잃어버리고 조쉬가 클럽 화장실에서 새 여친이랑 섹스하는 걸 변기 칸에 몰래 숨어서 지켜보기.


14. 또 다시 어찌어찌 조쉬랑 다시 사귀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됐는데 결혼식 당일에 식장에 나타나지 않고 신부가(브라이드 x 프리스트 o) 되겠다고 도망가버린 조쉬에게 똥으로 만든 컵케이크 보내기. 조쉬 닮은 아시아계 배우 고용한 다음 페이크 포르노 찍어서 유포하려고 시도하기. 다행히도 시도만 하고 찍지는 못했다..
15. 조쉬가 신부(브라이드 x 프리스트 o) 서약을 하는 자리에 웨딩드레스 입고 쫓아가서 지금까지 자기가 한 모든 미친 짓들 샤라웃해 버리기. 원래는 조쉬의 잘못들을 까발릴 작정이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조쉬는 식장에 안 나타난 걸 빼고는 뭘 한 게 없고 거의 다 레베카가 저지른 일들이었다는,,


16. 혹시라도 자기가 한 짓들 조쉬가 소문내고 다닐까 봐 변호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조쉬를 인종차별주의자에 게이 혐오자에 거짓말쟁이에 인성 파탄으로 몰아가는 기사를 온라인 저널에 저널에 올려서 조쉬 평판 나락 보내고 인간관계 박살내기. 조쉬가 직장에서 도둑질을 한 것처럼 꾸며서 잘리게 만들기.


17. 그것도 모자라서 조쉬를 따라다니고 익명으로 전화하고 편지보내고 감시하고 집에 침입해서 곰인형 목매달며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18. 자신을 걱정하고 도와주려는 친구들한테 상처주는 말을 퍼붓고 홧김에 집을 뛰쳐나와 호스텔에서 머무르면서 날라리 비행 청소년처럼 웨스트 코비나를 헤매고 다니다가 후미진 술집에서 만난 전남친 그렉 아버지랑 원나잇 하기.

19. 조쉬랑 헤어지고 사귄 새 남친 나다니엘 아버지 스토킹해서 불륜 증거 잡았다고 생각하고 나다니엘에게 알렸는데 사실은 불륜이 아니라 그냥 식사 대접받는 자리일 뿐이어서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기.

20. 나다니엘이랑 대충 fwb로 지내기로 했으면서(레베카가 찼음) 계속 신경쓰이는 나다니엘의 새 썸녀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고 다크웹에 접속해서 살인청부업자 검색하기.


21. 스토커 트렌에게 다크웹 접속 기록으로 협박당해서 사귀는 척 하다가 나다니엘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트렌을 옥상에서 밀쳐서 죽일 뻔하고 살인미수 혐의로 감옥 들어가기.


하지만 그녀가 일으킨 가장 심각한 사건이자 이 드라마의 최대 반전은 따로 있었다. 앞서 레베카가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 로스쿨을 졸업했다고 했는데, 사실 이 디테일한 이력은 드라마 내에서 일종의 복선이었다. 그녀가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레베카는 유부남 교수와 불륜 관계였다. 그러다 이별을 통보받자 교수를 스토킹하다가 그의 아파트에 침입해서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다. 방화 사건으로 레베카는 재판을 받지만 정신질환을 사유로 정상 참작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대신 병원에 입원한다. 그래서 하버드 대학원에 합격했음에도 입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다른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판장에서 레베카의 엄마가 판사에게 했던 말이 시즌 2의 테마 곡에 등장하는 가사이다.
"레베카는 그저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일 뿐이에요. 이 아이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없어요."

방화 사건은 레베카에게도 큰 상처로 남아 그녀는 해리성 기억 상실 증상을 보이며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웨스트 코비나에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두 번째 방화도 그녀가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스토커 트렌이 그녀의 어두운 과거를 파헤쳐 조쉬에게 폭로함에 따라 이 사건은 레베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일반적으로 시트콤 형식의 드라마는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한 시즌 내에서 갈등이 생겨났다 봉합되고 화합하면서 이야기가 완결되는 구조를 가진다. <크엑걸> 역시 언뜻 그런 클리셰를 따르는 듯 보인다. 작은 갈등과 오해, 사건들이 일어났다가 해결되고,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희노애락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레베카의 가장 친한 친구인 폴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깨닫고 로스쿨에 입학한다. 또 다른 친구인 헤더는 현실에 부딪히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하게 되며,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결혼도 한다. 레베카의 연적이었지만 나중에 친구가 되는 발렌시아는 조쉬와 헤어진 후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직업을 구한다.
이들은 실수도 저지르고 때때로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연대하고 응원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멋지고 주체적인 여성들이다. 사람들이 미드에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바로 그런 캐릭터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레베카는 어떨까? 레베카는 성장하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광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진다. 주변 캐릭터들과는 달리 갈수록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며 자기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레베카를 지켜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 사람의 바닥은 어디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전남친의 현여친을 감시하다가 그녀의 고양이를 차로 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마조히스트 성향이 있는 스토커랑 원나잇을 하는 게 레베카의 바닥인가? 전남친 닮은 배우를 고용해서 페이크 포르노를 찍는 건? 전남친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집에 불을 지르거나, 사실 자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뻔해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건?

그렇게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던 그녀는 시즌 3 후반부에서 마침내 스토커이자 레베카의 남자 버전인 트렌으로 인해 실제 범죄에 휘말린다. 그녀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체포되고 구금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여지껏 그녀가 저질렀던 모든 행동과 감추고 싶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했던 방화 사건은 레베카가 체포되기 전에 이미 웨스트 코비나의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알려진 상태다. 레베카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완전히 바닥을 쳤다. 그녀를 이보다 더 추락시키려면 그녀를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로 만들어서 이 드라마의 주제를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르게 된 레베카에게 새로운 남자인 나다니엘은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어쩌면 모든 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불행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 즉 부모의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왜냐면 무엇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거든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결과일 뿐이죠.
무엇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에요.
(...)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어요.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요.
나다니엘은 인생의 모든 책임을 나쁜 부모가 초래한 끔찍했던 어린 시절로 돌리라고 레베카를 유혹한다. 이것은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너는 잘못한 게 없고, 모든 것은 너의 부모가 형편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너는 네가 한 행동에 책임이 없어. 네가 이렇게 불행한 것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도,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다니는 것도 다 네 부모의 책임일 뿐이야.

실제로 레베카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사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도, 돌보지도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기만 하는 무책임한 남자였다.

레베카의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양육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수준의 통제 성향과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어린 레베카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괴롭혔다.
그 때문에 레베카는 대학생 때부터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며,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한 주먹씩 먹고 상담도 받았지만 수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행복감이나 만족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녀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린 시절에 돌리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감옥으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에서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털어놓는다.
"제게는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에요. 저는 이제껏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항상 다른 누군가가 제 인생을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 뒀었어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는 어머니가 결정하게 냅뒀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제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정하게 냅뒀죠. 저는 그 결정에 잠자코 따랐어요. 그것들이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모두 제가 내린 결정이었어요. 내가 한 선택이었어요. 내 인생이니까요."
시즌 3의 마지막 화까지 레베카는 언뜻 능동적이고 똑똑한 엘리트 여성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슴 속에서 날뛰는 광기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숙주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녀가 드라마 속에사 보이는 행동 역시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의 구현이라기보단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고 순간의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겉잡을 수 없는 충동의 표현이자 전남친 조쉬 첸이 상징하는 왜곡된 환상을 깨트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을 의식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며 이런 저런 시도를 깔짝거려 보기도 했지만 모두 그때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살인미수 피의자로 재판장에 서게 될 때까지 주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진심으로 책임을 져본 적도 없었다.

이런 레베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대학생 때 저지른 방화 사건이다. 이때 그녀는 모든 행동의 원인을 자신의 정신 질환으로, 즉 그녀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입원 치료를 받지만 이 치료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모든 부끄러운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서게 된 법정에서 레베카는 대학생 때와는 달리 정신질환을 핑계 삼아 법망을 빠져나가기를 거절한다. 자신이 트렌을 해치려고 했던 것을 인정한 그녀는 형을 살기로 결심한다. 레베카가 감옥에 가겠다고 선언한 순간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선택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자,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과 더 넓게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때 비로소 그녀는 변화할 준비, 치료받을 준비가 된다.
앞서 나는 레베카의 상태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 동안 웨스트 코비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울고 웃고 싸우고 상처받고 화해하고 이별했다. 그러면서 뉴욕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우정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때로는 레베카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슴 저리도록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미친 전여친답게 대부분의 충고를 무시하거나 한 귀로 흘려버리고 또 다시 광기 어린 행동에 돌입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레베카에게 가 닿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베카가 법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대상은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는 판사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변호사 나다니엘도 아니다. 그녀가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은 웨스트 코비나에 와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를 항상 믿고 지지하며 따뜻한 사랑을 건네주었던 단 한 사람, 폴라다.








시즌 3의 마지막 화에서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에 오기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장면은 그녀가 수많은 사건들을 일으키고 겪으면서 조금씩 나빠지는 동시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바닥을 치고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는 미쳤고, 그 광기가 그녀를 이 작은 도시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로소 그녀는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광기와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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