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뉴욕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돈을 벌었지만, 기분이 우울했어.
어느 날 나는 한바탕 울고 나서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하기로 했어.
새 친구들과 새 직장
우연히도 전남친 조쉬가 사는 곳이지만,
내가 여기 온 건 그 때문이 아니야!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주제곡-
로맨틱 코미디 영화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털털하고, 다정하며, 어딘가 허술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품 속 남자들과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의 호감을 살 만큼 충분히 통통 튀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쟤는 좀 미쳤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러나 2015년에 방영하기 시작해 2019년에 총 4개의 시즌으로 종영한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는 “좀 미쳤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귀엽게 묘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물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현대인의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인격장애(성격장애)에 관해 보기 드물게 진지하고 현실적이며 깊이 있는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레베카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인격장애 환자라는 것을 시즌 3이 될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녀를 전에 진찰했던 의사들이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성 의존증 등으로 그녀의 질환에 대해 오진을 내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온갖 정신 나간 짓들을 하면서 다닌다. 한 마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 레베카 번치는 미쳤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쓰이는 ‘미쳤다’는 말은 주인공의 인물 소개란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꾸며주는 위트 넘치는 수식어가 아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쓰겠지만, 그녀가 극 중에서 연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또는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일으키는 사건들은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에 어울리는 웃기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보다는 당장 수갑을 차고 감옥에 끌려가야 하는 범법 행위에 가깝다.

레베카는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말할 때 ‘저렇게’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제발 레베카가 내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제발 내가 레베카 같은 짓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를 바랄 것이다.

그녀는 미쳤다. 개로 치자면 광견병에 걸린 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사람인 그녀는 누가 봐도 훌륭한 스펙을 가진, 보그나 에스콰이어 잡지에 인터뷰 기사가 실릴 것 같은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외동딸이자,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아이큐 160의 수재. 현재는 뉴욕의 유수 로펌에서 일하고 있으며 승진을 눈앞에 둔, 잘 나가는 엘리트 여성.
그러나 제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한 품종견이라도 광견병에 걸린 개는 그저 한 마리의 미친개일 뿐이다. 레베카도 마찬가지다.

뉴욕에서 레베카는 아주 불행하다. 그녀가 이 도시에서 느끼는 불행감과 우울감은 색을 통해 화면에 구현된다. 뉴욕에 있는 그녀의 집과 직장, 그리고 거리는 온통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다. 그녀는 파란 인터넷 화면을 보며 눈을 떠 파란 옷을 입고 파란 광고판이 걸린 거리를 지나 직장으로 출근해 역시 파란 옷을 입은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
사실 레베카의 눈은 갈색이지만 뉴욕에서는 그녀의 눈동자 색까지도 푸른색으로 빛난다. 그녀의 눈에 비친 뉴욕은 그야말로 사람을 “Feel Blue” 그러니까 우울하게 만드는 곳인 것이다.


뉴욕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집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일어난 26살의 변호사 레베카는 출근 준비를 하다가 TV에서 버터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본다. 광고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요?]

로펌에 출근한 그녀에게 승진 소식이 전해진다. 분명히 날아갈 듯 행복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레베카는 기뻐하기는커녕 뒷걸음질을 치며 회사에서 뛰쳐나온다. 공황 약을 먹으려고 약통을 꺼내지만 덜덜 떨리는 손 탓에 알약을 전부 길거리에 쏟고 만다.

막다른 골목에서 레베카는 손을 모으고 나름대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하느님, 저는 과학을 믿기 때문에 기도 같은 건 안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제게 길을 알려주세요. 에이맨. 아니 아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그녀의 눈앞에 또다시 아침에 봤던 버터 광고가 나타난다.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요?
레베카는 이 문구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며 광고판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고판에 붙어 있던 화살표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눈부신 햇살과 함께 짜잔! 마치 계시와도 같이 한 남자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는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16살이던 그녀와 2달 동안 사귀었던 소년이자 그녀의 첫사랑인 조쉬 첸이다.


레베카는 당장 그에게 달려가 두 사람은 십 년 만에 인사를 나눈다. 조쉬는 거리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뉴욕의 우울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삭막하고 경쟁적인 도시를 벗어나 막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실망한 레베카는 조쉬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까, 너 어디 산다고 했지?”
“웨스트 코비나,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동네야. 2시간이면 해변에 갈 수 있는 곳이지! 차가 막히면 4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환한 웃음을 짓는 조쉬는 레베카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떠난다. 언젠가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그의 뒷모습을 보며 레베카는 결심한다. 자신도 웨스트 코비나로 가야겠다고. 직장에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갈 생각인 걸까? 아니, 그녀는 로펌을 그만두고 이사를 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30년쯤 지나서 은퇴한 후에 가서 살겠다는 뜻일까? 아니, 지금 당장. 그러니까 오늘 바로 가서 살겠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된다. 레베카는 웨스트 코비나에 평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당연히 그 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조쉬와 레베카는 고등학교 여름 캠프에서 짧게 사귀고 헤어져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기에 조쉬는 그녀의 연고라고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와 직장과 모든 삶은 뉴욕에 있다.



게다가 웨스트 코비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살기 위해 이사하기에도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지역이다. 로스엔젤레스 동쪽에 있는 이 지역은 10만 명 정도의 인구 중 아시아 인종의 비율이 25% 정도로 비교적 높은 편이라는 걸 제외하면(극 중 조쉬도 필리핀계 미국인이다) 유별나게 특별하지도 대단히 아름답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소도시다.
이 작은 도시가 현관문만 열면 시원한 해변이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이상적인 휴양지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해변까지 2시간밖에 안 걸려요!’라는 <웨스트 코비나> 테마곡의 자조적인 마지막 가사로 알아차릴 수 있다.

잘나가는 뉴욕 변호사인 레베카가 16살 여름에 잠깐 사귀었을 뿐인 전남친 조쉬를 따라서 무작정 웨스트 코비나 같은 낯선 시골 동네로 이사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더 무서운 건 정작 조쉬 본인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레베카의 로펌 상사들은 그녀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자 뉴욕의 다른 로펌 또는 시카고나 보스턴에 있는 경쟁사로 이직한다고 생각하지, 그녀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도시로 떠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앞에서 강조했다시피 레베카는 미친 여자다. 그녀는 자신을 승진시켜주겠다고 말하는 상사들 앞에서 연봉 55만 달러를 받는 로펌을 때려치우고 뉴욕 생활을 청산한다.

비행기를 타고 웨스트 코비나로 날아가 새 직장을 구하고 살 집도 찾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뇐다. “나는 조쉬 첸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게 아니야... 우연히 그가 여기 있었을 뿐이야.”
그녀는 자신이 조쉬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자신은 그저 웨스트 코비나에서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신과 시청자들에게 변명하고 또 변명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She’s Crazy Ex Girlfriend!”
“걔 완전 미친 전여친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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