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간은 다를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담이 될 거야, 나는 알아
이번 환자도 다른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이제는 그녀도 성장하고 싶을 거라는 걸

수많은 방화를 저지르고 찾아온 여자아이들이
수차례 나를 번아웃에 빠트렸었지
그럼에도 희망과 인내심을 잃지 않았어
하늘이 보우하사, 건강보험을 받지 않는 덕분에
시간당 250달러를 벌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번 상담은 유용한 시간이 될 거야
환자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만 하다면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겠지
치유의 숄도 잊지 말고 챙겨야겠다
벽에 걸린 멋진 학위 액자에 키스를 보내면서
행운을 기원해야지, 이번에는 다를 거니까
그녀가 달라지도록 도울 수 있을 거니까

맙소사, 이번엔 정말로 달라야만 해
안 그러면 상담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말 테니까!

-심리 상담가 아코피온 박사의 노래

 

나약한 미국인들, 그들은 정신과와 심리상담소를 자기 짐 침실처럼 드나든다. 의지의 한국인이라면 분명 노오력과 정신승리로 이겨낼 수 있는 사소한 사건들 조차 상담사에게 찾아가 상세하게 털어놓으며, 부모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를 고해바치기 위해서 시간당 수십 수백 달러를 지불한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도 마찬가지다. 시즌 1에서 조쉬가 여자친구와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베카는 극심한 불안감과 우울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뉴욕에 살던 시절부터 정신과를 일상적으로 이용해 왔기에 어렵지 않게 지역의 심리 상담소를 찾는다.
 

하지만 레베카는 전문 임상심리사와의 1대1 상담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이기에 그녀는 미리 준비해 간 쪽지를 내밀며 상담사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여기 적힌 약들을 전부 주세요." 그 쪽지에는 그녀가 뉴욕에 있을 때 복용했던 각종 정신과 약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레베카는 뉴욕에서처럼 쉽게 약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웨스트 코비나의 임상 심리사인 아코피온 박사는 그녀가 가져온 약 리스트를 보고 경악하면서 레베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베카, 당신이 뉴욕에서 만났던 의사들은 돌팔이에요. 그들은 당신에게 반창고를 줬을 뿐 치료를 해준 게 아니었어요. "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에게 약을 주는 대신 자신의 방법론을 차근차근 따라올 것을 제안한다. 먼저 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직면한 다음 적절한 약 처방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미 여러 차례 심리 상담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코피온 박사의 제안을 불편하게 여긴다.

 

우리 함께 당신의 어린 시절로 깊이 파고들어 봅시다 :)
어, 이러실 줄 알고 걱정했던 건데
사실 저는 이미 상담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고
어린 시절의 얘기들도 그때 다 털어놨었어요.
이제 그런 건 정말로 그만 하고 싶어요.
사실 저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을 위해서기도 해요.
선생님한테까지 짐을 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두 사람의 강렬한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나지만 아코피온 박사는 다음날 아침 레베카를 다시 보게 된다. 전날보다 훨씬 강렬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약에 흠뻑 취한 채 고양이 문에 끼여서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이때 아코피온 박사는 레베카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정기적으로 여기 와서 저와 상담을 받겠다고 약속하면 당신을 침입죄로 고소하지 않을게요."  미국에서 주거 침입은 심각한 범죄이므로 레베카는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아코피온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쉬한테 톡하면서)"쌤 근데 저 이미 기분이 나아졌어요" EZR

 
하지만 레베카는 상담을 열심히 받지 않는다. 이미 전에 다 해본 시시한 상담 따위를 뭐 하러 진지하게 받겠는가? 그녀에게는 이미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녀만의 전문 상담사이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정신과 의사이자,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대리 부모이자,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완벽하기 그지없는 꿈의 연예인이자, 그녀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빈틈없이 채워주는 친구이자, 입만 열면 명언을 쏟아내는 인생 스승인 조쉬 첸이 있는데 말이다.
 
 

*레베카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베이비,
이젠 어린 시절 트라우마들을 보내 줘도 돼
절대 그리워질 일은 없을 걸
네 안에 담아 왔던 그 스트레스들이 말이야
네 모든 정신적 문제들
우린 함께 풀어나갈 수 있어
왜냐면 우린 단순히
조쉬가 4명인 보이밴드가 아니라
동시에 정신건강 전문 자격을 지닌
전문가들이기도 하니까

이 가사가 암시하듯 레베카에게 조쉬는 단순한 짝사랑 상대가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조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며 그녀가 꿈꾸는 행복한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인물이다. 레베카는 조쉬와 사귀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만성적인 우울감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불도저처럼 직진한다.
 

그 결과 그녀는 시즌 1의 마지막 화에서 그토록 바라던 조쉬의 고백을 받고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조쉬의 친구인 그렉도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그녀는 자신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우쭐해한다.
 
 

삼각관계에 빠진 레베카가 얄밉게 부르는 노래, "The Math of Love Triangles"는 고전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사운드트랙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코피온 박사다.
 

당신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진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저는...!
지금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지요.
하지만 당신의 갈등은 사실 그 남자들과 관계가 없어요.
레베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란 걸 받아들여야 해요.

 
한참 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신나게 자존감을 채우고 있던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에게 반기를 들며 "당신은 틀렸다"고 외친다. 그녀는 자신을 이곳 웨스트 코비나로 이끌었던 하늘의 계시가 이번에도 자신의 앞에 나타나 선택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상담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제가 웨스트 코비나로 온 건 우주가 저한테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라고요!!

 
상담보다는 하늘의 계시를 기다리겠다며 뛰쳐나가 버리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보며 아코피온 박사는 과연 저 사람의 돈을 계속 받으며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돈을 모아서 카약을 사겠다는 목표가 있던 아코피온 박사는 결국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젊은 변호사의 등골을 계속 뽑아먹겠다는 결심을 유지한다.
 

이후에도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와 약속한 대로 정기적으로 상담소를 드나든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녀는 마치 '나의 기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다. 레베카의 기분은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 한 명, 즉 조쉬와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조쉬와 분위기가 좋거나 둘 사이에 긍정적인 사건이 생기면 레베카의 기분도 날아갈 듯 좋아진다.
 
 

조쉬와 좋을 때의 레베카

 
기분이 좋을 때 레베카는 아코피온 박사와의 상담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귀찮은 잡일 정도로 취급한다. 이렇게 기분이 좋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어째서 상담 따위를 받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코피온 박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만족감에 취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수차례 조언하지만 레베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쉬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레베카의 기분도 한없이 우울해진다. 이럴 때 그녀는 아코피온 박사에게 자기혐오, 우울감, 조쉬에 대한 미움과 실망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쏟아놓기 위해 상담소를 찾는다. 이때 그녀에게 상담은 완전히 감정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조쉬와 안 좋을 때의 레베카

 
아코피온 박사는 이렇게 다루기 어려운 내담자를 어르고 달래 가며 레베카가 그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레베카의 방어기제는 상담을 통해서 깨지기에는 이미 너무나 견고해진 상태다. 그녀는 이미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많이 만나봤었고, 심지어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이미 정신건강 영역과 관련해서 너무 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는 레베카의 귀에 심리 상담사인 아코피온 박사의 이야기가 진지하게 들어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강력한 레베카의 방어기제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아코피온 박사는 그녀가 달라질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레베카와 계속 상담을 진행한다. 레베카가 이번 상담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하며 변화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담아 부르는 노래가 바로 글 앞부분에서 소개한 <이번 상담은 다를 거야>다.
 

"조쉬가 성직자가 된다고요?!"(물론 그전까지 둘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진짜 엄청난..상상 이상의 일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코피온 박사가 위의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레베카의 첫 집착 상대인 조쉬 첸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레베카의 엄청난 애정 공세에 휘말려든 조쉬는 시즌 2에서 그녀와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결혼식 직전 레베카의 과거가 담긴 파일을 전해받은 조쉬는 그것을 열어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고, 결국 선택을 회피하기 위해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두고 달아난다. 이 사건으로 조쉬에 대한 레베카의 속절없는 판타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제 그녀가 조쉬에게 품고 있는 것은 오직 불타는 증오뿐이다.
 

조쉬 사건 이후 레베카의 이상 행동은 점점 심해져 이제는 친구들까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다. 당연히 그녀의 평판은 수직으로 내리꽃히고, 레베카는 도망치듯 뉴욕에 있는 본가로 떠나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몰래 항우울제를 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다시 웨스트 코비나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안에서 본가에서 가져온 약통에 있던 항우울제를 전부 삼켜 병원으로 실려간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그녀는 자신을 담당한 정신과 의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레베카, 제 소견에 따르면 당신은 지금까지 오진을 받아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사랑의 삼각형도 그렇고 이거 번역하신 분 실력이 대단하시다

 

새로운 정신질환 진단을 기다리면서 레베카가 부르는 노래는 뮤지컬 위키드에서 주인공인 엘파바가 부르는 넘버인 <마법사와 나>와 닮아 있다.
 

평생을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려 온 레베카는 마침내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된 증상으로 인정해 줄 '새로운 진단명'을 향해 막연하고 근거 없는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초록 피부의 마녀 엘파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사의 초대를 받은 뒤 위대한 마법사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거라고 희망차게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초록색 피부를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가 바꿔줄 거라고 엘파바가 기대하는 것처럼, 레베카 역시 새로운 진단명이 자신의 고통을 씻은 듯이 치료해 줄 거라고 기대한다.

 
희망에 차 눈을 빛내는 레베카에게 의사는 낯선 진단명을 내놓는다. 각종 정신의학 병명에 통달한 그녀조차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진단명을.


"제 소견에 따르면, 당신에게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여러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뭔가요?"

"일반적으로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요. 세상의 여러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피부를 가지지 못한 거라고 할 수 있죠."
 

진단명 인터넷에 검색해서 괜한 불안감 느끼지 말라고 선생님이 경고했지만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가서 검색해주고요(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처음에 레베카는 이 진단을 믿지 않는다. 기껏해야 비교적 잘 알려진 질환인 조울증이나 편집증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병명이었던 탓이다. 그녀는 이 새로운 의사도 전에 그녀를 진단했던 의사들처럼 돌팔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밤중에 무작정 아코피온 박사를 찾아간다.


이전 내담자를 내쫓고 무작정 쳐들어온
레베카를 앞에 앉혀 놓고 아코피온 박사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분류 및 진단 절차인 'DSM-5'에서 사용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아홉 가지 진단 기준을 하나하나 읽어 준다. 극한직업 상담사

 

1:59 부터

 
"급격한 기분 변화, 심각한 유기 공포, 불안정한 대인 관계, 급변하는 자아상, 피해망상 또는 해리성 삽화, 과도하고 빈번한 분노, 만성적인 공허감, 충동적인 행동, 자살 시도 또는 위협."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회상씬과 함께 레베카는 경계성 인격장애 증상이 자신과 전부 일치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인정하며 마침내 자신의 질환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가장 치료하기 힘든 인격장애'로 악명이 높은 경계성 인격장애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진단 이후 그녀가 벌이는 많은 소동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조쉬 이후에 사귀는 남자를 대하는 레베카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야야야 잠깐만
우리 이러는 거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당연하지, 이게 우리 마지막 섹스잖아(레베카는 환자니까 그렇다 쳐도 나다니엘 니는 참..)

 
결혼식장에서 달아난 조쉬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레베카는 진지한 관계를 회피하며 나다니엘과 육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신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한다. 그녀는 남들보다 지나치게 강력한 소유욕과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집착,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자기 자신이 불편한 나머지 모든 상황을 회피하며 도덕적인 책임마저 방조한다. 막다른 곳까지 다다르고 만 레베카의 회피와 방어기제를 우리는 이 대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나다니엘의 여자친구인) 모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니까 상처받을 일도 없죠. 그녀와 저는 서로 만난 적도 없다고요.
 
게다가 저는 지금까지 해본 것 중에서 가장 건강한 연애를 하는 중이에요. 이 남자에게 집착하지 않고 있어요. 왜냐면 어차피 그를 절대 가지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사람에게 거는 기대치가 난생처음으로 현실적인 차원으로 내려온 거예요. 어제는 나다니엘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몇 시간 동안이나 답장을 해주지 않더라고요. 한데 그동안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무려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니까요. 그런데도 기분이 괜찮았어요. 다 잘 되고 있는 거예요. 다 괜찮은 거라고요. 아시겠죠?"
 

레베카의 헛소리를 듣는 아코피온 박사의 표정

 
그렇게 또다시 자해에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레베카에게 아코피온 박사는 당신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며, 부디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또 다시 진심을 다해 충고한다. 그러나 레베카가 이 말을 어디까지 새겨 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마음 깊이 변화를 겪으며 진심으로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는 것은 시즌 4에서부터다. 스토커 트렌과의 긴 악연을 마침내 끝내고 정당방위 판결을 받아 교도소에서 석방된 그녀는 이제 정말 달라지기를 원한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집과 상담소를 오가며 성실하게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상담사와의 면대면 상담이나 집단상담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레베카는 이전 시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 예전의 자신으로 관성적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공허하다는 이유로 술을 퍼마시고는 눈에 띄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원나잇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에 고통받는 레베카의 노래, "I'm Not Sad You're Sad"(곡이 정말 숭하다)

 
그러자 시즌 1에서 레베카에게 약을 주기를 거절했던 아코피온 박사가 역으로 그녀에게 항우울제를 먹어보라고 제안한다. 이번에 망설이는 것은 레베카다. 사실 레베카에게 약물은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그녀는 뉴욕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며 각종 정신과 약을 달고 살았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그녀의 근본적인 불행감을 해결해 주지 않았고, 사실 레베카는 약을 먹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레베카가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한 첫날에 한 일도 조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먹던 정신과 약들을 싱크대에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약은 절대 이렇게 버리면 안 됩니다!! 남은 약은 포장을 뜯지 말고 가까운 행정복지센터나 약국에 가져다 줍시다!!

 
또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어머니가 사실은  딸기 스무디에 몰래 항우울제를 섞어서 마시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경험도 있다. 이 일로 약물 과다복용을 한 레베카는 거의 죽을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능하면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노오력과 의지만으로 나아지고 싶어 한다.
 
 

곡 제목: "어쩌면 우리 엄마는 그렇게까지 가증스런 쌍X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 레베카에게 아코피온 박사는 <항우울제는 정말 별거 아니에요!>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영화 <라라랜드>를 오마주한 이 곡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트랙 가운데 하나이며,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물론 한국에서는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낸 <변호사 되지 마세요>라는 곡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 드라마는 하나도 안 유명한데 이 곡 혼자만 유명하다는 게 슬플 뿐이지..)
 
 

항우울제 먹어본 적도 없는데도 크게 감독받아버림

 

걷고 말하는 걸 배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우리가 특별하다고 말하죠.
그 말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당신은 우울하니까, 그건 특별하지 않아요.
(...)
말하자면 이런 거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클럽에 잘 왔어요.
당신은 오디션 없는 연극에서
배역을 따낸 거예요.
그래, 모두가 특별하단 게 보통은 맞지만
약 문제에 관해서만은
당신은 존나 평범하기 짝이 없어요!

 

이 곡에서 특히 멋진 대목은 레베카가 약통 모양의 커다란 신발 상자를 선물 받는 장면이다. 상자 안에서 탭댄스 구두를 꺼낸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로 활짝 웃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짠! 마법처럼 구두가 레베커의 발에 신겨지고, 그녀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박자를 맞추며 멋진 춤을 춘다.
 

우울감을 피하기 위해서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해 왔던 약물이 자신을 근본적으로 나아지게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레베카와 시청자가 함께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우울감과 싸우며 살아가는 칭구들 모두 힘냅시다


이렇게 시즌 1에서 약 처방을 거절했던 아코피온 박사가 오히려 약물 사용을 권장할 만큼 레베카는 달라져 있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장치는 바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이다.

 
시즌 1에서 시즌 3까지 총 44개 에피소드의 주어는 모두 레베카가 사귀는 남자들이다. 조쉬가 37번, 나다니엘이 5번, 트렌이 1번 제목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딱 한 번 등장하는 다른 남자의 이름은 레베카의 친구인 폴라의 첫사랑이다).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조쉬가 우연히도 여기 살고 있네!> 시즌 1 1화
<조쉬의 여자친구는 정말 멋져!> 시즌 1 2화
<조쉬의 친구와 나는 데이트를 할 거야!> 시즌 1 4화
<조쉬의 기분이 왜 나쁜 걸까?> 시즌 1 17화
<조쉬가 데이트하는 저 멋진 여자는 누구지?> 시즌 2 4화
<조쉬의 수프 요정은 과연 누구일까?> 시즌 2 8화
<조쉬는 내가 꿈꾸던 남자가 맞을 거야, 그렇지?> 시즌 2 11화



조쉬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직후인 시즌 3 초반부에서는 조쉬에 대한 레베카의 격렬한 분노가 느껴지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배신감을 느껴도 여전히 조쉬는 제목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쉬의 전여친은 복수를 원해> 시즌 3 1화
<조쉬는 거짓말쟁이야> 시즌 3 3화
<조쉬의 전여친은 미쳤어> 시즌 3 4화
<조쉬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시즌 3 5화

 
<조쉬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시즌 3 6화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레베카의 마음은 조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제목에 등장하는 것은 나다니엘이라는 새 남자다.

 
<나다니엘은 내 도움이 필요해!> 시즌 3 8화
<나다니엘이 메시지를 받았어!> 시즌 3 9화
<오 나다니엘, 가보자고!> 시즌 3 10화
<나다니엘과 나는 그냥 친구야!> 시즌 3 11화

 
시즌 3은 <나다니엘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마침내 시즌 4에서 레베카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하자 제목에서 남자들의 이름이 사라진다. 이제 제목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레베카 자신, 그러니까 '나'다.

 
<나는 여기 있고 싶어> 시즌 4 1화
<나는 부끄러워> 시즌 4 2화
<나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시즌 4 5화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야> 시즌 4 8화
<나는 휴식이 필요해> 시즌 4 12화
<나는 오늘밤 데이트를 해> 시즌 4 16화
<나는 사랑에 빠졌어> 시즌 4 최종화

 

 

에피소드의 주어가 레베카로 바뀌면서 드라마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이전까지 레베카의 광기가 만들어 낸 기묘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은은하게 휩싸여 있었던 이 드라마는 이제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 미드로 바뀌었다.

 
안타깝게도싸패냐? 레베카는 이전처럼 돌발 행동을 하면서 보는 사람에게 황당함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던 광견병 걸린 개 같은 여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고통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기쁨과 책임감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고 느끼면 '나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고 성장하는 진정한 시트콤 여주인공이 되었다. 비록 극적인 재미는 약간 떨어졌을지라도 시즌 4까지 보고 있자면 레베카에게 정이 많이 들어서 그녀의 변화를 마음으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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